영적 가족의 능력

누가복음 8:19-39
19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26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35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쌔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설교요약>

요한복음 7장 4-5절 말씀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도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영적인 눈이 가리워지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도 인간적인 눈으로 보게 된다.

영적인 가족의 중요성

가족의 중요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할 정도로 효자였다. 따라서 21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가족들에게 불만이나 거절감에 의한 상처로 표현한 말씀이 아니다. 즉 예수님은 영적인 가족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다.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면 영적인 일을 알지 못한다. 영적인 일은 육신적인 일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이 한 기적들을 체험해도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지 못하면 그분의 능력을 세상적인 유익의 도구로만 보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과 결혼해야 한다. 그 이유는 육적인 관점이 아닌 영적인 관점으로 보고 함께 나눌 가족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신실한 가족들을 둔 사람들은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예배와 교제 속에서 생명을 공급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가족에도 위험성이 있다. 그럼 건강한 영적 공동체는 무엇인가?

건강한 영적 공동체

함께 선교하기- 22절에 보면 함께 시간을 내서 고통 가운데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을 구하는 일에 헌신된 공동체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기 때문이다.

함께 폭풍 이겨내기- 23절에 보면 영적인 공동체에도 고난이 존재한다. 하지만 24절에 보면 건강한 영적인 가족은 고난이 올 때 원망대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즉 삶의 고난을 예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체험한다. 

믿음 도전 받기- 25절에 보면 예수님은 삶의 크고 작은 폭풍을 통해서 우리들을 준비시키고 자신의 믿음의 상태와 내면의 어떤 부분들을 성장시켜야 하는지 알게 하신다. 건강한 영적인 공동체는 함께 폭풍을 경험하고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경험한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믿음의 도전을 받고 성장해 간다. 그럼 왜 예수님은 영적인 가족들에게 이런 3가지를 경험하게 하시고 훈련 시켜는가?

세상 속에서 하시고 싶은 일

26절에 거라사인의 땅에 있던 귀신들린 자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상태를 보여준다.

첫째는 귀신이 먼저 예수님께 나오게- 27절에 보면 성령의 역사 앞에는 귀신이 힘을 잃게 된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한 영혼의 내면이 어둠에 사로잡혀 있어도 영적인 가족, 예배, 선교에 함께 할 수 있다.

둘째는 수치의 삶을 순결의 옷을 입히게- 무덤 사이에 거하는 삶은 생명 없는 죽은 존재들 속에 머무름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옷을 벗기는 분이 아니라 수치를 가려주는 순결의 옷을 입혀 주시는 분이다. 또한 순결이 회복되면 내면에 사랑 받고 있는 존재라고 믿어진다. 영적인 공동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경외감을 느끼게 하며 교만이나 우월감이 아닌 긍휼과 사랑으로 더러움을 깨끗하게 감싸는 영으로 가득 차게 하신다. 

셋째는 첫 번째 엎드림에서 두 번째 엎드림으로- 28절과 35절을 비교해서 보면 예수님께 엎드렸음에도 예수님과 상관 없다고 한 것과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으면서 그분을 향한 경외심과 순결한 정신을 드리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즉 하나님께 엎드려 예배하는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순결함과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즐거워하며 예배하는가? 아니면 엎드렸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괴로워서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해 달라고 구하는 사람들인가? 당신은 영적 가족의 소중함을 아는가? 사랑하는가?

주님의 소원, 네 번째 밭

누가복음 8:1-18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1. 길가- 믿음과 구원 첫번째 비유는 길가에 떨어진 씨다. 이스라엘의 밭은 경사가 진 계단 언덕처럼 형성된 곳이 많다. 그래서 농부가 위에서 씨를 뿌리면 계단식으로 된 밭의 길가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첫째, 사단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것과 구원받는 것을 싫어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갖게하고 구원을 받게 해주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영혼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는 능력이다. 믿는 사람들이 성령에 인도받아 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둠과 죽음에 묶인 영혼들이 풀어지고 살아나는 일이 일어난다

2. 뿌리- 돌짝밭 두번째 밭은 돌짝밭이다. 두번째 밭의 문제는 뿌리가 없는 것이다. 뿌리란, 첫째 자신을 감추는 삶이다. 겉으로 드러나고 자신을 주목시키는 삶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드러나지 않게 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갖는것이 필요하다. 이런 삶을 훈련하면 내면이 견고해 지는 것을 자신이 가장 먼저 알게된다. 둘째 뿌리는 깊이 있는 삶이다. 1) 깊이는 어려움이 와도 계속 주를 위해 사는 삶이다. 하나님과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쉽게 등을 돌리거나 거절하지 않고 어려울 때 더욱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깊음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깊이는 거절을 당해도 거절감을 갖지 않고 더 큰 신뢰로 반응하는 삶이다. 학생이 공부를 마치고 세상의 일터로 나가면 격려받기 보다는 경쟁 구도 속에서 거절받고 무시받고 자신이 이룬 일도 누군가가 가로채 가는 거친 삶을 경험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뿌리가 있는 사람은 자신은 존귀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3) 깊이는 먼저 하는 사랑이다. 뿌리는 땅속에 저장된 물을 흡수해서 줄기와 가지에 영향을 전달한다. 물이 뿌리 있는데로 오지 않고 뿌리가 물이있는 곳을 향해 뻗어간다. 은혜의 물,성령의 물,말씀의 물을 향해 가는 것은 뿌리,깊이있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먼저 주는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채우고 깊어지게 한다. 4) 깊이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것이다. 한 영혼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며 변화되고 싶어하는 것은 뿌리를 내리는 깊이다. 그러다 보면 삶의 열매들이 드러난다.

3. 재물 -가시덤불 세번째 밭에 대해 예수님은 물질은 좋은것도 나쁜것도 아니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 재물을 인생의 주인인지 주님이 인생의 주인인지 알려면 근심하는지 안하는지를 보면된다. 물론 주님이 주인된 삶도 재물이 없으면 불안해 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이 공급해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는 것을 경험함으로 근심이 아닌 평안으로 산다. 그러나 돈을 의지하는 삶은 많아지면 향락에 빠지기도 하고 잃을까봐 두려워 한다. 따라서 근심과 향락의 삶은 주님이 아닌 돈을 의지하고 있는 증거다. 근심과 향락을 극복하려면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4. 열매- 이땅에 완벽한 땅이 없듯이 완벽한 마음도 없다. 누구나 근심도 있고 유혹도 있다. 앞의 3가지 밭의 특징들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착하고 좋은 마음' 으로 말씀을 듣고 그것을 계속 붙들고 인내 하면 백배의 결실을 맺게된다.

*백배의 결실 (6가지 열매) 

(1) 한 영혼의 인격이 변화되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것이다. 예수님이 언급한 3종류의 밭들, 씨가 길가에 떨어진 밭이 말씀을 빼앗기지 않고 내면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바뀌는 것이다. 재물의 노예가 되어 염려와 향락으로 인해 결실하지 못하던 영혼이 재물을 주를 위해 사용하는 주인이 되고 이런 성령의 성품으로 바뀐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다. (2)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영혼들이다. (3) 헤매이는 목자없는 양들이 선한 목자를 만나 말씀으로 세워져 방황을 중단하고 정한 마음으로 주를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방황하는 영혼을 말씀으로 인도해 주는 사람을 추수꾼으로 그런 영혼을 열매로 보셨다. (4) 삶과 입술의 변화가 열매다. 히브리 기자는 원망과 불평의 입술이 변해 찬양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열매라고 한다. 세상의 쾌락과 정욕을 예배하던 자가 변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입술로 변하는 것은 놀라운 열매다. (5) 삶에서 선을 행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예배라고 하신다. (6) 예수님은 제자와 열매를 동일하게 보셨다. 한명의 제자가 탄생하는 것이 곧 열매다.

*씨뿌리는 비유를 주신 목적 

말씀 사역시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라. 말씀 사역을 하다보면 첫번째 땅 처럼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마귀에게 빼앗겨 구원받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음을 미리 알려주셨다. 두번째 땅 처럼 말씀을 받고 기쁨으로 반응하나 잠시견디다가 시련이 오면 세상으로 쾌락으로 떠나가 버리는 영혼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세번째 땅은 말씀을 듣지만 곧 바로 재물과 염려와 세상 쾌락의 가시 만나 결실하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런 영혼을 보고 만나게 되어도 실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네번째 땅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네번째 땅이 첫번째에서 세번째 땅 같은 사람들도 좋은 땅으로 바꿀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네번째 밭을 바라보며 말씀의 씨를 뿌리는 천국의 농부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소원에 반응하겠는가?

준비된 임재 속으로

누가복음 7:36-50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저녁식사에 초청했다. 그런데 초대받지 못한 그 동네에서 소문난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이 한 집에 초대받으심을 알고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그 집에 들어왔다. 예수님 뒤로 다가가 서서 눈물을 흘리며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초대한 시몬은 이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속으로 여자의 행동을 정죄하였다.

한집에 두 부류의 대조적인 사람들이 만났다. 죄인 여자와 바리새인 시몬이다. 여자는 그 동네의 소문난 죄인이었지만 예수님께 나왔고 그의 뒤로 가서 그 발 곁에 섰다. 마음 깊은 곳에서 눈물이 솟구쳤고 그 눈물은 서서 흘리는데도 예수님의 발등을 적셨다. 눈물은 우리의 의지대로 언제든 흘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향유를 드리러 왔다가 예수님을 두르고 있는 성령의 임재 안으로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주체할수 없는 눈물이 흘러 예수님의 발등에 떨어지자 준비하지 못한 수건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러 수건을 대신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다. 이 행동들은 여인이 미리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으러 왔다가 그 내면의 눈물이 먼저 터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머리가 아닌 발에 사랑의 상징인 입을 맞추게 되었다.그러나 시몬은 대조적으로,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바로 자신의 집에 자신과 마주보고 있는데도 그의 내면은 여전히 황폐했다. 여인은 예수님과 거리가 좁혀 질수록 자신의 내면에 급작스런 반응이 일어났다. 자신도 예측못한 부어지는 은혜였다. 그러나 시몬은 미움과 정죄로 채워졌다.

차이점은 무엇일까? 죄인 여자는 예수님만을 바라 보았고 시몬은 사람만 바라보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어떤 부분이 해결되면 다시 회복 될것인지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깊은 임재속으로 들어갈때 알게 된다. 그분의 임재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시고, 공식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들어갈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말씀은 이 여인을 통해 우리에게 힌트를 준다. 그것은 예수님께 나오는 것의 중요함이다. 여인은 죄인이었고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지 못했다면 예수님이 그녀에게 주셨던 선물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예수님께 나와야 하는가? 첫째. 사람들의 비난과 질시가 난무할때다 여인은 사람들 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을때 예수님께 나갔다. 자신이 드릴수 있는 선물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갔다. 둘째. 아직 해결받지 못한 죄가 있을때 예수님께 나갔다. 그녀가 아직 죄를 청산하지 못한것은 예수님이 그녀를 향해 죄사함 받았다는 말씀을 현재시제로 말씀한 것을 통해 알수있다. 셋째. 예수님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계실때다. 예수님을 초청한 시몬은 평소에 길을 걸어가다가 자신과 마추친 사람일수 있다. 그 눈빛이 혐오와 무시의 눈빛임을 쉽게 알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이 죄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시몬도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의 초청에 응하셨고 그에게 무시 받으시면서도 식사를 하셨다. 사랑은 작은 것으로 인해 미움으로 표출되고 사랑으로 표출 되기도 한다.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점은 공통적인 시각이 아닌 그 시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일수 있다. 시몬에 대한 모든것을 아셨고 보고 계셨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우리와 다르다. 예수님은 부드럽게 일관성을 가지고 시몬의 내면을 스스로 보게 해주셨다. 또한 동시에 여인의 내면에 있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도 동시에 보게 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시몬같을 때도 주님께 나와야 하고 여인같을 때도 주님께 나와야 한다. 당신은 예수님께 나오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께 나와야 하는가? 준비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준비와 기다림을 본다.

당신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눈에 생각에 감정에 유난히도 다른 사람보다 크게 와닿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받고 싶은 선물이다. 예수님을 기다리면 예수님이 더 먼저 나를 기다리고 계신 그 것을 보게 된다. 그 분의 준비된 임재속으로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분의 임재속으로 들어가면 그순간 내안에 사단의 속이며 붙혀논 모든 딱지들이 강풍에 날라가듯 모두 날아가 버린다. 그 임재의 바람은 모래를 날려 그 속에 숨어있는 큰 보석들을 드러나게 하듯 우리 영혼에 주님이 주신 보석들이 빛을뿜으며 드러내게 한다.여인이 받은 또 다른 하늘의 선물은 평온해진 양심이다. 사람은 안정된 삶이 필요하다. 삶이 안정되지 않으면 어떤일에 집중하는 것이 어렵다. 하나님의 일도 안정된 삶에서 집중할수 있다. 그러나 평안없는 편안하고 안정된 삶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그 불안한 마음을 죄를 통해 메꾸어 보려한다. 인간의 평안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이다. 평안은 예수님 안에 있다.

에베소에서 찬송하라

에베소서 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요약>

바울은 고린도, 빌립보 등 당시의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워나갔다. 대도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열방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에베소는 바울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었다. 에베소는 다른 대도시들과 달리 정치, 군사, 무역이 발달한 곳이 아닌 종교의 중심지였다. 종교의 중심지였던 만큼 에베소에는 에베소 주변 황제들의 신전들보다 웅장했던 아르테미스 성전이 있는데 이 성전을 통해서 에베소는 주된 재정적인 공급원으로 삼았다. 신상과 기념품, 여관업, 대금업, 은행업을 했고 주술, 마술하는 무당 그리고 몸을 팔았던 신창들도 가득한 곳이었다.


이런 도시에 바울은 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자신이 다닌 선교지 중 가장 오랜 시간인 3년을 머물렀을까? 에베소야말로 거짓 신과 욕망을 좇는 열방의 영혼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가장 어두운 그곳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빛이 절실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제자들('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전, 그래서 서로 '제자'로 호칭)이 성령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을 알고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기도를 해주었고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 그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 시대의 에베소

에베소에도 장로들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우상과 전혀 상관없는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힘들었을 것이다. 도시 전체가 아데미 신전의 덕으로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있었다.

현대인들과는 달리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을 자아 성취의 기회로 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상숭배와 관련된 자신의 직업으로 인한 내적, 외적 갈등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직업들을 다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상 우상과 관계없는 직업을 찾으려면 그들 모두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를 떠나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보다 그 현실과 그들의 고통을 알았으나 주님의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지 말고 그곳에서 도리어 예배하고 말씀을 흥황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행 20:28)

주변에 사진의 일을 즐거워하고 보람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 것이다. "능동적"이 아닌 "수동적"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직장인은 일생에 평균 60%라는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는데 직장을 싫어한다고 하니 불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도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더 심각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한복음 15:19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였으니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다. 비그리스도인들 처럼 세상에 묻혀서 살지 않고 세상이 나를 미워할 때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환한 빛을 세상에 비출 때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미워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예배받기를 원하신다. 그런 곳에서 예배와 찬송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 세상이 교회를 더욱 미워하는 그런 악한 사회에서 고통 받고 있을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이 편지를 썼고 에베소 같은 곳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주님의 편지이기도 하다.

찬송하는 이유

본문 시작을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한다. 이것은 시편에 "할렐루야"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찬송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셨기 때문이다. (본문 4,5,9,11절)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으로 우리를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고 마음에 두고 계셨다고 그것을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다.(본문 7절) 짧은 한 절이지만 아주 강력한 말씀이다. 구약에서 죄 사함은 언제나 '피 흘림'의 대가로 이루어졌고 그 피 흘릴 제물은 흠이 없고 가장 값진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죄가 없는 사람은 없고 죄를 용서받기에는 이 세상의 제물은 너무나 부족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역사상의 모든 인류의 가치를 다 합쳐도 남고 넘치는 가치를 가지신 분, 동시에 죄 없는 인생을 사신 유일한 분, 그분의 피가 흘려짐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게 된 것이다. (히 10:10)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엡1:9) 때문에 우리는 찬송해야 한다.

'두란노'라는 학교

두란노는 사람 이름인데, 학자들은 대체로 학교의 주인이면서 선생이었을 것으로 본다. 두란노 학교는 당시의 신전이나 극장들처럼, 우상 숭배자들이 자신들의 신들을 위해서 땅을 고르고, 벽돌을 쌓아서 지어진 헬라식 건물이었고, 그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런 세상의 교육과 우상 숭배 만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그런 학교가 두란노라는 라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므로 인해 바울이 에베소에서 2년여 동안 매일 밤낮으로 강론을 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르는 신학교가 됐을 것이다. 강론한다는 공중 설교를 뜻하기도 해서 이 건물은 학교가 뿐 아니라, 예배당이 된 것이다(행 19:10)

전 세계인이 모이고 금융과 문화와 우상숭배가 가득한 세계의 중심지인 뉴욕,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우리와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건물 "학교", 과연 이 학교는 하나님 눈에는 그냥 학교 건물일 수가 있을까? 우리가 이 에베소 같은 뉴욕에 있고 예배드리는 것이 과연 유연의 일치일 수가 있을까? 에베소의 두란노 학교처럼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통해 이 교회를 통해 예배 받기를 원하신다.

공감의 정서

누가복음 7:18-35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설교요약>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메시야 사역을 준비했던 사람이고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드릴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던 분이시다. 하지만 7장 19-20절에 보면 그가 옥에 있을 때 순간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회의를 품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가 맞은 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에 예수님이 23절에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하신다. 그럼 요한의 믿음을 흔들리게 했던 원인은 무엇인가?

주님보다 앞서는 때

누가 복음 3장 16-17절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았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능력 있는 분이시며 또한 심판 때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고 심판하시는 주님이심을 알았다. 또한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어린양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를 흔들리게 했던 것은 시간이다. 그가 원하는 시간에 그가 원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이 움직이길 원했다.  

공감 정서의 부재

성자와 같은 삶을 살던 세례요한이 흔들렸던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 예수님보다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공감정서의 부재이다. 이것은 사랑이 없고 정서가 메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고 있는 일들이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심판에 능력을 보여주지 않은 것에 대한 믿음의 회의였다. 하지만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약함을 체휼하신다고 했다. 함께 고통을 느끼는 정서가 바로 예수님의 성품인 것이다. 하나님의 그의 시간을 쫓고 함께 걸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공감의 정서를 부여 하신다. 그것은 곧 그들을 공감의 사람으로 준비시키자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으로 들어야 할 예수님의 음성

예수님의 눈에 화려한 요한

누가 복음 7장 24-26절에 보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요한은 극빈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외로운 곳에서 희생과 헌신으로 살았던 요한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보는 눈에서는 요한이 왕궁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보다 요한이 더 화려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바로 잡아 주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칭찬을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하신다. 이것은 그 뒤의 세대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함을 말씀해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높음을 위해 낮음을 선택한 삶

500년 전에 구약의 말라기와 이사야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언되었다. 11절에 보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은 큰 사람이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셨다. 세례요한은 구약과 율법과 선지자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옛 언약에 속한 사람이지만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복을 받은 새 언약의 사람들이다. 즉 신약의 사람들은 오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낮추심으로 예수님의 크심을 들어내셨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예수께 주목 시켰고 사람들로 예수님을 주목하고 예배하고 사랑하게 했다. 우리의 삶에 주님이 보이지 않을 때 깊은 터널을 통과할 때 우리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는 분의 음성과 주님을 향한 헌신과 사역을 사랑하시는 분의 음성을 들으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