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에베소서 4: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설교요약>
교회가 하나였던 시대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는 교회가 하나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중세시대에는 가톨릭 교회가 유럽국가들을 다스렸던 시기였지만 연옥을 면하고 천국에 갈수 있다는 면죄부를 돈으로 팔면서 사이비로 타락했던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 무명의 사제였던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말씀에 의지해서 종교개혁이 시작된다.

 유아세례 문제
종교와 정치가 하나였던 시대에 쯔윙글리의 학생이었던 콘라드 그레벨이 유아세례의 문제를 제기한다. 초기 종교개혁자들도 인정하지 않은 재침례파가 나오게 된다. 그들은 유아세례의 문제만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며 교인들의 실질적인 경건한 삶을 강조하다. 하지만 그 당시 사회의 시스템의 시작이었던 유아세례를 부인함으로 가톨릭과 종교개혁파에게 동시에 학살을 당한다. 바울이 말하는 “세례가 하나”라는 말은 동일한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세례가 무엇인가?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행위로서 자기 스스로와 교회 앞에서 확인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그래서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에는 주님의 명령이기에 세례는 꼭 받아야 한다.

 세례를 주는 이름
마태복음 28:19절에 보면 이름이 단수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름은 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대한 것이다.

 삼위일체 문제
성경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다 와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 성령님을 모두 하나님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로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위일체 이해하기
하나님이 세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세 개의 위격이 있으시다. 구원의 역사에서는 아버지는 보내시는 분, 아들은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고 말씀을 가르치신 분, 성령은 그 힘을 주시며 함께 하신 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한 분에게 기도하고 한 분에게 찬양하고 한 분에게 예배한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면 누구를 만나는가?
성경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분명히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한다. 마태복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의 그 이름은 단수이며 하나의 이름이라고 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다 계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부피를 깨달아

에베소서 3:14-21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죄악의 역사
창조된 아담과 하와 후로 그 부모로부터 태어난 첫 사람이었던 가인이 동생을 돌로 쳐 죽였다. 그리고 10세대도 되지 않아서, 노아 때에 이르러서 인류는 마지막 선을 넘겨버린다. 더이상 인류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완전한 자멸로 갈 것이 분명한 상황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인류를 보전하기 위해서” 전지구적인 홍수를 통해서 노아와 가족만을 방주를 통해 구원하시고 나머지 모두를 멸망시키셨다.

사랑의 역사와 십계명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심판과 구원을 반복하셨다. 이스라엘에 주신 십계명의 목적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보호하기 위해 주신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힘을 다해서 하나님 사랑하고 모든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 그런데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그냥 문자 그대로만 지켜왔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그 율법 자체인 것처럼 대하면서 전혀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스라엘백성은 안신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가장 철저하게 지킨다. 하하님은 안실일을 안지키는것을 무엇보다 심각하게 생각하셨다. 그의 마음의 태도가 드러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은 하나님은 안식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셨고,그의 백성들도 그렇게 여기길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왜 안식일이 그렇게 중요한가?

안식일이 중요한 이유
안식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동시에 실천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
하나님은 매일주신 만나를 여섯쨰 날은 이틀치를 거두게 하셨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신 이유는 바로 우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십계명을 주신 이유도 결국 우리를 위해서 라는 말이다.

변함이 없는 사랑
하나님이 인류를 다루시는 방식이나 느낌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달라져 왔지만 그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죄의 열매 : 실증하나님은 어떤 것에 ‘질리는’ 분이 아니다.‘질리는 것’ 이 바로 죄로 인해서 인간에게 생긴 특징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식어지거나, 질리지 않으시고, 항상 한결같다.

신실하신 하나님
노아의 시대에 더이상 두고보지 못하게 만든 타락의 정도를 드러낸 시대에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으심으로 오래참으시고, 또 만나를 40년간 똑같이 내려주신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변치않는 그분의 신실함을 보게된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계속 약속들을 계속 깨트리고 실망스러운 이런 아들, 딸들을 보시면서도..맨 처음 우리를 바라 본 그 눈으로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바라보신다. 처음 우리를 보시고 감격 하셨던, 그 마음 그대로 우리를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랑을 우리가 온전히 ‘경험적으로’ 알 때 우리도 그 신실한 사랑 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바울은 그냥 간단 명료하게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우리가 알길 원한다. 월요일 화요일..그리고 주일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찾아오는 것처럼그분의 사랑도 신실하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신실한 사랑 할 수 있다. 지금 이곳에 흐르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그분처럼 신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우리가 더 견고하게 하나되는 교회가 되고, 성전이 되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그 신실하신 주님의 실제적인 임재 앞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더 채워지면 채워질 수록우리도 조금씩 더 신실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그토록 강조하셨다. 안식일이 매주 변함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모인 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하루를 천년처럼 쓰실 수 있기에오늘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면 할 수록 우리는 서로를 더 신실하게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예배하는 분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영원히 영광스럽게

에베소서 3:8-13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 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 이니라

<설교요약>
교회로 통일되는 하늘과 땅
영원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그 비밀의 경륜은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즉, 교회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이제 놀랍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만 천사들에게는 놀라워할 일이다. 그 이유는 ,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들 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 되어서 하늘의 천사들과 또 하나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엡1:10)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는 것만으로도 충격방을 일인데, 천사들도 우리와 연합하게 되는 일이 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 10절에 각종 지혜란, 그런 일이 어떻게, 언제 일어나는지에 관해서는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기 때문에 교회가 그 비밀을 밝히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이런 역할들을 담당하는 것들은 ‘영우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분명한 영원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사람과 하나님이 화목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통해서 모든 인류가 인종, 문화, 언어를 넘어서서 하나되고, 천상의 존재들과도 하나 되는 것이 바로 영우너 전부터 예정되어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늘의 권능들, 천사들도 교회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자신이 받은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환난을 받는 것이 ‘너희의 영광’이다ㅣㅣ 라고 말하고 있있다(13절). 바울은 왜 자신이 받은 환란을 ‘나의 십자가’, ‘나의 면류관’ 혹은 ‘나의 영광’이니 낙힘말라라고 하지 않고 ‘너희’ 즉, 에베소 성도들의 영광이라고 했을까?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에 유력한 가문의 출신, 마음만 먹으면 편한한 삶을 살 수도 있는 조건이었다. 예수를 믿게된 후에도 학벌, 집안, 신분등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면서 편안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베소 교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그렇게 생업까지 포기하며 회심했는데 정작 바울이 적당히 터협하는 삶을 살아 갔다면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은 그의 삶은 결코 그들에게 영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삶이 영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에베소에서 전했던 복음이 공허한 말 분이 아니라 그가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아내고 있었었기 때문이었었다. 그것이 결국 여러 환난과 감옥에 갖히는 것까지 의미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걸 만한 가치있는 것임을 바울은 그의 삶으로 증명한 것이다.

진실된 겸손
인간은 영원우러러 향한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겸손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면 갈 수록 부끄러운 나의 죄가 더 헌명하게 드라나고 더욱 극심한 거북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 중에 있는 이 성자와 같은 바울은 자신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이라는 낮출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있다. 빛으로 나아가면 갈 수록 죄와 악은 더욱 분명하게 드라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빛은 정죄의 빛이 아니다. 그 빛은 따스하고 상처주지 않고, 수치심과 아픔들을 치유하는 빛이다. 그래서 12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담대함과 확신을 주는 그 빛으로 더욱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겸손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거북함과 혐오감으로, 새롭게 되기 위한 내적 갈등을 겪지만,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점점 더용납하고 용서하는 넓은은 가가슴의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게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험악한 상화황 소속에서도 찬송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영원의 소망을 나타낼 수 있있다는 것이 영광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모든 고난은 겪는 사람에겐 비할 수 없이 힘든 일이다. 그러나 생명을 건 고난의 끝에 숨을 거둔 바울이나 예수님의 생애와 비교하면 우리가 겪는 고난은 대부분 ‘불편함을 감수’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위해 작은 불편들을 감수할 수 있다면 우리도 교회를 위해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영원한 주님의 교회에 영광이 된다면 우리는 자연히 내 가족들에게도 역사속에서 영원까지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빛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나는 교회의 작은 영광이 되었는가?

선물 중의 선물

에베소서 3:1-7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설교요약>
아름다운 지위 : 집사 
집사에 대해서 이렇게 상세하게 적고 있다면, 그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로나 감독, 사도 등에 대해서도 적어야 할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집사라는 것은 사실상 교회를 섬기는 모든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다. 지위 : 원어로 보면 직분을 잘 한자 라는 의미가 사실은 '섬기기를 잘 한 자' 들은.. 이라고 되어있다. 그들에게 주어 지는 것은 아름다운 지위!인데 아름답다는 말은 그냥 좋은 것을 넘어선 ‘뛰어난', '빼어난' 이라는 의미를 가 지고 있다. 'Better' 처럼 비교하면서 '더 아름다운' 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겸손히 종처럼 서빙을 했는데 영광스러운, 빼어난 지위를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런 사람들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마태복음 20:27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면, 모두들 깜짝 놀랄만한 반전들을 아주 많이 목격하게 될 것이다. 으뜸인 줄 알았던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그곳에서는 작은 자들이며 정말로 이름도 없이 묵묵히 낮은 자리에서 섬긴 분들이 가장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있는 것을.. 교회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닮아갈수록, 이곳에서 만큼은 똑같은 가치가 적용될 것이다. 


선물 중의 선물
에베소서 3:7을 보면 '은혜의 선물'을 이라고 했는데 은혜라는 단어, 선물이라는 단어 둘다 '선물'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동의어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이렇게만 말해도 이미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는데 그는 그것을 두번이나 사용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물 중에 선물이다! 라고 강조한 것이다. 은혜로 주신 것이 많지만 그중에 최 고의 선물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이의 '집사','종' 디아코노스가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년의 바울은 현재 감옥에 사슬에 묶인 상태이며, 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환난을 당해왔다. 그리고 그런 인생이 된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다. 그가 그냥 정통 유대인으로 살았다면 겪지 않았어야 할 이 모든 고난이 시작된 계기가 뭐였나? 바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 중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은 정말 모든 조건이 뛰어난 촉망받는 청년이었다. 아쉬울 것이 없고, 부족함이 없이 장래가 촉망되는 사울이 또하나의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향해 다매섹으로 향해가던 길에 주님께서 사울을 부르셨고 그분의 계획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이 사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9:15 그리고 그 부르심에 순종한 사울은 위에 나열했던 모든 특권들..지위들을 순식간에 모두 잃게 된다. 과연 그것을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종이 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현상 수배자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어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며 주님을 위해 살았던 바울의 말년은 편안했을까? 그가 예수를 30대 때에 따르기 시작했고 60여세에 순교하게 되었는데 그의 마지막 10년은 거의 감옥에서 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이 이 에베소서를 작성한 시점도 그가 순교하기 얼마 전 그러니까 노년에 감옥에서 쓴 편지인데.. 여기에서 그는 예수와 함께한 자신의 인생의 시간들이 선물이었다고 고백한다! 여러분이라면 그것을 주님의 선물이라며 감사하겠는가? 


선물의 가치
지난 주에 우리 아이들에게 생일 카드를 받았다. 이게 뭐라고 쓴 거 같은가? 아직 글을 쓸 줄 모르니까 이렇게 그림으로만 표현을 했고 추상화에 소질이 있어서 해석이 좀 난해하다. 그러다 이 아이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마음을 보려고 했더니 금새 알 수 있었다. 'Daddy I love you' 나 그 비슷한 뜻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어떤 대단한 명화나 명필이 이보다 더 내 가슴을 춤추게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내 사랑하는 아이의 소박하지만 마음이 담긴 선물이기 때문에 어떤 것 보다도 아름답고 값진 것이다. 이처럼 선물의 진정한 가치는 그 선물의 가격이 아니라 누가 어떤 마음으로 그 선물을 내게 주었는가? 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을 때
바울은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그 부르심, 일꾼으로 부르신 그것을 선물 중의 선물이라며 가슴이 춤을 추는 감격을 누리게 된 것이다.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평생 엄하고 딱딱하고 두렵기만한 하나님을 상상하며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사형을 집행하는 일에도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다. 그런데 자신과 비해도 보잘 것이 하나 없는 나사렛이라는 소박한 동네에 미천한 노동자. 목수로 오신 하나님 예수, 세리나 창기와 같이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주셨고 모두가 더럽게 여기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이나, 이방인 나병환자에게까지 손을 내밀어 주 었던 예수,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더욱이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잡아 들이고 해치고 다녔던 바울 자신과 같은 사람을 위해서 그 잔인하고 비참한 십자가 지셨던 분, 하나님이시기에 쉽게 물리쳐 버릴 수 있었던 그 십자가에 벌거벗긴 채 달리셔서 초라하게 죽어갔던 그 예수가 만유의 왕 하나님, 엄격한 율법주의자로 살았던 바울이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이 사실은 마치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미소 띈 아빠와 같은 '사랑의 하나님'임을 눈 앞에 거울을 보듯 선명하게 알게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심장이 그 안에서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바울에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했던 말씀을 그대로 다시 하셨다. 사도행전 13:47 그것은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에게 지상의 마지막 명령으로 하신 말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그 말씀과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함께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신 아들에게 맡겼던 일, 아들이 하나님의 종들, 집사들에게 우리에게 맡아달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부르심이다! 그것을 위해서 바울과 제자들은 때로는 선교를 떠났고, 옥에 갖혔으며, 마을마다 전도를 다니기도 했다. 또 때로는 텐트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교회의 재정을 도왔다. 임금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 하기도 했고, 세상의 철학자들과 더불어 논리적으로 변증하기도 했다. 그 모든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그와 함께 했던 교회에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일꾼으로 함께 섬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유한한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그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리기 위해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다는 사실, 그것보다 영광스러운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이 선물 중의 선물이다! 라고 감격한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선물들을 받았는가? 하나님께 선물을 받은 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디아코노스,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앞에 드러 나는 일이든, 이름없이 하는 일이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선물 중의 선물이다! 여러분은 그 아름다운 지위를 기쁨으로 받을 것인가? 여러분은 이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그분의 종, 디아코노스가 되시겠습니까?

성전이 되어 가고

에베소서 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설교요약>
교회와 건물
오늘 본문은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고 있다. 건물은 작은 방, 큰 방, 또 기둥과 벽, 창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와 같이 건물을 빌려서 쓰는 교회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건물이 교회였던 적은 없었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식화 하기 전까지 교회는 대부분 가정 집에서 만났고, 우리가 보고 있는 에베소의 교인들은 우리처럼 두란노라고 하는 학교건물에서 모였다. 그런데 교회가 건물들을 짓고 소유하게 되면서 발생되는 가장 큰 문제는 그 건물에 가 서 앉아 있다가 오면 예배를 드렸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건물이 아무리 천국의 성전을 닮았고 커다랗고 아름다운 십자가가 걸려 있어도 서로 이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가 그곳에 없다면, 그곳은 세상 어느 곳보다 공허한 곳이 될 뿐이며 서로 사랑하기는 커녕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옆에 앉아 있는 사람도, 얼굴이나 이름 정도 밖에 모 른다면 그 곳은 결코 교회 일 수 없고, 온전한 예배일 수도 없는 것이다.

개인의 구원
1950년대는 미국 근대의 기독교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대였다. 놀라운 것은 왕성하게 집회와 캠퍼스 전도를 하던 그 50년대는 미국인의 95%가 기독교인 이었고, 대부분 교회에 멤버쉽을 가지고 있었던 때였다는 것이다. 도대체 집회를 할 때마다 나타나는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들이 다니던 교회가 단지 십자가가 매달린 건물로 전락해 버렸을 때에 마치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의무감에 일주일에 한차례 회당에 출석하는 것과 같이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주일의 일상이 되어버렸을 때에 그 종교적 건물은 더이상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연히 생명이 없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구원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 그러한 파라처치들을 통해서 교회를 새롭게 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런 무브먼트의 가장 큰 수혜자 중의 하나가 한국 기독교였다.

개인 구원의 함정
그러나 그 엄청난 전도와 구원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도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급속도로 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면죄부를 쥔 사람처럼 더 자유롭게 교회를 떠나고도 떳떳해지게 해준 것이다. 사영리에도 영접 후에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거짓의 아비는 사람들의 눈의 가리워 교회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에는 단지 교회의 건물을 습관처럼 드나드는, 종교인들 nominal 크리스쳔들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교회 자체를 거부하면서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또 다른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

싹트지 못하게 된 씨앗 & 진정한 교회의 진정한 제사
최근 한국의 ‘기독교 신문’(교회와 신앙)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에는 전혀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가 전체 기독교인의 23%로 최근 5년간 두배로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여전히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75%에 이르는 미국은 더 심각하다. 다른 조사에서 최 소한 적을 두고 교회에 출석하는 인구가 40% 조금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에 그 두가지 결과를 종 합해 보면, 결국 미국 크리스쳔의 절반 가까이가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사결과 대다수의 교회를 나가지 않는 교인들은 인터넷 등으로 예배를 본다고 대답했다.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유튜브로 다른 것들 보는 것 보다는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로 설교를 듣는 사람이 거기에서 울려퍼지는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다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나타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일주일에 몇개의 설교를 독파한다고 해도 그것은 공부는 좀 될지 몰라도, 결코 예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를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를 만난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해야 한다. 성전은 한사람 한사람을 뜻하는 것도 어느정도 상징적인 역할이 되지만 바울이 그 말을 할 때는 분명히 너희 - 교회를 뜻했다. 우리가 서로 이어져서 성전이 되어가고, 주님의 처소가 되어간다고 말한다. 교회가 성전이 되어진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다! 성전은 항상 성령이 충만하고,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가득한 곳이었다. 죄가 있는 자들은 찔림과 고민으로 회개하게 되며, 고난 가운에 있는 자들은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는 능력이 온전히 거하는 곳이 성전이다. 평가와 정죄는 사라지고 용납과 용서.. 그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 된다.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언제나 성령으로 주님의 임재로 충만하다. 그것이 교회의 영광이며, 교회의 능력이다.

무리의 경건이 개인의 경건으로
개인들이 경건할 때 무리가 경건해진다라는 것이 세상의 생각이지만 성경적으로는 오히려 반대로 무리가 견고하게 연결되어질 때, 성전이 되어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에 충만할 때, 거기에 속한 개인들이 충만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서 모일 때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성전을 누려야 한다. 그때 우리의 일상에서도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여러분은 우리와 함께 성전을 지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이 건물의 한쪽에 앉아는 있지만 교회에 속하지는 못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