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부대

누가복음 5:35-39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예수님처럼

누가복음 5:27-35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설교요약>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심을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위대한 성자 정도로 본다면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갈등이 생기면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까지 정죄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면 변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세리 레위를 통해서 예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예수님의 관심
첫째는 죄인의 회심- 가버나움에 살던 레위는 이미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알고 있었지만 삭개오처럼 예수님께로 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세금을 부당하게 거두는 세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 27-28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를 부를 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말씀을 보면 베드로, 나병환자. 중풍병자 그리고 레위도 예수님을 만나 모두 죄 사함을 경험했던 죄인들이었다. 또한 교회는 죄인들이 오는 곳이며 자신들이 죄인 됨을 보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경험하고 거듭나는 곳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한 영혼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는가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심이다.

둘째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것- 29절에 보면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연다. 즉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영혼이 기뻐하게 된다. 누가 복음 15장에 양 백 마리가 있는 목자가 한 마리를 잃고 찾았을 때와 열드라크마 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여인 그리고 목자는 가장 먼저 잔치를 벌였다. 이것이 하늘의 천사들의 기쁨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며 예수님의 기쁨인 것이다. 레위의 기쁨과 잔치는 그가 만든 기쁨이 아니고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음 맛보는 기쁨인 것이다.

셋째는 죄인의 회심이 죄인들의 나아옴으로 이어지는 것- 29절에 보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죄인을 부르시고 사랑을 주셨는데 그 한 사람 레위를 통해서 수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회심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예수님의 관심이다. 그러나 이런 기쁨과 영혼이 성령충만할때 그것을 방해하는 세상의 소리가 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언인지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통해서 보자.

내면에서 비방의 소리가 들릴 때
첫째는 죄인들을 병자로 보라- 30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한다. 이 비방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소리지만 우리의 내면에도 이런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죄인들끼리 서로 이해할 것 같지만 그들 사이에도 죄의 등급을 정하고 서로를 무시한다. 이럴 때 우리의 내면에는 네가 뭐가 부족해서 이런 죄인들과 상대하니 라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같은 병자들을 고치시기 원하셨다. 즉 죄인들을 병자로 보고 그들에게 의사가 필요함을 인정하셨다. 그럼 우리들 마음에 불쌍한 마음, 즉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둘째는 혼인 집 손님으로 보라- 33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금식하지 않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식탁에 몰려온 죄인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보았다. 당시에 혼인잔치는 우울과 슬픔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서 어떤 임금의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종들이 길가로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는데 잔치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어두운 곳으로 쫓아내는 기준이 선한 자나 악한 자가 아닌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인 것이다. 바로 이 예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과 은혜의 옷인 것이다. 나는 택함을 받았는가의 기준은 단순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의복을 입는 것이다. 이 의복의 의미는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음을 의미한다. 즉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선인과 악인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는 삶이다.

주께 나올 수 없을 때 나오라

누가복음 5:12-26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설교요약>

예수님이 한 동네에 계실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와 엎드렸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나병환자는 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 나타날수 없게 되어있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올수 없는 2가지 불가능한 장벽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나병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병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수 있는 위험한 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께 나올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꾸짖지도 않으셨다. 많은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13절에 보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라고 기록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손을 쉽게 대실수 있는 가까운 거리까지 나병환자가 온것을 알수있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삶의 문제가 너무 크고 힘들다 보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올 힘조차 상실하게 될때가 있다. 주님께 가기도 전에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거나 영구적인 해결이 안될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나병환자의 풀수없는 불치병 문제를 풀어주신것을 주목해야 한다. 24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 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예수님께 나가도 이 문제는 절대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거야 라는 산같은 문제는 무엇인가? 그러함에도 주님께 나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말을 한마디 사용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보신다. 이제 당신은 예수님께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수 있다. 그럼 어떻게 나가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될것이다. 

첫째. 솔직하게  나가라 

나병환자도 중풍병자도 또 다른 공통점은 자신들을 감추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간것이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 그럴듯한 옷이나 장식품을 구해 가릴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운 나라기에 태양을 가리기 위해 긴 세마포 치마 같은 것을 입는 나라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사람처럼 어느 정도는 위장할수 있었다. 중풍병자는 늘 자신이 드러누어 있던 그 침상에 누운채 예수님께 나왔다. 따라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는 보기 힘들고 악취나는 모습 그대로 나왔다.이 사람들 자신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었을 것이다. 예수님께 나올때 침상도 흉칙한 자신의 모습도 감추지 말아야 한다. 나병에서 정결케 된 사람은 몸의 털을 모두 밀고 물로 몸을 씻고 처음으로 이스라엘 진영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자신의 텐트(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7일 동안 야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진영안에 즉 교회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7일 야영은 그의 삶을 성결케 하는 시간들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집을 떠나 마음껏 집없이 떠도는것을 자유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반대다. 진정한 자유는 집안에 있다. 가장 자유로울 때는 집안에 있을때다. 우리의 영혼의 집은 교회다. 천국이다. 이때 우리의 영혼은 가장 자유하다. 이 집 안에서 우리는 반복해서 몸을 씻고 잘라낼것을 잘라낸다. 7일째 다시 몸을 씻고 옷을 빨고 머리카락, 수염, 눈썹까지 모두 깍아내게 한다. 두번째 씻음과 잘라냄이다. 계속적인 성화를 의미한다. 특히 골방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서로의 나눔을 누설하지 않는 소그룹이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도 솔직한 나감이다. 혹은 자신의 상황을 진실하게 나누며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하늘의 문을 여는 솔직한 태도다. 병이 낫기를 위해서는 첫째,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고 둘째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둘째.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선함을 바라보며 나가라 

사람들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을 금기시 했고 그런 생각조차 부정하게 여겼다.나병환자가 가까이 오면 돌을 던지며 증오하고 조롱했다. 그런데 오랜세월 나병을 앓으면서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산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이 사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절망' 이라는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예수님께 원망과 증오의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수 있나이다 하니'(12절) 라고 고백했다. 이 말속에는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이라는 뜻도 들어있다. 이것은 자신이 앓고 있는 이 병도 주님의 지배아래 있고 섭리아래 있음에 대한 고백이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마음도 예수님에 대해 그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긍정적이고 선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할수 없는 반응이었다. 나병환자도 중풍병자를 데리고 사람들도 공통점은 그 생각이 소망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꼭 고쳐주실것이라는 선한 이미지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 줄것이라는 선한 이미지가 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기뻐하신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부정적이고 쓴뿌리로 가득한 사람들의 내면을 먼저 바꾸신다.예수님은 나병환자가 오기전에 생각한 대로 아무도 손대기 싫어하는 나병환자를 거침없이 즉시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그리고 '내가 원하니 깨끗함을 받으라'(눅:5:13)  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가 생각한 대로 깨끗함을 받았다. 중풍병자는 그의 친구들의 생각대로 죄사함을 받았다. 그리고 침상에 의해 지배받던 그가 자신의 침상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도 그것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 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5:26) 한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주께 나가면 그 영광은 더 멀리 더 높게 더 오래 확장된다.  친구들이 예수님을 생각한 대로 되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병든 친구를 메고온 그 선함을 볼때 그들은 아마도 뜯은 지붕을 다시 더 튼튼히 고쳐주고 갔을 것이다. 

주께 나병환자 처럼 중풍병자 친구처럼 주께 나올때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볼것이다.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것이다. 누군가 당신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것이다.

벽을 허문 삶

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설교요약>

삶의 벽을 쌓는 사람들의 4 가지 특징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지만 주님을 사랑하거나내면에 그 은혜가 스며들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증상들이 나타난다. 첫째. 자신의 일용할 양식과 예수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베드로와요한의 무리처럼 수입과 생존에 필요한 공급에대해서는 예수님은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 분이라고 단정짓고 바라보지 않는다.  둘째.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보다 자신들의 수익이 더 관심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며칠전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바다에서 고기잡고 그물을깁고 있을때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람을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바로 옆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셋째. 주님을 한결같이 따르지 않는다. 네째. 아무리 수고해도고기가 없다. 그물은 천국과 같다고 했다. '(마:13:47) 그물에 고기가 채워지듯 마음에 천국이 채워진다. 그런데 아무리 이땅에서 성실하게 수고하며 살아도 주님이 없으면 그물에채워짐이 없다. 

3년 후의 삶의 3가지 특징 
3년 후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첫째. 배에 7명의 제자들이 타고 있었다.  예수님을 판 가롯유다를 제외하고 11명 중에 7명이 한 배에 타고 있었다.  3년 전 에는  배가 두대였고  각각의 배에
베드로-안드레 요한-야고보가  타고 있었다. 그 당시 어선의 장비가  비쌌기 떄문에 어부들은 보통 협동조합에서 동업자들과 함께  일했거나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가족들이 함께 일했다고 한다. 고기를 잡았을때 그것의 수입을 나눌 사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제자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도우며 가족보다도 더 진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베드로는 배와 고기를뒤로하고 새벽 바다에 뛰어들었다. 3년전 베드로는 예수님이 옆에서 말씀을 전하는데도 바라보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자신이 원했던 고기를 많이 잡았음에도 그것보다 예수님이 보고싶어 차가운 새벽 바다로뛰어 들었다. 
셋째. 영혼을 낚는 어부의 마음이 있다. 3년전베드로는 사람보다 고기에 관심이 더 많았다.그런데 뭍에 올라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사랑하느냐' 라고 하실때 '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했다. 그때 주님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3번에 걸쳐 말씀 하셨다. 이것은 문자적인 동물 양이 아니라 한 영혼을 양으로 비유한 것이었다. 

3년전과 삶이  달라진 이유 
채워짐 
베드로는 채워짐을 경험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예수님과 잃어버린 영혼들에 관심없이 영혼없는 얼굴로 그물을 씻고 있을때 그에게 먼저 다가 가셨다. 그리고 그의 배를 바다에 띄우라고하셨다. 그리고 그 배에 올라타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내면의 그물이 채워지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육신적인 필요도 채우셨다. 3년후에는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던지라고 하는 곳에 던지면 사방의 물고기들이 그 그물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잡혀진다. 고기는 잡는것이 아니라 잡혀지는 것을 베드로는 그날 이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다.
찢어짐 
베드로는 찢어짐을 경험했다. 베드로가 3년 후에 바뀐 또다른 이유는 채워짐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베드로는 이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순종했을때 그물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그물이 찢어지는 것도 같이 경험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때로 모두 빠져나가버리는 경험을 할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다시 우리 삶에 채워지고 얻어진것이 나의 능력이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배우게된다. 우리는 주님 주신 것이 다시 찢어지는 경험을 할때 이 찢어짐을 통해 두가지 반응을 주께 드려야 한다. 


주께 드릴 두가지 반응 

첫째.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것 
히브리서 5장8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겸손의삶을 사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원하신다. 순종은 내가 원한 정반대의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라도 거룩한 삶으로 간구했다 
히브리서 5장7절을보면  예수님은 거룩 그 본체셨다. 그럼에도 인간의 몸을 입고 어떻게 살고 기도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주셨다. 심한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기도했다. 특히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거룩한 삶, 경건한 삶, 신실한 삶을 추구하셨다. 

다른 삶

누가복음 4:38-44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40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히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설교요약>
베드로의 변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가정에 풀리지 않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셨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물과 배와 고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른 사실에 주목하지만,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어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회당에 들어간 일이다. 베드로가 아무리 예수님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하고 따랐다 하더라도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 예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계속적인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희생은 베드로의 또 다른 자기 자랑과 자기 의가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변화는 그가 주를 위해 무엇을 포기했나에 있지 않고 예수님이 어떻게 그의 내면을 진리의 말씀으로 채우고 영혼을 회복시켰나에 기초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면 삶은 점점 걱정과 근심과 고통의 올무에 얽매이게 되어 불행해 진다. 반복해서 주님의 말씀과 은혜를 받는 것에 집중하라. 그러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보일것이다. 우리의 삶의 키를 내려놓지 않으면 하늘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닌, 땅에서 오는 것으로 채워진다. 주님은 우리 직장, 가정, 인간관계, 애매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짊어 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계속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내어 드리기 위한 예수님의 삶의  원리
첫째. 모든 사람들을 사역의 대상으로 보라.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나와 왜 갑자기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께 시몬의 장모의 병을 고쳐달라고 아주 절박하게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님을 위해 애걸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해가 지고 있는 시각에도 마을로 들어가서 자신의 일처럼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다. 평생 고통받는 사람들이 치유되어 천국을 누리기 원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때 우리의 것을 희생하고 넓은 가슴으로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며 산다. 그러나 어떤 때는 반대로 누군가에게 유치해 지고 이기적이고 나의 권리를 요구하며 불평하고 미움을 갖으며 다시 나의 자아가 살아난다. 중요한  이유  한가지는 누군가에게는 주는 것 보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역의 대상으로 대하셨다. 그들로 부터 무엇을 받으려고 하거나 기대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냥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사람을 우월감 없이 사역하는 마음, 일일이 예수님 처럼 나의 손을 얹어 주어야 할 존재로 생각하고 대하면 우리의 내면이 채워짐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 거룩한 일의 중심에서 어둠의  존재들에게 높임 받고 인정받는 것을 거부하라.
계속해서 하늘의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둠에 의해 인정받고 높임받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단수)의 졸개들(귀신들-복수)이 자신을 알아보고 소리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때 그것을 꾸짖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높이는 것으로 혼동할수 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던 마귀는 예수님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동안 떠났다고 했다. 사람들의 높임 받고 싶어하는 죄악 된 본성은 때로 그것이 어둠이고 악한것을 안다해도 그런 것과 결탁하고 자신의 삶의 일부를 내어준다. 사람들은 지극히 거룩한 영적인 일을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죄악된 본성이 끓어 오를수 있다. 거룩한 사역의 한 중심부에도 사단은 자신을 드러내고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자극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세상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많은 어둠의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한다.

셋째, 사람들이 원하는 때를 쫓지 않으시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때를 따라 사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전날 저녁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와서 축복을 받게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마음속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조종하려는 미성숙이 함께 존재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만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수많은 군중을 뒤로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복음으로 풀어주고 축복하기 위해  새로운 장소를 향해 떠나셨다.예수님의 결정의 기준은 자신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셨다. 세상의 대다수는 자신의 유익을 따라 얼마든지 모든것을 결정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 마져도 기회주의적인 삶을 쫓아가곤 한다. 언제든 사랑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때를 묻지 않고 버리고 자신의 명성과 삶에 물리적인 유익을 주는것은 주저하지 않고 덥석 문다. 그러나 이런 삶의 마지막은 큰 고통으로 자신을 스스로 찌르는 결과를 낳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3가지 점검
1) 좋은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기다린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 오지 않는것을 경험하고 크게 실망하고 낙심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따라사는 사람은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것을 기대한다. 당신이 그토록 원했는데 분명하게 눈에 볼수있도록 주지 않는것이 있을것이다. 그때 다시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것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살고 있는 것이고 당신 믿음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 때에 맞는 것을 주실것을 믿는다.
때에 맞는 것은 주변 것들과 조화를 이룬다. 주변 사람들과 여건에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인위적인 창조는 주변 것들과 계속 마찰과 분리와 상처와 불쾌함을 남기게 된다. 따라서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주변의 정황과 사람들을 계속 무시하지 않고 살피는 삶을 산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때를 구하며 사는 사람이다.

 3) 추수할 열매가 있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때에 맞게 어떤 것을 주실 때에는 어떤 열매가 드러난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연결되고 그분으로 부터 축복을 받는 열매들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더 큰 열매들을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거절과 사모함

누가복음 4:14-37
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설교요약>
그리스도인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는 첫째, 승리 후에 더 깊은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사적인 영광”을 모르기 때문이고 둘째, 승리한 자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공적인 영광”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적인 영광
저자 요한의 청년 때의 믿음을 가장 성숙한 위치에 두고있다. 청년 믿음은 먼저 싸워서 강해진 믿음이다. 전쟁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실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 보다 더 강하고 담대하다. 청년 믿음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내면에 거하고 있다. 늘 죄사함 받는 것에 머물러 있는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아비의 믿음으로 나가야 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는데 정작 영적인 공격이나 분별력은 점점 떨어져 어둠과 유혹에 잘 속는 노쇠해 지는 아비의 믿음에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흉악한 사단을 분별하고 파괴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이 어둠의 영혼과 세상 가운데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되는 청년의 영성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아이의 믿음에서 아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에서 청년의 믿음으로 계속 성숙해 가면 더 큰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청년의 믿음을 가지고 사단의 유혹과 공격을 향해 싸워가다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내면 안에서 온전해 진다. 온전 하다는 것은 그 사랑이 더 깊어지고 더 예수님 같은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우리 안에서 사단의 유혹을 대적하고 죄와 싸워 이기면 이길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우리 안에서 더욱 커지고 그 사랑은 두려움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모든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영적 싸움을 그치거나 포기하지 청년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다. 

공적인 영광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셨고 가장 먼저 회당에 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회당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시기에 짐승으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없어 성경 봉독과 강해 및 기도, 그리고 축도로 예배를 드리는 데에서 유래했다. 저자 누가는 예수님이 들어간 회당을 두 지역, 나사렛  회당 사람들과 가버나움의 회당 사람들을 비교하며 소개한다. 나사렛 회당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강퍅한 마음을 가졌고,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으나, 그분의 외적인 출신성분 때문에 거절했다. 그리고 심지어 화가 나서 그 동네 산 낭떠러지로 끌고가 밀쳐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갇히고, 눌리고, 보지 못하고 가난한  영혼들을 살려 주시려고 그곳에 가셨는데 단 한사람도 그런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했다. 반면, 가버나움 회당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모했고,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골방의 불은 사방으로 퍼진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혼자였지만 그 광야의 불이 가버나움으로 흘러왔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화려하지 않고 소수만이 모일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모임이 성령에 붙들렸다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런 모임들은 또 다른 영혼들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일으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 되리라'(눅10:3) 광야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광야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면 외로운 모임, 작은 모임이라 할지라도 그 불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곳으로 퍼져 나간다. 하나님은 오늘도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들을 부어 주시고 또 부어 주신다. 그 불은 또 다른 곳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당신은 거절 하는가? 사모하는가?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1부> | 은혜 받는 감람나무<2부>

<1부 - 배현석 전도사님>
마가복음 5:1-20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2부- 양정상 목사님>
나훔 1:9-15
9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설교 요약>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다. 나훔은 남 유다 요시야 왕 때 선지자였다. 요시아는 8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우상을 버리고 성경을 정리하는 종교 개혁을 통해 남 유다 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나라로 회복 시켰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남 유다도 두 번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이 당시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였으며, 남 유다의 히스가야는 하나님이 기뻐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히스가야가 우상과 산당을 없애는 것을 보고 앗수르 왕은 히스가야가 마치 자기 신을 부순다고 여기며 비웃었다. 그러나 3천년 동안 강국이던 앗수르는 작은 남 유다를 결코 함락하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인들이 서로를 해치도록 교란시키시어 185,000명이나 죽이셨기 때문이였다. 나훔서 3:17의 기록처럼 앗수르는 1845년 발굴 전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던 나라였다. 또한 나훔의 예언대로 그 시대 최강국이던 앗수르에 대한 심판이 성취되었으며, 이 일은 억압받던 남 유다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곧 앗수르의 멸망은 남 유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되었다.

 바울 또한 로마서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사단으로부터 건지고 사망에서 해방시키심을 아름다운 소식이라 일컬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단을 심판하시며 우리를 구원함에 있다. 하나님의 성품엔 공의와 사랑(은혜)이 공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았기에 그 분의 공의를 실감하지 못한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지불한 대가에도 공감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은혜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 분의 이끄심을 바라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십자가에 못밖힌 손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기뻐하시기 위해 노크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선과 의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이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 세상 사람들은 구원을 원치 않으나 죄인이기에 구원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 돌 감람나무의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이 구원 받은 일을 가지고 구원 받은 유대인들과 은혜를 저버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우선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교만해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교만한 불신 유대인도 벌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방인 그리스도의 교만은 더욱 가차 없이 벌하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였다. 여기서 심판 받은 앗수르가 누구인지 되짚어 보자. 앗수르는 노아의 아들 함의 자손인 니므롯의 후예들이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괴롭혔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앗수르의 조상 함은 노아와 함께 방주 속에 있었다. 앗수르가 만약 나의 가족이라면 앗수르의 심판이 당연하게 느껴질까? 아니다 그들이 우리의 가족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인 비유를 들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 농사법에 관한 옛 문서를 보면 이렇게 접붙임을 하는 이유는 돌 감람나무에서 열매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열매 못매는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이면 생기 잃은 참 감람나무가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즉, 이방인을 하나님 백성으로 살릴 뿐 아니라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도 함께 살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 것이다. 탕자의 이야기에서도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하고 사랑했다. 그 모습에 불평하는 탕자 형도 본인이 늘 성실하다는 교만을 버리고 탕자와 행복하게 살기를 아버지는 바랬을 것이다. 우리도 원래 탕자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탕자 형이 된 사람이다. 우리가 행하고 섬긴 것에 대해 탕자에게 자랑하고 교만할 것도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참 감람 나무 같은가? 돌 감람 나무인가? 답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참 감람나무가 되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선택받을 수 밖에 없는 특별함이 이스라엘 백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 내리고 있었기에 참 감람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앗수르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옮기시어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 감람나무가 된 것도 은혜이다. 바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두 가지도 살펴보자. 첫째, 특권의식이다. 둘째, 은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영혼들로 인해 주시는 은혜를 찾자. 그 영혼들이 열매 없는 우리를 깨울 것이며 우리가 있었던 구원의 은혜를 회복시킬 것이다.

꼭대기에서 안으로

누가복음 4:9-13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설교요약>
마귀의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시편 91장 11-12절 말씀을 인용해서 그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리라고 유혹한다. 왜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것일까? 민수기 10장 11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인도한 불과 구름기둥이 증거의 성막위에 있었다. 그 증거의 성막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를 의미하는데 마귀가 예수님을 세운 성전 꼭대기가 바로 불과 구름기둥이 임재했던 위치와 같다. 즉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그분의 능력의 근원지에 예수님을 세운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 세운 이유
첫째는 십자가의 조건없는 사랑을 짓밟고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왕의 자녀의 권세를 파괴하기 위함이다. 거짓의 본체인 사단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진실한 관계와 교제를 끊기 위해서사랑의 확인이라는 전략을 시도한다. 또한 사단은 시편 91장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매개체로 오인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조건적인 사랑을 하도록유도한다. 사실 사람들도 깊은 성숙에 들어가면 조건이 무의미해지는데 허물러 하나님이 우리들을 향한 사랑은 절대로 조건이 성립이 안 된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만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속죄를 위한 복잡한 번제의 과정과 몇 번에 걸쳐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고 거룩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보여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를 수있게 해주는 완벽한 거룩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조건이 성립될 수 없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우리의 죄를 덮어 주셔서 그분의 임재 앞으로 나오게 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단은 이런 지성소, 즉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짓밟고 서서 다른 사랑의 조건을 계속해서 제시하라고 한다.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성취한 것이 자신이 하나님에게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여기게 유혹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능력을 분산시킨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이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배웠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신 목적은 마귀의 유혹을 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에 집중하면서 곧 시작될 3년 반의 공생애를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마귀는 마지막 시험으로 예수님이 가진 능력과 열정을 헛된 것으로 만들라고 했다. 즉 자신만이 가장 거룩하고 가장 영적이고 가장 신령한 존재임을 알리는데 관심을 두게 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탐욕의 도구로 전락시키려 했다. 그럼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를 이기셨는지 보자.

예수님의 승리의 방법
첫째는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자.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신다. 이 말씀 속에는 매 순간 출애굽기처럼 응답-결핍-응답-결핍-응답-결핍이 계속 반복될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되 한 번으로 그치지 말고 계속 신뢰하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성전 꼭대기로 올라가지 마라. 사단은 성전 꼭대기에 선 사람들, 즉 높은 마음, 자신이 가장 영적이라고 우월한 마음을 갖도록 유혹한다. 이런 마음이 들면 '사단아 물러가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선포해야 한다. 성전은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곳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매 순간 인정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들의 예배와 사랑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 진심의 예배와 사랑을 드릴 때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조건 없는 사랑, 완벽한 기쁨, 평안이 임해 영화롭게 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의 길을 가게 한다.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것을 고난이라고 하시지 않고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라고 '영광'이라고 하셨다. 그런 고난은 부활이 있고 열매가 있고 생명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난다. 당신은 성전 꼭대기를 향하는가? 성전 안을 향하는가?

예배 전쟁

누가복음 4:5-8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

<설교 요약>
광야로 이끈 두번째 이유 -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
마귀가 두번째 예수님을 유혹한 것은 자신에게 절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절하다' 라는 동사는 '~을 향하여 입맞추다, 경배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다'라고 할 때 사용되는 언어다. 사단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자신에게 하라고 유혹한다. 그 미끼로 세상 영광과 권력을 모두 주겠다고 유혹했다. 이것을 사단은 다시 한번 자신도 모르게 네 가지를 인정한 셈이다. 첫째.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들의 예배를 받으신다. 세째. 예배에는 놀라운 축복이 숨겨져 있다. 넷째.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자신에게 하기 원한다. 이 시점은 예수님이 3 년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려는 시점이다. 예수님은 저물 때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갈 때도 홀로 감람산으로 가셨다. 요한복음 7:53-8:1에 따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저녁이 되어 제자들을 배에 태우어 보내신 후 홀로 산으로 가셨다. 마가복음 6:46에 따르면 새벽에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마가복음 1:35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주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이셨었고, 기본적으로 열 두 명의 제자의 늘 함께 하는 삶을 사셨다.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도 홀로 어디론가 가곤 하셔서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찾아야만 했다. 혼자있는 것은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있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8:29을 보면 예수님은 삼 년간에 공생애 동안 제자를 훈련하고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시고 병든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자 들을 자유케 해주시는 사역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시간 그분께 예배하는 시간만큼은 어떠한 것과도 타협하지 않으셨다.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애타게 찾을 때도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러 떠나셨다. 요한계시록 22:5에 따르면 하나님의 임재가 단절된 곳에는 영원한 고통, 절망, 지루함, 그리고 슬픔만이 존재한다. 시간이 아닌 사단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는 아직 시간도 존재하고 하나님의 임재도 존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 분과의 깊은 예배가 깊어질수록 우리 삶의 시간속에서 지루함도 외로움도 점점 작아지고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분과의 교제가 단절 될수록 시간 안에 있는 아픔과 고통과 절망과 슬픔과 외로움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가 흐르는 예배는 이땅의 시간 안에서 천국을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이고 생수의 근원이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그 시간에는 기쁨과 치유와 회복과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없는 곳에는 사단이 지배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예배가 건강하고 살아있을 때 그들은 매순간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임재를 경험한다. 그러나 예배의 태줄이 끊어지면 내면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간다. 당신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온전히 드리고 있는가? 예배드리는 것을 다른것과 타협하지 않고 있는가?

마귀의 유혹 - 예배 안에 있는 축복들을 받지 못하도록
마귀는 예수님의 예배를 파괴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렇게 단계별로 유혹했다. 순식간에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여주었다. 세계의 나라의 왕국에는 부귀와 권력과 영화가 모두 있다. 한 나라의 왕은 뭐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한다. 누가복음 4:6과 요한복음 3:35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던 공생애 초기에 한 말씀이다. '주셨다' 라는 동사가 현재 완료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에게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모두 예수님에게 주심을 알 수있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아들의 것이기도 하다. 잠언 8:27 에는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잠언8:29-30에는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알수 있다. 한 나라의 왕국은 하늘과 땅, 바다와 태양과 자연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왕국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고 예수님 이시다. 그러므로 마귀의 이 거짓말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농토를 가진 주인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와 그 주인의 농토를 보여 주면서 당신이 나에게 잘만 보이면 내가 이 농토를 당신에게 주겠다' 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귀의 조그마한 유혹에도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린다. 거짓말에도 잘 속아 넘어간다. 세상의 영광과 권력에 취하고 유혹에 점점 무릎 꿇을 때 나타나는 두드러지는 증상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세상의 영광과 권력의 달콤함의 유혹이 너무 강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권력과 영광과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이 땅의 주권을 넘겨준 일이 없으시다. 스스로 자신의 것이라고 거짓말 한다. 자신이 하나님인양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세상 정욕과 유혹에 넘어지고 변질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도 자신의 영달과 야망을 위해서는 단숨에 포기한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사단에게 팔려고 한다.

마태복음 6:25, 31-34 말씀은 무엇인가? 하늘과 땅의 주인은 마귀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니고 우리의 육신의 부모나 권력이나 재력의 빽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 이시다 라고 말씀하신다. 막상 예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희생시켜 돈을 벌고 직장에 들어가고 출세를 한다해도 우리는 우리 힘으로 지혜로 안되는 일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누가 우리를 이런 정신적이고 육체적이고 영적인 총체적인 고통에서 구해줄수 있을까?  한분 밖에 없다. 하늘과 땅과 세상 모든 영역에 주인되신 하나님 이시다. 그 하나님은 예배안에 계시다. 예배가 풀리면 모든것이 풀린다. 예배가 막히면 모든것이 막힌다.

당신은 삶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인가? 당신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원수가 두려워하는 것

누가복음 4:1-4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설교요약>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 하늘로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 라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이 일 직후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끄심을 받았다. 왜 하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 머무르게 하셨을까?

이유 -  떡 만이 아닌 말씀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 가운데로 인도되셨다.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고 맑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 세상 육신의 자랑, 안목의 정욕, 쾌락의 삶이 이때 거룩함과 순결과 사랑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고 있을 때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하러 왔다. 

유혹 - 하나님의 음성 듣지 못하게 하도록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질 때 마귀는 특별히 예수님이 거의 잡수시지 않기로 작정한 기간의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유혹했다.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예수님은 얼마 전에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 그러나 마귀는 그래도 다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유혹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할 때 내면에 들려오는 마귀의 음성을 잘 분별하고 대적해야 하는 이유를 확인시켜 준다. 이것은 아빠와 아들 엄마와 딸이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와서 아들과 딸에게 '네 아빠 엄마 맞아 정말?' '이렇게 닮은 구석이 없는데' 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귀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고 육신의 본능과 탐욕대로 살라고 부추긴다.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라고 속인다.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다. 그러나 돌을 떡으로 만들며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시지 않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핑계 대며 돌을 떡으로 만들며 합리화시키지도 않으셨다. 인간적인 욕정과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사셨기 때문이다.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사는 방법 
1) 입을 하나님께 드리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를 원하신다. 
2) 열방을 두려워하지 말고 파괴하고 세워라. 하나님의 말씀이 입을  통해 마음에 들어오면 파괴할 것이 보이고 다시 세울 것이 보인다. 
3) 맞서게 하시는 은혜. 세 번째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내가 너를 보호하고 함께 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당신은 사단이 파괴한 하나님의 창조물을 되살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다. 원수가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75인 중에 빛나는 보석처럼

누가복음 3:23-38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24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25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26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27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28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29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30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31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32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33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34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35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36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37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설교요약>
누가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를 추적해서 그 근원까지 적고 있다. 아담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탄생하고 번성했지만 하나님이 한 족속을 선택했고, 그 족속 중 한 사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셨다. 여기에 기록된 75인 중,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며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사람들의 특징을 추적해 보자.

하나님의 씨를 일으키는 것에 마음을 쏟았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보다는 나의 유익을 우선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어 갔다. 분명 아담과 하와와 그의 후손들은 가인의 후손과 멀지 않은 곳에 살았고, 가인 후손의 악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따르는 새로운 씨가 일어나길 갈망했을 것이다. 창세기 4장 2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벨을 대신할 셋이라는 다른 씨를 주셨다. 하나님은 셋을 통해서 혼돈과 타락 속에 있는 가인의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 놓길 원했다. 하지만 창세기 4장 26절에 보면 셋의 아들인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셋이 105년 동안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삶을 드린 결과였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회의적일 때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바라보시고 그 분의 불을 보내주시기 때문이다.

셈과 아르박삭의 후손이라도 하나님께 믿음의 반응해야 한다
노아의 아들인 셈은 1년 10일 동안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체험했고, 아버지인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실수했을 때, 동생 야벳과 함께 부친의 나신을 옷으로 덮어드렸다. 그 후로 셈은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복을 받았다. 셈과 그의 아들인 아르박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생존해 있었다. 서로 교류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의 직계 조상인 노아와 셈이 경험했던 방주와 하나님에 대해 분명히 전해들었을 것이다. 그 때까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직접 만나주시고, 그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번성케 할 것이라 약속해 주셨다. 아직 상속자가 없던 85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도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을 믿는 고백을 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셨으며,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은 어린 다윗이 하나님을 비웃는 골리앗에 대항해 믿음으로 싸우게 하셨고,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에게 천사를 보내 잉태될 아들이 예수님임을 계시하여 그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삶 속에서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려다 되지 않아 모든 걸 내려놓고 성령을 의지하여 신실함으로 기도하는 영적 방법을 통해  때 닫혔던 문이 쉽게 열린 경험은 없는가? 누가의 족보에 있는 75인 중에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주실 때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점이다.

잠언서 11장 30절에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신약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 지혜로운 자는 영혼을 얻는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의인을 축복하면 의인의 마음은 항상 따르는 사람에게 자신을 우상 삼게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섬기게 한다. 그 생명나무는 생명 되신 예수님이시다. 요한 계시록 2장 7절에 보면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가지려면 댓가 지불이 필요할 수도 있음을 전제한다. 사랑은 희생이다. 처음 사랑은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처음 행위도 이렇게 순수하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하려면 마음을 다칠 수 있고 아픔을 경험할 수 있고 상처가 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하신다. 또한 치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평안과 기쁨과 보화들을 안겨준다.

흥정과 믿음

누가복음 3:18-23
18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설교요약>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자기 앞으로 나서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때 그 군중 사이에 섞여 있던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러 세례 요한 앞으로 나오셨다. 줄 서 있던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식하거나, 알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물에서 올라오실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째, 비둘기 같은 형체의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했다.  둘째,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 답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어느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수의 무리 속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질 때 
예수님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줄을 서 세례 요한에게로 나아가고 계셨다. 아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사랑 받는 분임을 알지 못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미미함을 느낄 때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자체의 가치를 상실하면 슬퍼지고, 우울해지고, 심하면 여러 유혹들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잘 나고 경쟁적인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나의 말을 들어 줄 누군가가 그리워 질 때가 있다. 하나님은 이 때, 우리에게 주목하시며 하늘을 여시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시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대단한 일을 이루지 못했어도, 우리가 어떤 것으로 인해 기뻐할 때, 우리의 기쁨을 더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당신은 오늘도 당신을 향해 이유 없이, 조건 없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다, 너는 내 기쁨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있는가?

공적 사역으로 여러가지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 
예수님은 30년 동안 목수의 아들로 이름 없이 살았다.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신 후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일을 그르치지 말아라, 멋지게 일을 해야 한다, 일주일에 금식은 몇 번 해야 한다'류의 음성이 아니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자다' 라는 음성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이러한 음성과 마음이 항상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옆에 있는 사람의 사역을 보니 그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아.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지? 나는 왜 이렇게 능력이 없지?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해' 라는 음성도 들릴 때가 있다. 식물의 생명이 뿌리에 있음 같이, 사역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뿌리가 뽑히거나 상하면 줄기나 가지나 열매나 모두 금방 시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열매가 더디 맺혀도, 외적인 식물의 형태가 초라해 보여도, 뿌리만 튼튼하면, 언젠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일을 했을때, 그것에 대해 인정 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넣어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 이유는 우리를 보고 있고, 인정해 주는 어떤 존재가 반드시 있음을 의식하며 우리가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때로 희생을 해야 하고, 헌신을 하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기쁨으로 그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건강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어려운 상황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날 때 
헤롯 안디바는 선을 알면서도 악을 선택한다(19-20절). 이런 인격을 형성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 헤롯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헤롯은 자기 두 딸과 아내를 죽이고, 충직한 신하들을 감옥에 보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 지역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모두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성장한 자녀들은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부모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내면은 사랑이 아닌 공포와 불안으로, 그리고 곧 헤로디아가 아버지 헤롯의 사랑으로 채워졌어야 할 안디바의 내면을 대체 하였다. 헤로디아는 그를 악하게 조종하였다. 하나님은 안디바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세례 요한을 통해 다시 주셨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을 죽였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죽인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헤롯 안디바 혹은 헤로디아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성장 과정부터 꼬이고 묶인 사람들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자라나며 잘못 형성된 인격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때로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 넣는다. 심하면 판단력도 흐려진다. 더 심하면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의해 깊은 우울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비둘기 같은 형상의 성령으로 오실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채워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고전 2:11-12) 분별력과 은혜로 우리는 이미 주신 선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확인의 방법 : 흥정인가? 신뢰인가? 
예수님 물에서 올라오신 것은 세례 요한의 인도 덕이였다. 예수님이 인간의 손을 의지한 것은 인정과 사랑 때문이다. 이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들려왔다. 구약에 나병 환자였던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몸을 여섯번이 아니라 일곱번째 몸을 담글 때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처럼 회복되었다.
물은 말씀이다. 물은 예배 속에 흐르는 성령이다. 찬양과 기도 속에 흐르는 성령이다. 일곱번은 반복을 의미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 속으로 계속 반복해서 들어갈 때 우리 삶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닫혀있던 것들이 열리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해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만두는 것은 흥정이고 조건적인 믿음이다. 몸이 물로 들어갈 때 마음도 영혼도 들어간다. 그래서 예수님도 친히 자신의 몸을 세례 요한에 맡기시며 물 속에 잠기셨다.

당신은 계속해서 그 성령의 강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말씀의 강물 안으로 반복적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흥정이 아닌 믿음으로 주를 따르는 사람이다. 

 

쭉정이와 알곡

누가복음 3:7-17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설교 요약> 
자연에는 좋은 열매도 있고 나쁜 열매도 있다. 좋은 열매는 먹을 수 있으나 나쁜 열매는 먹을 수 없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외쳤다. 누가복음 3:9 절 말씀에서 믿는 사람들은 두 가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조건 
누가복음 3장 9절 말씀에 기초할 때 '믿는 사람들이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다. 누가복음 3 장 7 절에서 8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자신 앞으로 나오는 이들의 내면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아브라함 혈통의 사람들에게, 요한은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다. 독사는 사단을 상징하는 명사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육적 자부심에만 빠져 있었고, 외형적으로만 믿음의 후손으로 보일 뿐이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1. 좋은 열매를 맺는다
첫번째, 좋은 열매는 회개의 열매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먼저 예수님께로 나아가 우리 죄를 회개하게 한다(요한복음 14 장 6 절).
그런데, 말로만 회개하고 행동에 변화가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씨앗은 가장 먼저 회개의 열매로 나타난다. 세례 요한은 단순히 회개라고 하지 않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했다. 고백을 '회개의 씨앗'이라고 보고 행동의 변화를 '회개의 열매'라 보았다. 참된 회개는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난다. 결국 나로부터 시작된 회개는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게 되고 지속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진정한 회개에 대해 누가복음 3 장 10 절에서 14 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행동이 수반된 회개다. 좋은 열매는 예수님 안에 거할 때 맺어진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 장 5절을 통해,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다는 것은 말씀 안에 있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회개는 나의 노력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과 나무이신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드려지는 회개는 구원 받기 위한 '거듭남의 회개'다. 그 이후에는 '성화를 위한 회개'를 계속해야 한다. 요한복음 15장 2절을 보면, 지속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 치기를 해 주어야 한다 말한다. 주님을 따르면서 계속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2. 성령의 불에 태워진다
두번째,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 분께 붙어 있는 가지임을 확신시켜 줄 증거는 성령의 불에 태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회개할 때, 예수님이 부어주실 성령의 불에 대한 약속이다. 성령과 불로 나누어 말했지만 성령을 불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불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어 주시기 원하신다. 시내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의 영혼에 불을 붙인 것도 가시떨기 나무에 붙은 하나님의 불이었다. 이 하나님의 불을 체험하고 모세는 애굽에서 고통받는 200만명의 영혼들을 구해냈다. 그 이후로도 이 불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속해서 나타나 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특히 구약의 불은 번제와 연결되어 있다. 번제는 두 가지 목적으로 드렸다. 첫째.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한 속죄의 제사였다. 둘째,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제사였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독자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받았다. 하나님은 이미 번제물로 이삭을 정했다. 그 이삭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런데 이삭처럼 자신을 받고 싶어하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번제할 어린 양을 찾는다. 하나님은 오늘도 스스로를 번제물로 드리기 위해 우리가 광야 길을 걸어갈 때, 불로 우리를 감싸신다. 

당신은 준비된 불과 나무를 보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좋은 열매는 삶의 변화가 있는 회개다. 좋은 열매는 나를 위해 준비된 불과 나무를 보면서 기꺼히 자신을 번제로 드리는 자원함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라. 말씀 안에 거하라. 회개의 열매와 불의 열매는 말씀 안에 있다. 이것이 쭉정이가 아닌 '알곡'이다.

회개의 세례

누가복음 3:1-6
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설교요약>
하나님은 오늘도 삐뚫어지고 뒤틀린 영혼이 반듯하게 변화되는 것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럼 하나님이 어떤 것들을 바로잡기 원하시는지 그 유형들의 문제점과 바로잡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자.

첫번째 골짜기 형이 있다.
사람의 내면도 골짜기형이있다. 내면이 너무 많이 패여서 관계를 가질수록 자신의 살도 패여져가는 아픔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골짜기형 사람들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사람을 회피하는 것과 사람에게 공격적인 성향 둘다이다. 다섯 명의 남편과 헤어지고 여섯번 째 남자와 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을 보자. 그녀는 중동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정오에 물을 길러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녀에게 물 좀 달라고 하자 유대인이 왜 사마리아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냐고공격적으로 반응했다. 내면에 골이 깊이 패인 사람은 늘 사람들을 회피하거나 공격적인 성향을 쉽게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복음 7장에 나타난 여인의 내면에 파인 골짜기는 이미 예수님의 사랑으로 메꾸어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증거는 이 여인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럴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바라보고 집중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의식할수록 사람들이 두려워지고 적대감이 커진다. 그러나 예수님을 집중하면 사람들이 두려워지지 않고 적대감이 줄어든다. 그 때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생명을 줄 수 있다. 이 여인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정죄와 평가에 집중하지 않고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직장, 가정, 교회, 학교에서 순간순간 사람이 두려워질 때가 있다. 그 때마다 그 덫에서 나와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고 고약한 냄새들로 가득찬 장소들을 향기로운 향기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열쇠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 내면의 골짜기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분의 새살로 채우고 싶어하심을 아는가? 사람이 아닌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을바라보는가? 사람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을 주목할 때 당신의 내면에 깊게 파인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게 될 것이다. 그 골짜기가 메워지면 당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두번째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통해 보여 주신 유형은 높은 산과 작은 산이다.
하나님은 이런 산을 낮아지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누가복음 3:5 말씀에 동사 '낮아지고'는 '겸손하게 하다' '낮아지게 하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들이 낮아져서 겸손한 삶을 사는 것에 관심이 많으시다. 사랑받는 것과 추앙받으려는 것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사랑받으려 하는 것은 겸손이고 추앙받으려 하는 것은 교만이다. 하와를 유혹한 사단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그 것을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인간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될 것을 경계한 것이라고 했다. 사단의 말을 듣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 행위의 동기 속에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능가하고 조종하려는 심리를 보게 된다. 교만의 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섭다. 교만은 인간이 신이되려 하는 것이다. 높은 지위나 지식이나 세상의 부를 가졌을 때 교만은 수면 위로 정체를 드러내는 빙산과 같다. 사람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행복해 한다. 그러나 사람을 신처럼 추앙하라고 강요받거나 아부를 하게 되면 큰 수치감을 느끼고 자존감을 훼손 당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에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추앙하는 본능을 넣어주셨기 때문이 다. 세상에 부와 권력을 잡은 자들 중에 높은 산이 될수록 더욱 낮아지는사람들이 있다. 세상은그리스도인이 완벽해서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것이 아니다. 솔직하고 진실할 때 그 겸손한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린다. 그럼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가? 살지 않는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믿음의 기준 3가지
첫째. 영혼의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
하박국 2:2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그 분의 심판을 알고 그 분의 은혜를 알고 영광을 인정하면 할수록 그런 사람들의 영혼은 이 땅에 부흥이 임하길 소원한다. 사람들의 영혼이 '부흥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한 영혼이 다시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되길 소원한다. 무릎 꿇고 열방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열정을 갖게 된다.
둘째. 결핍과 풍요 속에서도 주를 기뻐한다.
하박국 3:17-18 말씀에 따르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증거는 아니다. 없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계기가 되었다. 없는 것이 오히려 영적으로 거룩하고 겸비하여 깨어있게 했다. 없는 것이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감사로 기쁨으로 인도했다. 당신의 부족함은 무엇인가? 결핍 속에서 오는 불안과 걱정은 무엇인가? 당신이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기쁨을 주실 것이다. 기쁨과 함께 응답도 주실 것이다.
셋째. 사슴의 발 같은 힘을 주실것을 기대한다.
하박국 3-19 말씀에 따르면 하박국은 처음에는 불만과 원망을 하나님께 토로했다. 그러나 하박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발을 사슴의 발 같이 해주실 거라 확신했다.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사슴 발 같은 힘을 주신다. 회개는 골짜기를 채우는 것이다. 회개는 높아진 산과 같은 마음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에게 이런 축복을 약속하셨다. 요엘 2:12-14 말씀에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모든 것을 돌이키신다. 저주가 축복이 되게하신다. 재앙을 중단 시키실 수 있다. 하나님은 마음을 찢으며 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회개는 하늘문을 여는 열쇠다. 회개는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준비된 사과

누가복음 2:40-52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설교요약>                                                                                                                                                  열두살이 된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잃어버렸음을 알아차리고, 하룻밤길을 되돌아가 삼 일이 지난 후에야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게 된다. 
본문에서는 열 살 미만인 아이의 외적 성장과 열 두 살 이후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내적 성장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부모들은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자녀들을 교육하고 보살핀다. 그 결과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겉모습만 강한 모습으로 성장했을 뿐, 내면은 두려움으로 가득찬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즉,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 행동을 하면서도 전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로 자란 것이다. 지식과 외형은 자랐지만 성품과 인성은 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성인 아이  
기독교 상담학자 Dr. Archibald D. Hart는 자신의 저서에서 어린 시절 심각한 애정 결핍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정서 장애를 보이는 사람들의 세 가지 증상을 적고 있다.
첫째. 사랑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과도하게 노력하며, 끊임 없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비현실적으로 높인다. 
둘째. 인격에 깊이 새겨져 있는 심각한 특정 성격의 발달이 나타난다. 
과도한 질투와 함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동시에 나타낸다. 깊은 불안감으로 인해 사랑을 늘 재확인 받으려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높다. 
셋째. 애정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나 질병이 발생한다.
'내가 아프기 때문에,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이젠 나를 사랑해야만 해'라며 주로 동정을 통해 사랑을 획득한다. 어린 시절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잘 받고 자라는 것만으로도, 이후 사회적 실패나 신체적, 지적 결함까지도 이겨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외적으로는 성인인데 내면은 여전히 어린 아이들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진실로 오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왠지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두려워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만, 늘 하나님이 두렵고 부담스럽다. 늘 사랑에 목말라 사람들 주변을 맴돌며 전전긍긍하고, 과도한 질투와 주목 받거자 하거나, 집착적 성향을 보임으로 인해 타인과의 지속적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집을 사모하라  
예수님의 부모는 매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만큼 신실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날이다. 요셉과 마리아는12년 전에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했고, 여러 기적을 통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심 없이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을 그저 자신들의 자녀 중에 하나이자, 인간의 아들로 점점 인식해 갔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에 머물면서 '내가 내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머무는 것에 대한 당연한 말을 했을 때, 그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할 만큼 영혼이 둔감해지고 세상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의무는 다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사랑과 영적인 영향력은 희미해져 갔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잃어 버리면 교회는 사회적인 활동 무대로 전락한다. 자녀들을 세상적인 것들로만 키우려 한다. 오늘날의 자녀들이 점점 세상의 쾌락과 정욕에 빠져드는 것은 그들이 영혼의 '아버지 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녀들의 영혼이 갈망하는 아버지 집으로 데려와, 그 곳에 머물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사춘기 시절의 아이는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은 것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그래서 타인들과더 거리를 두고, 상태가 심해지면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은 오직 하나님만이 치유하고 채울 수 있는 영역이다. 아버지 집을 잃고 예수님을 잃으면 아무리 종교적인 의무를 다해도 내면은 채워지지 않는다. 자녀의 영혼에 생명의 양식을 주는 아버지의 집으로 교회를 보로,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영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깨어 있는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아버지 집을 사모하는 영혼들이 일어나길 간절히 찾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하는 사랑
52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했고 그 분의 사랑을 갈구했다. 그래서 그 결과 사람들에게도 사랑스러운 분이 되어 가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을 주고 받았다. 그 사랑 받음의 확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확장 되어가고 세상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매순간 확인하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 사랑이 사람들에게 흘러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는데도 계속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교만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성숙한 사랑, 건강한 사랑은 먼저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돌려받는 사랑은 1) 우리 자신을 더욱 겸손하게 해준다.  2)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먼저 사랑하셔서 그분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된다. 3) 먼저 주는 사랑의 기쁨과 성숙을 맛보았기에 더욱 누군가를 먼저 사랑하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준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은 먼저 하는 사랑으로 드러난다. 

결국 성인 아이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의 깊이에 비례한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지옥 형벌을 받도록 내주신 것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최고의 사랑이다. 때로 이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해 자연을 통해 다시 우리의 영혼을 상기시키기도 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을 의무적으로 형식적으로 사랑하지 마라. 마음으로, 영으로, 아버지 집 교회를 사랑하라. 그 사랑으로 헌신하라. 먼저 사랑하라.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라.

성령의 시간 속으로

누가복음 2:21-39
21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설교요약>
예수 생후 8일에,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행하기 위해 헤롯 성전에 들어갔을 때 전혀 기대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그곳에는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과 안나라는 노인들이 있었다. 특히 그 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 이 당시 성전의 크기는 지금의 미식 축구장의 세 배 정도였으며, 제사장 7,200명, 레위인 9,600명이 성전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가늠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의 방대한 성전 안,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알아봤다는 점이다. 그 일은 '성령의 감동'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분이 선택한 사람들을 아신다. 그리고 그들을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하신다.

* 성령의 시간 속으로
성령은 그 분을 의지하며 살 때, 그 분이 원하는 시간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시간 속에 천국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쫓아 살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쫓아 살아야 한다. 그 시간을 알려면 계속해서 성령님을 사모하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영으로 우리가 채워지길 소망해야 한다. 시므온과 안나의 공통점은 육신의 정욕대로 살던 사람들이 아닌 신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제사장 지파 출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임에도 이들은 성전을 사랑했고, 성령의 인도를 사모하며 절제된 삶을 살았다. 시간을 아끼는 것은 내 뜻과 계획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 뜻을 알려면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정욕적인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그것이 방탕한 삶인 것을 금방 인지하고 돌이키게 된다.

* 성령의 시간 안에 있는 증거들
1) 예수가 보인다 
시므온과 안나가 성령의 감동으로 그 분이 이끄시는 시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처음 만난 것은 예수님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색을 하고 있었음에도,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살았던 시므온과 안나는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있던 예수님을 놓치지 않았다. 사우스 다코타에서 만난 모든 아이들이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살고 있는데도, 천사같은 아이를 그 가운데서 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싸인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임재하신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신다. 상황이 어렵고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예수님을 보고 있는가?

2) 나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손이 보인다
복음서의 시므온과 안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짧게 언급되어 있다. 그럼에도 평생 이 한 순간을 위해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의 삶을 강한 성령으로 붙드셨고, 매순간순간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게 하셨다. 누가 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 힘없고 화려하지 않는 사람들이였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성령에 붙들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종종 이 땅에 살면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상실한다. 상대적인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또한 상대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이 있어 하나님이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신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을 부어주신다. 이 땅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존재감의 상실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가? 그것이 풀어지고 자유하게 되는 방법은 하나다. 성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성령안으로 이끌리는 길
1) 매순간 선택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셨다. 선택을 위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 만남, 생각, 그리고 장소에 있기를 매순간 선택할 때, 우리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2)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라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려운 사람들과의 관계로 연결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사랑은 삶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안식에 우리의 마음이 다다를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한다. 당신은 성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길 사모하는가? 매순간 성령을 따라 선택하라. 선행이나 사역이 아닌 사랑을 하라.

하나님을 보려면

요한1서 4:12-13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설교요약>
MMC 교회에서 11년째 사우스 다코타 선교를 갔는데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사랑과 선교팀 안에 있는 사랑을 깊이 알게 하시고 더 완벽해져야 하는지를 보게 하시는 선교였다. 오늘은 우리들 안에 있는 사랑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온전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확장하시는지를 선교 팀원들의 나눔을 통해서 보겠다. 

선교지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자, 선생님은 아이에게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상으로 줬던 스티커를 다시 떼어가겠다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에 그 아이의 마음은 완전히 닫혀 버렸다. 선생님의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달래지지 않던 그 아이는, 제비어라는 그 아이의 형이 그 아이의 옆구리를 친근하게 손가락으로 살포시 찌르자 이내 마음을 풀었다.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권위적인 선생님이 아니라 가족 같은 친근한 관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아이 안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그 곳에는 또 평소에는 천진난만한 다섯 살짜리 가브리엘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의 눈빛이 바뀌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이 오면 윽박지르고 무력으로 저지해도, 성난 스무살 청년처럼 집기와 캐비닛을 부수고, 난폭하게 변화되며 본인의 머리를 주먹으로 치는 자해까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사해도 아무 반응도 없던 친구였다. 근데 갑자기 Deli Queen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해서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더니 원래의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듣고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더 큰 능력임을 알게 하셨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얼마나 재능 있고 능력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어느 한 아이가 선생남한테 마약를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 아이는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마약 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사실 이 아이는 착하고 긴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아이였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예쁘게 따주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겨울왕국의 엘사와 같이 예뻤다. 이 순간은 선생님이 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윈터, 스톰 그리고 썬더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들이 있었는데, 오래 전부터 성경 학교에 참가했던 아이들이였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근데 16세 정도된 원터가 차 안에서 욕을 섞어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하였지만 다들 주문은 안하고 뒤에서 서성거리기만 했고, 데빈에게 케찹통을 찾아달라 부탁했는데 케첩통을 찾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런 아이스크림 가게에 온 적이 거의 없던 아이들이여서 이 곳이 낯설었던 것이다. 하지만 피도 안섞인 동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주기 위해 자신들은 조금만 먹고,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 때 원터가 그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온 스무 살 정도의 청년과 길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원터 삼촌인 저스틴이였다. 그런 저스틴을Taco Night과 Korea Night에 초대했는데 응했다. 저스틴은 Taco Night에 방문해서 스킷에 나오는 주인공이 죄와 싸우는 모습이 마치 자기와 같다면서,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Divine Appointment 이라 고백했다. 나는 원터가 욕하는 것과 본인을 자해하는 것이 싫다고 삼촌인 저스틴에게 이야기했고, 네가 아이들의 삼촌과 형이 되어달라 부탁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온전한 사랑의 발자국을 보여주신다. 우리가 걸어간 발자국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선생님들이 이 아이들을 위해 울고, 사랑을 표현할 때 이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오엔 목사님의 손자인 마셀은 이전에는 건방지고 종종 비웃는 표정을 자주 보였던 아이였지만, 이번엔 아이들이 우상 숭배에 사용한 바비인형을 버리고, 우리 선교팀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길에 분명한 발자국을 남겨주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도 보여주시는데 10년 동안 터키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자매를 통해 부족했던 선교 헌금을 채워주시고, 사우스 타코다에서 1시간 거리 안에 있는 목사님과 선교 장로님을 연결해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발자국을 확인하고 위로 받는 사건이었다. 

사우스 다코타 아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이기적이고 부족한 사랑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보게 하셨다. 이런 모순투성이 사랑을 성령 하나님이 온전하게 하시고 서로를 사랑하게 하신다.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때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온전케 한다. MMC 선교팀의 모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우는 모습 속에서 감동하게 하셨다. 우리는 사역을 잘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단지 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께서 이 아이들이 온전한 사랑을 보게 하시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을 온전하게 하는 방법이다.

땅에서 누리는 평안

누가복음 2:1-20
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설교 요약>
누가복음 2:1-20은 성탄절 설교에서 주로 많이 인용되는 성경 구절이다. 예수님의 탄생이 역사적 사실임을 명확히 증거하기 때문이다. 로마는 당시 식민 통치하던 속국의 인구 조사를 통한 세금 및 병역 징집의 이익을 챙겼다.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으로 유다 지파였다. 때문에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를 데리고 나사렛으로부터 다윗의 출생지 베들레헴으로 호적 신고를 하러 올라갔다.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의 해산일이 임박하여 예수님을 낳았고, 여관에 남는 방이 없어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말 구유에 뉘였다. 이 지점에서 ‘왜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아구스도)는 예수님 탄생 시점에 호적 신고를 명했을까?’  ‘예수님은 꼭 베들레헴 에서 탄생하셨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
구약에 미가 선지자는 주전 약 735-700년 경에 예수님 탄생에 대해 예언했다(미가:5:2) 동방박사들은 큰 별을 따라 다다른 곳에서, 그 곳의 왕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신지 물었다. 헤롯은 구약 율법의 선생들이자 전문가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는지 물었다. 그들은 정확하게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하며 베들레헴이라 답했다(마 2:5-6) 서기관과 대제사장은 지식적으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나,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위신 예수님을 찾지도, 예배하지도 않았다. 이것을 안 헤롯은 군사를 보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헤롯의 이런 광기 어린 살육은 아기 예수님이 자신의 권좌에 위협이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오시면 진심이 드러난다(마 10:26) 감추어진 명예욕과 탐욕이 드러난다. 실천 없는, 말뿐인 믿음과 헌신이 드러난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은데 정작 하나님은 모른다. 반면 이런 전문가들처럼 구약 성경을 모르던 한밤의 양치는 목자들은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고 전해주었다.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알려주었다. 학식도, 부도, 명예도 없없지만, 목자들은 단순하고 순수했다. 그들은 천사를 통해 기쁜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를 찾으러 가자 서로 말했다(눅 2:15-16)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헤롯과 종교 지도자들에게로 먼저 보낸 점이다. 헤롯은 자기의 두 딸과 아내를 죽였으며, 자신의 삶의 마지막 즈음엔, 자신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을 여리고 감옥으로 보낸 잔인한 사람이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 했지만 사실 위선적 삶을 살았고,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에게 동방박사들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다. 하나님은 먼저 동방박사들을 통해 그들의 완악하고 위선적인 마음을 두드리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거절했다.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도 천사를 만났지만, 천사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도 죄인이었다. 그날 저녁 목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께 무릎 꿇고 경배드렸다(눅 2:20)

죄인들에게 주시는 은혜
오늘도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사람도 보내시고, 천사도 보내신다.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천사들이, 가장 초라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광야에서 밤을 지새우는 목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의 금가루를 뿌려주거나, 대단한 보석을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다. 그 분을 어떻게 만나는지 알려주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알려주고 어떻게 그 분을 만날수 있는지 알려주는 이가 바로 천사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만족과 평안을 찾아 헤메이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 안에 있다.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면서 하늘의 영광과 평화를 말했다.(눅 2:14) 평화는 'Peace'는 평안, '땅에서 평안' 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땅에서의 평안을 얻기를 갈망하며 크게 세 가지를 추구한다. 편리한 삶, 인간 관계, 욕구 충족이다. 넓고 안락하고 깨끗한 공간은 더럽고 불편한 공간보다 마음을 한층 평안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외적 좋은 환경들이 지속적 평안을 보장하진 못한다. 내면에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한 평안을 위해 좋은 인간 관계를 추구한다. 인간이라면 관계를 통해 오는 관심과 배려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누군가를 돌보면서도 내면에는 더 많은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또한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도 우울하고 권태를 느끼며, 만족 없이 다른 새로운 것에 탐닉하는 사람들도 많다. 식욕처럼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면 어느 정도의 기쁨과 만족이 있다. 새로운 것을 아는 것, 성취에 대한 즐거움도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시시하고 허무해진다. 따라서 편리한 삶, 완벽한 인간관계, 본능적 욕구 충족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줄 순 있어도, 내면에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평안과 만족은 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영혼에 근본적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건 오직 예수뿐이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 했다. '기뻐하신 사람들' 은 헬라어로 '은총을 입다' 란 의미다. 당신은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만약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 분을 위해 살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그 은혜를 받아 드리면 평안이 임한다.

전쟁 중에도 누리게 되는 평안
누군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 대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많은 영적 싸움에 직면하게 괴고 마귀의 공격 표적이 된다 했는데 어떻게 전쟁 중에 평안을 누릴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실때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 체포직전이었다. 사단이 예수님을 죽이려 총공격을 퍼부을 때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안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인이 용서함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다 환난을 만나기도 하고, 사단의 맹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영적 전쟁 속에서도 땅에서 누리는 평안이 있다. 당신의 삶이 영적 전쟁 안에 있는가? 환란이 있는가? 그러면 반드시 하늘의 평안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 중에도 평안을 누릴수 있다. 그래서 영적 싸움이나  주님 주시는 환란을 포기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또한 평안을 누리기 위해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목자들처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한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그 분의 임재 안에 있는 안식을 더 누릴수 있다.

풀어짐

요한복음 11:37-44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나사로는 죽은 지 사흘이 지나 다시 살아났다. 예수님이 무덤 밖에서 나사로를 살아나오라 불러내셨을 때, 그를 장사 시 수족에 동였던 베와 수건이 얼굴에 싸여진 채로 무덤으로부터 걸어나왔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일러 수건과 베로 싸인 그의 몸을 풀어놓아 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살아났지만, 어떤 것에 묶여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사람은 내면에도 양면성이 있다. 선하고 평안해 보이지만, 한편  활화산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내면의 볼케이노는 풀어짐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풀어주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풀어줄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는 기도로 풀어주라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죄악으로 하나님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약 5:17). 그러나 3년 6개월이 지나 엘리야에게 비를 약속하셨다. 약속을 받았음에도 엘리야는 비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비 올 기미는 0%도 없었다. 왜 하나님은 비를 약속하시고도 엘리야가 7번 기도하게 하시고, 7번째 마저도 비 대신 손바닥만한 구름만 보여 주셨을까? 이 일로 크게 세 가지가 풀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엘리야의 겸손이 풀어졌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우상 숭배하는 제사장 850명을 모았다. 그리고 바알의 제단을 쌓게 하고 그들의 신에게 구하게 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엘리야도 자신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간구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린 불이 제단 나무, 제물 및 도랑물까지 모두 태웠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외쳤다. 그는 한 순간에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그 후 기도하는 것이 쉽게 응답받지 못하자, 그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고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기도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 내면에 겸손이 풀어지길 원하신다.

둘째. 사환의 긍정적 눈이 풀어졌다. 
엘리야가 사환에게 바다를 바라보라 할 때, 사환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고했다. 엘리야가 이른 대로 일곱번을 확인하러 가면서 사환은 포기하지 않는 엘리야의 믿음을 보았다. 그리고 일곱번째도 빗방울이 아니라 손바닥만한 구름 조각 하나만 보았다. 측량 불가능하고 무한한 하늘에서 손바닥만한 구름을 본 사환의 눈은 믿음의 눈이었다. 엘리야는 그 작은 구름을 보고 아합에게 비에 막하지 않게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라 선포했다. 상황이 좋을 때는 누구나 긍정적이고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안좋으면  부정의 심리도 드러난다. 사환은 부정적 상황에서 엘리야의 큰 소망과 포기하지 않는 긍정적 믿음과 기도를 보았다. 믿음의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낳는다. 이 때 이 것을 본 두려움에 쌓인 부정적인 주변 사람들의 소망이 내면에서 풀어지기 시작한다. 소망은 소망을 낳는다.

셋째. 선포가 풀어졌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 아합 왕에게 큰 비가 올 것처럼 미리 선포했다. 하나님은 손바닥만한 구름을 통해 엘리야로 담대히 선포하도록 풀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선포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주시는 단어를 붙들고 기도하라. 성령의 감동을 붙들고 선포하며 기도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선포한대로 행하신다.
예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믿음으로 준비하고 행동하길 원하신다. 부족함과 불가능과 부정적 상황 속에서 겸손이 풀어지고, 부정적인 사람들 내면에 소망과 긍정이 풀어지고 선포가 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바다 같은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출하는 용암과 같은 분노도 있고 아픔도 있다. 어떤 용암은 조용히 바다로 흘러들어 육지를 만들 듯 그 삶의 지경을 넓힌다. 반면 어떤 용암은 땅을 뒤덮고 파괴하듯, 분노로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스스로의 삶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어떻게 풀어지는가의 차이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분노가 풀어질 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족함과 위기의 부정적 상황을 통해 많은 것을 풀으신다. 당신이 처한 부정적 상황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받고자  하시는 당신의 태도와 믿음과 행동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번 사우스 다코타 선교를 통해 풀어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푸시고 계신가?

차고 넘치는 행복

요한일서 4:7-12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설교 요약>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하버드대 로버트 왈딩거 박사팀의 75년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결코 부와 명예 또는 노력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건 “좋은 관계’라는 사실이 그들이 발견한 가장 분명한 메세지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일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결과가 사실 조금도 놀랍지 않다. 하지만 왜 우리는 부와 명예를 위해 열심히 살면 행복해질거라는 허망한 거짓에 반복적으로 속으며 계속해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을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들을 아깝게 여기고,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자리로 오르는 것을 위해 우리들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걸까? 이유는 ‘죄’ 때문이라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죄가 우리에게 들어와 저지른 일이 사람간의 관계를 깨트리는 일이었다. 사람들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죄로 인해 깨어졌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깨졌고, 그 영향으로 인간 사이의 관계도 깨진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와 해결방법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바로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행복과 건강은 로버트 왈딩거 박사팀의 연구 결과처럼 우리가 맺는 '관계'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과 화목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두둔하거나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행위를 극히 혐오하신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법을 바꾸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일을 행하셨다. 악인을 의롭다 하시고, 의인을 악인으로 재판에 넘기시어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셨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한 인간이 모든 인류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식처럼 지으셔서 함께 그 분의 피조물들을 관리하게 한 아담의 가치를 대신할 피조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다 합친 가치를 가진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밖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두 가지 자격을 가진 유일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것이다. 단지 갈등이 없는 평화와 평안의 상태가 아니라 행복을 동시에 의미하는 화목제물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신 방법이라 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헷세드_상대방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
헷세드는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화목제물을 통해 죄를 짓기 전 아담의 신분과 권세를 회복했다. 이제 법적으로 신분이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화목을 이루었는가? 한 집에서 최소 몇 시간을 함께 보내는 가족이 일주일에 단 몇 분 정도만 대화를 한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화목하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서운한 점이 있는가? 하나님이 두려운가? 어떤 계기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을까? 기대하지 않는 마음, 마음을 터놓지 않은 태도가 그 분과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 삶에 어렵고 힘든 문제를 허락하실 때가 있다. 그런 때에 하나님께 서운하고, 원망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혹시 그 계기로 인해 하나님께 등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삶에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어려움을 허락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는데 그런 때에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 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여러분 중에 혹시 어떤 시련의 기억 때문에, 응답되지 않은 기도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이제는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길 바란다. 예수님을 만나고 풀어진 관계는 셀 수 없이 많다. 진정한 화목은 하나님과 먼저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함축적이고 분명한 계명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해야 이웃과도 화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