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가 무거울수록

누가복음 6:20-49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3단계의 사랑 중 1단계는 하나님에 대해 갈급한 영혼들이다. 20-22절에 보면 예수님은 영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하고 갈망하는 영혼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채워짐과 하늘의 기쁨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2단계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목말라하는 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과 어려움을 격은 단계를 의미한다. 3단계는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세 단계를 정리해보면 1단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2단계는 나와 나와의 관계, 3단계는 나와 원수와의 관계이다. 이 단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럼 당신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

이 불가능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3가지 방법들이 있다. 첫째는 자책감을 주려 함이 아니라 자책과 결별하게 하기 위함이다. 35절에 보면 “기대하지 말라” 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누군가가 내 공로를 인정해 주고 고마워 할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37절에 보면 “용서해라” 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이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된다. 38절에 보면 “헤아려라” 이다. 이것은 상대의 사정을 배려하는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헤아릴 때 우리의 영혼에 채워지는 기쁨과 생명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는 자책의 마음이 끼어들 공간이 없다. 둘째는 땅이 아닌 하늘의 복의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22절에 보면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 복이 있도다 말씀하셨는데 교인들은 이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어려움이 올 때 인간적인 분한 마음과 진실을 분별하기 전에 오는 죄책감, 그리고 성령의 핍박에 대한 기쁨의 감사와 상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단이 우리들에게 주는 속임수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분별하면 상급과 소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믿어야 한다. 셋째는 훈련으로 원상복구 되어지길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사랑으로 행하지 않은 이유 중에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얻고 훈련 받지 않기 때문이다. 40절에 보면 “온전하게 된자”는 “원상으로 복구시키다” 라는 의미이며 배우는 훈련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다. 그래서 기초가 중요하다. 1단계가 중요하다. 주를 향해 가난하고 배고파하고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울고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할 때 그 영혼은 2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과 충돌하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았도 기뻐하고 감사하면 반드시 3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지혜롭게 대처하며 기다리는 사람으로 변해 갈 것이다. 당신은 이런 3단계의 사랑을 하고 있는가?

48-49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 반면에 행하지 않는 사람은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3단계의 사랑을 하면 영혼이 견고해 진다. 내면은 더욱 담대해 지고 거룩해 진다. 결국 예수님 같이 된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눈에 선한 십자가

갈라디아서 3:1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설교 요약>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보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갈:3:1/새번역)   예수님은 A.D 33년 4월 3일 오후 3시 경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바울은 A.D 33-36년 사이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다메섹 회심 후 14년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갈라디아서에 말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을 전한 지가 길어야 2-3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주고 싶어하는 사랑이 가득했다. 그러나 갈라디아 성도들의 마음은 다시 완악해지고 옛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갈라디아 3장 1절을 보자. 갈라디아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 절기도 지키고 구약의 제사도 다시 지내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질된 삶의 열매는 다시 예수님 믿기 전에 드러났던 옛 삶의 태도들이었다. 성령의 열매나 육체의 열매는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한 가지 죄악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면 다른 죄악도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 한 가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다른 열매도 계속 따라서 드러나기 마련임을 말씀해 준다. 열매는 그 뿌리와 나무의 결과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완악해져 가는, 육신적이 되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의 은혜에 기반을 두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율법으로의 귀향 때문이었다. 외적으로 더 신령하고 거룩하고 타인보다 더 절제하고 금욕적인 삶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분별하기 어렵다. 신실해 보이고 특별해 보이고 경외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세속적이고 정욕적이고 서로 비난하고 경쟁하고 움켜쥐고 정죄하는 모습이 강하게 드러난다. 은혜는 반대다. 그 뿌리가 아직도 십자가다. 십자가가 눈에 선한 것 같은 마음은 얼굴과 행동과 삶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바울은 힘이 빠지고 낙담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다시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그들을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고백한다. 우린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다가 누군가가 다시 옛사람으로 율법으로 돌아가면 크게 낙심한다. 그러나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자처했다. 그럴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뿌리가 율법이 아니고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눈에 선한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바울처럼 세월이 지나도 십자가가 눈에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계속 율법이 아닌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죽음의 권세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자. 이 말씀에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씀이 현재 완료 수동태로 되어 있다. 우리 노력과 힘이 아닌 복음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매 순간 주님이 내 삶의 보좌에 않으시도록 내어드리라. 그럴 때 두가지 은혜가 임한다. 세상의 정욕을 내가 참고 죽이려 하지 않아도 세상의 유혹이 나에게 다가오다가 그냥 힘을 잃고 죽어지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the world had been crucified to me”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세상 쪽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세상 정욕을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서려 하는 욕망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상이 나를 보면서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세상의 권세를 잡는 사단이 우리 뒤에 있는 십자가의 권세, 예수님의 피의 권세를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죽은 자의 권세다. 변화된 삶은 노력한다고 되지 않는다.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복음을 듣고 십자가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할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산다. 그 다음부터는 그 죽음이 계속 권세가 되어 나의 정욕, 세상 자랑, 욕망, 육의 사람을 죽인다. 내 안에 사랑, 용서, 평안, 기쁨, 겸손, 소망, 비젼, 거룩, 절제는 살아나게 해준다. 이것이 죽음의 권세다. 당신 삶에 눈에 선한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십자가의 그 사랑이 눈에 선한가?

형제를 보게 하는 사랑 <1부> | 높은 부르심 <2부>

<1부 - 양정상 목사님>
요한 일서 3:12-19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부 - 배현석 전도사님>
에베소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설교 요약>
본문에 바울은 편지를 받는 자들은 성도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은 평안을 찾지 못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2014년 한 조사기관에 의하면 미국의 18세 이상 성인 중에서 무려 44.7%의 사람들이 정신관련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현대인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정신적인 스트레스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불확실성’(uncertainty)라고 합니다. 이 불확실성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외부적인 것과 내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부적 불확실성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볼 수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그 외부의 불확실성을 ‘믿음’이 필요한 영역으로 봅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장을 도전받습니다. 내적 불확실성은 그 크신 하나님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딸임을 확신할 때 해소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다는 것은 당시 어떠한 종교에도 받아드릴 수 없는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도 하나님을 절대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아빠로 두었다면 평안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라는 자신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확인시키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갈1:1)(롬1:1) 이뿐만 아니라 그가 기록한 13개의 목회서신 중에서 11개에서 자신이 사도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갖힌 자”이다. 이렇게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역시 본인이 누구인지 주님 안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밝힘으로서 서신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이토록 강조하면서 서신들을 시작한 것은 그에게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수많은 어려움들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겪었던 여러가지 폭력과 위험들, 셀 수 없는 고생스런 선교 사역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또 평생동안 독신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특히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 대를 이을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늘도 버린 저주와 같이 여겨졌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가치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봤다면, 그가 극심하게 좌절하고 우울해질 이유는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라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부르심을 굳건히 붙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세상의 어떤 낯선 사람의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세가지 호칭이 등장합니다. 사도, 성도, 그리스도 입니다. 이 중 ‘성도’라는 호칭은 사실은 굉장히 놀라운 호칭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는 장면이 나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귀신이 소리지르며 일렀습니다. (막1:24)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오늘 ‘성도’라는 단어와 똑같이 쓰인 ‘ἅγιος (하기아스)’입니다. ‘성도’라는 말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거룩한 자’랑 원어로 보면 똑같은 말인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이 모두 “거룩한 자”라고 말해주고있습니다. 그 정체성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 보다도 더욱 위대한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리고 볼 이름은 바로 예수님의 호칭인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인 크리스토스에서 왔고 그 의미는 ‘메시아’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를 가진 호칭이 되는가?(갈2:20)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우리 안에 예수가 사시는 삶 “작은 예수”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라는 말로서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입니다. 구원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구원자-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예수들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작은 그리스도들, 작은 메시아들! 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 작은 메시아들은 그들 앞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가진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그게 우리가 입은 옷이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반드시 기억하세요! 인생에 무게에 마음이 내려 앉을 때에 더욱 기억하세요!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하실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을 향한 십자가의 걸음을 시작하세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메시아 예수의 모습이 여러분에게서 환하게 빛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만나지는 은혜

빌립보서 4:19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설교 요약>
만나지는 은혜
빌립보서 4:19절에(NIV) 보면 meet와 glorious riches 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자.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데 어떻게 우리들을 만나 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신 사람들은 위로와 격려, 기쁨, 소망을 주며 우리들의 삶을 부여케 한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은 만남은 우리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채워지게 한다. 또한 그 사람들을 우리들의 삶 안으로 이끄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값없이 받은 예수님의 그 사랑과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과 희생, 목숨을 드렸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다. 그 만남은 감사로 시작한다. 그러나 한가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필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
누가 복음 17장 17절에 보면 10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다 깨끗함을 받지만 한 명에 사마리아만 다시 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하신다. 19-20절에 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하신다. 여기서 너는 그의 나병이 아닌 너 자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9명의 나병환자들의 필요는 채워졌지만 더 중요한 구원의 은혜가 아직 임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 후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을 주목하고 믿으면 병보다 더 중요한 영혼인 그 사람 자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를 통해서 삶의 필요는 채워졌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즉 감사한다고 그것이 구원 받은 증거는 아니다. 구원받은 증거는 감사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이 자신의 삶에 주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분만을 예배하며 그 은혜가 커서 누군가에게 그 은혜를 주기 위해서 고난과 희생의 일을 자원하는 것이다.

혼동
한 가지 혼동하지 말자. 병 고침을 받은 9명의 나병환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일반 은총은 받았지만 구원 받은 특별 은총은 받지 못한 것이다. 즉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영적 리더가 9명과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도 한번 받은 구원이 영원하다고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한번 받은 구원도 이후의 삶에 따라 다시 상실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은 결과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만약에 경고와 두려움으로 삶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하자. 그것은 두 가지 결과가 생긴다. 첫째는 구원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는 못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섬기게 된다. 둘째는 사랑 받았기 때문에 우러나는 헌신이 아니라 사랑 받기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감사의 능력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천국을 경험해도 내면에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인가? 라고 질문할 수 있다. 요일 4장 18절에 보면 구원을 받았어도 두려움 속에 살수 있다. 하지만 두려움에는 형벌과 고통이 있다 그래서 사랑하며 살라고 하신다. 그 두려움의 뿌리는 잘못된 추측을 통해서 우리들의 생각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그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온전한 사랑이다. 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감사해야 한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는 인생을 허비했고 아무것도 아닌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잘못된 추측들을 심어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잘못된 추측을 분별하고 감사해야 한다. 감사는 사람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운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보면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올 때 감사함으로 기도해라. 그러면 원수는 떠나갈 것이다. 감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기도로 감사하고 삶으로 감사하라. 둘째는 사람에게 감사하라. 말로 편지로 행위로 감사를 표하라.

깊음과 얕음

누가복음 6:12-19
12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13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 유다이다.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18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몰려온 사람들이다. 악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다. 
19 온 무리가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다.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와서 그들을 모두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보여주고 싶은 천국

요한복음 3:1-8/16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설교 요약>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저녁에 예수님에게 나왔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당시 최상류층 사람이었다. 니고데모는 은밀히 아무도 모르게 저녁에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수 없음이니이다'(요3:2) 그의 말속에서 예수님을 높이고 칭찬하는 것을 엿볼수 있다. 그러나 이런 칭찬의 말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요3:3)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칭찬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에게 두가지를 간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첫째. 너는 거듭나지 못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거듭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가를 알게 해준다.

거듭나야 하는 이유 -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당신은 당신이 본 어떤 아름다운 나라나 장소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질것이다. 나는 하와이 이야기 열방대학 이야기를 종종한다. 그곳을 생각하면 열정이 타오른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큰 기쁨과 은혜와 치유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느끼고 만져 본 곳이기에 표현이 생생하다. 그곳에는 두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아름다운 자연이다. 잉크빛 바다와 열대아 나무와 완벽한 날씨이다. 둘째는 보이지 않는 기쁨과 치유와 은혜와 평안이 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두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으로 알고있다. 둘째. 니고데모를 많이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오늘 크로스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맛본 '천국'에 당신도 들어오길 바라는 소망때문이다. 그럼 그 천국을 어떻게 들어갈수 있을까? 그 천국은 바람같은 성령을 통해 들어간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 요한복음 3장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의 실체는 눈으로 볼수없다. 그러나 결과는 볼수있다. 따라서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해서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하셨다. 하나님의 존재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심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말 중요한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바람처럼 존재하신다.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한 것은 진리다. 성령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인격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보게 하신다. 요한복음 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 죄를 회개케 하신다. 그 바람같은 성령은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오로라 처럼 아름답게 승화 시키신다.성령은 예수믿는 후에 짖는 죄를 찔리게 하시고 새롭게 바꾸신다. 성령은 지구의 자전 공전 속도 보다 더 빠르게 하나님의 임재안으로 우릴 데리고 들어가신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에 아무소리 안들려도 하나님의 임재를 영혼으로 보고 느끼게 해주신다.

내가 존경하는 미국의 선교사 한분이 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브레이 너드 다. 그는 1718년 커네디컷 에서 태어났다. 그는 9세때 아버지를 잃고 14살때 어머니를 잃은 외로운 소년이었다. 방황끝에 21살에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일에서 공부하던 중 자신의 생애를 인디언의 영혼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1743년 그의 나이 24살에 인디언 선교사가 되었지만 그는 움막의 짚푸라기에서 자야했다. 옥수수 죽을 먹고 길을 잃어 온 밤을 늑대가 우글거리는 숲에서 자야만 하는 날들을 보냈다. 결국 피를 토하는 폐결핵에 걸려 몸이 쇠약해 져갔다. 그러나 29살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갔다. 선교2년동안 인디언들은 그를 조롱하는것 처럼 전혀 변하지 않았고 죄악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런중 그가 절망중에 복음을 전하던 어느날 놀라운 성령의 부흥이 그 마을에 일기 시작했다. 그때의 한 상황을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회중위에 강하고 급한 바람처럼 내리는 것 같았고 모든 사람이 그 앞에서 놀라 엎드러지고 말았다. 나는 그 영향에 놀라 그저 서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다 사로잡힌 것 같았고 마치 앞에 무엇이 있든지 다 쓰러뜨리고 휩쓸어 버리는 강한 폭풍과 엄청난 대 홍수의 저항할수 없는 큰 힘과 비교할 만했다.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서로 관심을 가지고 구부리고 앉았고 그 놀라운 사실의 충격에 견딜 사람이 없었다. 중년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여러해 동안 술꾼으로 지내던 나이 많은 사람들과 6-7세 밖에 안된 조그만 아이들 까지도 자기 영혼에 대한 깊은 고뇌를 느끼고 있었다. 이제 가장 고집이 센 사람이 수그러지고 있었다. 그 전만 해도 스스로 의롭고 안전하다고 자랑하며 어떤 인디언들 보다도 아는 것이 많고 자기도 과거에는 10여년간 그리스도인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고 자신 만만하게 말하며 자기의 상태는 양호하다고 호언 장담하던 인디언 추장이 이제 와서 자기 영혼의 상태를 보고 심각하게 염려하며 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또 한 사람도 나이가 든 사람인데 살인자요 마술사에다가 악명 높은 술 주정뱅이 였는데 그가 눈물을 펑펑 쏱으면서 용서를 구하며 자신이 처한 위태한 사실을 볼때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수 있겠느냐며 오히려 투덜거렸다. 집 구석구석에서 사람이 모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고 문 밖에서도 또 여러 사람이 가지도 못하고 서 있지도 못할 정도였다. 사람들 마다 자기 영혼에 대해 심각한염려를 하게 되었고 자기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저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이것이 바람같은 성령이시다. 당신은 거듭났는가? 천국을 맛보고 있는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거듭나고 천국안으로 들어온다.

선교는 누가 왜 하는가?

고린도전서 12:12-26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설교 요약>
* 1995년부터 아마존 선교를 시작하신 강광수 선교사님의 말씀입니다.

선교는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그 사명에 미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체인 우리가 하는 것이 선교이다.

브라질 아마존은 어떤 곳인가?
아마존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다. 브라질의 아마존 우림은 7 million km2 로 미국의 본토 지역과 맞먹는 사이즈이다. 이곳은 지구의 열대우림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 지 구 산소의 20% 이상을 생성한다. 그래서 지구의 허파라고도 불린다. 날씨는 6월에서 8월이 겨울, 12월에서 2월이 여름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아마존은 대체로 덥고 습하며 평균 온도는 23에서 29도이다. 안데스 산맥에 인접한 아마존 숲은 연간 4,000 mm로 엄청난 양의 비가 내 린다. 우기 (1월-4월)에 내리는 비는 상대적으로 기간은 짧지만 양이 많고 종종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다. 남미의 아마존 강은 나일강 다음으로 지구에서 두번째로 큰 강이다. 아마존 사람들 은 이 강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는다. 거주하기도 하며, 먹을 것을 강으로부터 얻고, 생활의 모 든 공급원이 이 아마존 강이다. 아마존 사람들은 소규모의 집단을 이루며 생활하고 다산으로 인해 계속적으로 인구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유아들이 유아기에 사망하기 때문에 일 정하게 그 수가 유지되고 있다.

아마존에서는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 이 세 나라가 만나는 곳에서 ‘삼국경 신학교’를 운영 하고 있다. 180 acre (21만 6천평)의 땅을 사서 4년제 현지 지도자 양성을 위해 학교를 설립 하였다. IeFaM (Igr ej a Evangél ica Tr ês Fr ont eir as Amazonas) 라는 교단을 세우고 이 것을 협력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재정적으로 독립된 기관 PSI 를 세워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 하도록 하였다.

2030년까지 이 신학교를 통해 150명의 현지 지도자를 양성한다라는 미션으로 현재 사역에 임 하고 있다. 그들이 100개의 교회를 세우고 1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농장 사역을 통해서 경 제적으로 자립하는 단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삼국경 신학교는 2005년 6명의 현지 학생을 데리고 시작하여 현재 3명의 풀타임 목사님이 교육하고 있으며 작년에 40명의 학생들 을 졸업시켰고, 올해는15명의 소수의 학생들을 데리고 운영하고 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 니라 어떤 학생들을 어떻게 키워내는가가 더 중요하다.

기도제목:
1) 여자 신학교와 도서실 건축을 위해
2) 후방교회와 연관해서 새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3) 팀 사역을 위한 헌신적인 젊은 청년들이 많이 모일 수 있도록
4) 아마존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때까지 사역이 이어질 수 있도록

떡과 칼

누가복음 6:1-11
1 한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 
2 그러자 몇몇 바리새파 사람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주렸을 때에, 다윗이 한 일을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4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거기에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다.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섰다. 
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물어 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10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서, 그 사람에게 명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11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설교 요약>
안식은 하나님이 지치고 피곤해서 쉬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것을 즐기고 그것들로 찬양받으시고 예배받으시기 위함이다. 안식일의 2가지 축복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을 체험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오른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바짝붙어 안식일에 일하는가 고발하기 위해 엿보고 있었다.예수님이 손마른자의 손을 고쳐 주시고 누가복음 6:9 처럼 이렇게 말씀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누가복음 6:11처럼 반응했다. 예수님과 이 사람들의 안식일이 대조적이다.이 치유를 통해서 창세기에 하나님이 제 7일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고 예배하도록 복주신 그 원래 목적이 회복되지 않았는가? 오늘도 이 복된 날에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을 기대하며 나올때 그분은 치료의 하나님으로 만나주신다.

둘째. 떡과 칼이 주어지는 날이다
구약에 다윗이 사울에게 시기를 받아 억울하게 쫒기고 있었다. 다윗을 따르는 부하들과 동료들은 배가 고파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놉이라는 작은 마을로 숨어들어 갔다.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모두 배가고파 기진맥진에 있으니 먹을것좀 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아히멜렉은 하나님의 성전에 매주 안식일에 드리는 진설병이라는 떡을 다윗과 그의 일행에게 주었다. 그러나 성전에 하나님께 드려진 고기나 진설병 떡은 제사장 들만 먹을수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먹으면 죽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다윗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하지도 못했다.그러나 하나님은 억울하게 쫓기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 법을 어겼음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윗은 진설병을 먹고 창이나 칼은 없냐고 아히멜렉에게 물었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전에 골리앗을 죽인 칼이 보자기에 싸여 제사장이 입는 예복 에봇 뒤에 있다고 했다. 사무엘상 21:9 말씀처럼 다윗은 그것이 최고의 무기라고 말한뒤 그것을 가지고 떠났다. 골리앗을 죽인 칼을 다시 찾은 말씀도 큰 영적 의미가 있다. 다윗은 전에 하나님만 의지했다. 그 믿음이 자신보다 거대한 도저히 무너뜨릴수 없는 골리앗을 무너뜨렸다.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속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그의 영혼을 점점 약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에서 떡과 칼을 다시 돌려 받은후 다윗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이 무엇일까? 떡과 칼이 주어진 이후

첫째. 강한군대를 이루었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은 떡과 칼을 받은 직후 사울이 두려워 자신이 죽인 골리앗의 나라로 피신해서 가드왕에게 나갔다. 신하 몇명이 다윗을 알아보자 다윗이 미친척을 했고 다행히 그곳에서 탈출했다. 다윗은 아둘람 굴로 도망했다. 거기에서 환난당한 자 마음이 원통한자 빚진자들이 그에게 몰려와400명의 큰 군대를 이루게 되었다. 사무엘상 22:2을 보면 이것이 다윗이 다양하고 다루기 힘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하나님 나라의 용사로 세우는 지도자가 되어감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의 날에 떡과 칼을 받아 세상에 나가도 우왕좌왕 흔들릴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고 점점 그리스도인으로서 강함을 갖게된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어도 세상에서 안된다고 쉽게 칼과 떡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둘째. 고난의 상황속에서 고난의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사무엘상 23:2-3을 보면 다윗은 즉시 하나님께 순종했다. 사무엘상 23:5말씀에 따르면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다. 다윗은 지금 사울의 대군에 쫓기는 상황이다. 자신의 군대는 갓 조직된 400명의 오합지졸 뿐이었다.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동족들 그일라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위험보다 그들의 생명을 더 먼저 생각했다. 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백성을 블레셋으로 부터 구원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다윗만을 쫓는 사울과 대조적이다. 다윗은 상황을 주님 음성으로 동일화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황을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주의 날에 떡과 칼이 회복되면 자신의 상황이 고통스럽고 어려워도 주변의 고통스럽고 어려운 영혼들을 풀어줄수 있는 힘이 생긴다.

셋째. 자신이 사랑을 준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했다
사무엘상 23:13에 따르면 한가지 놀라운 것은 자신이 구해준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에게 은혜를 악으로 갚았다. 그러나 고난가운데서 고통스런 사람들을 도와주는 시간동안 400명에서 600명의 군대로 더 늘어나 있는 것을 보여준다. 기대할 만한 사람들은 도움이 아니라 해를 주고 기대치 않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기대치 않은 시간에 우리를 도우시고 채우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떡과 칼로 사는 자들에게 어떤 보상을 하실까?
(시편 57:2)하나님은 다윗에게 소망과 확신을 주셨다. (시편 57:5)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에 온 열방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는 거룩한 열정을 부어주셨다. (시편 57:7)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믿음과 찬양의 마음을 주셨다. 시편 57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소망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최고의 보상중에 하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 으로 채워지는 마음이다. 소망은 기쁨을 낳고, 기쁨은 감사를 낳고, 감사는 성취를 낳는다.

주의 날은 떡과 칼을 받는 날이다. 떡과 칼은 ? 
1) 강한 하나님의 군대를 일으킨다.
2) 고난속에서 고난받는 자를 풀어준다.
3) 자신이 구해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해준다.
4) 소망의 보상을 받는다. 

새 부대

누가복음 5:35-39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설교 요약>
새 옷과 새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헌 옷과 헌 부대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정신인 사랑을 놓치고 자신들의 잘못된 해석으로 만든 인간의 전통임을 알려 주신다. 따라서 새 옷과 새 포도주는 율법을 완성케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셨고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이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낙심한 베드로와 외로운 삶을 살던 나병환자, 평생 누어서 삶을 연명했던 중병병자에게 예수님은 다가갔고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것이 바로 조건없은 사랑, 거룩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신 아가페의 사랑이다. 빌보드 차트 hot100 중에 10위에 오른 BTS의 Fake Love를 통해서 세계의 젊은이들이 진실된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들의 내면 속에 있음을 증명한다. 진실된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며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럼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고 거짓 없는 진실한 사랑을 하려면 아가페의 사랑을 만나야 하며 그 속에서 성화되어야 한다.

새 부대
첫째는 거듭남이다

새 옷과 새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서 이것이 사랑의 율법인 것을 안다. 그럼 새 부대는 무엇인가? 새 부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통은 양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만든다. 즉 새 부대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려면 먼저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 니고데모와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베드로, 백부장도 모두 예수님을 믿을 때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새 부대가 되었다. 새 부대 안에 거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거부한다면 그 안에 있는 영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새 부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5가지 특징을 보이는 거듭난 사람들이다.
1-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아드린다.
2- 형제, 자매들을 사랑한다.
3-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고 육체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다.
4- 세상을 이긴다.
5-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둘째는 가치 있는 말과 삶에 집중한다
새 포도주는 성령님으로 비유된다. 오순절 성령사건 이후로 계속해서 사도들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교제하고 서로의 것을 나누고 기도와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 오신 것이다. 요점은 부어주신 새 포도주는 누군가를 위해서 가치 있게 사용됨으로 새 부대가 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새 부대가 메말라 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여름철의 시냇물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것은 속이는 시냇물이다.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거나 속이는 시냇물이 지속될 때 그 화살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당신의 삶에 속이는 시냇물은 무엇인가? 재정, 가족, 직장, 친구, 하나님의 사람들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

예레미야 15장 19절의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는 가치 없는 말이 아니라 가치 있는 말씀을 전하라
즉 하나님은 속이는 시냇물 같은 사람이나 상황들을 만날 때에도 가치 있는 말씀을 전하며 살라고 하신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 삶의 거짓과 속임의 언어, 행동들을 골라내고 스스로 더 깊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시간으로 삼을 수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속이는 시냇물 같은 시기에 더욱 가치 있는 금과 다이아몬드로 바꾸고 계신다.

둘째는 사람들을 쫓지 말고 그들을 돌아오게 하라
가치 있는 말씀을 전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면 진리가 새 부대에 가득 채워진다. 진리로 내면에 채워지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면 우리의 내면에 진리로 채우는 일에 더 많은 마음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우리의 내면에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채워질 때 우리는 사람들을 연연하며 쫓아가게 된다. 우리의 영혼이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면 그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입으로 삶으로 전달하게 된다.

그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삶을 하나님의 입이 되게 할 것이다. 당신은 새 부대가 되어가고 있는가?

예수님처럼

누가복음 5:27-35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설교 요약>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심을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위대한 성자 정도로 본다면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갈등이 생기면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까지 정죄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면 변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세리 레위를 통해서 예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예수님의 관심
첫째는 죄인의 회심- 가버나움에 살던 레위는 이미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알고 있었지만 삭개오처럼 예수님께로 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세금을 부당하게 거두는 세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 27-28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를 부를 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말씀을 보면 베드로, 나병환자. 중풍병자 그리고 레위도 예수님을 만나 모두 죄 사함을 경험했던 죄인들이었다. 또한 교회는 죄인들이 오는 곳이며 자신들이 죄인 됨을 보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경험하고 거듭나는 곳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한 영혼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는가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심이다.

둘째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것- 29절에 보면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연다. 즉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영혼이 기뻐하게 된다. 누가 복음 15장에 양 백 마리가 있는 목자가 한 마리를 잃고 찾았을 때와 열드라크마 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여인 그리고 목자는 가장 먼저 잔치를 벌였다. 이것이 하늘의 천사들의 기쁨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며 예수님의 기쁨인 것이다. 레위의 기쁨과 잔치는 그가 만든 기쁨이 아니고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음 맛보는 기쁨인 것이다.

셋째는 죄인의 회심이 죄인들의 나아옴으로 이어지는 것- 29절에 보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죄인을 부르시고 사랑을 주셨는데 그 한 사람 레위를 통해서 수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회심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예수님의 관심이다. 그러나 이런 기쁨과 영혼이 성령충만할때 그것을 방해하는 세상의 소리가 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언인지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통해서 보자.

내면에서 비방의 소리가 들릴 때
첫째는 죄인들을 병자로 보라- 30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한다. 이 비방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소리지만 우리의 내면에도 이런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죄인들끼리 서로 이해할 것 같지만 그들 사이에도 죄의 등급을 정하고 서로를 무시한다. 이럴 때 우리의 내면에는 네가 뭐가 부족해서 이런 죄인들과 상대하니 라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같은 병자들을 고치시기 원하셨다. 즉 죄인들을 병자로 보고 그들에게 의사가 필요함을 인정하셨다. 그럼 우리들 마음에 불쌍한 마음, 즉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둘째는 혼인 집 손님으로 보라- 33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금식하지 않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식탁에 몰려온 죄인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보았다. 당시에 혼인잔치는 우울과 슬픔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서 어떤 임금의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종들이 길가로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는데 잔치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어두운 곳으로 쫓아내는 기준이 선한 자나 악한 자가 아닌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인 것이다. 바로 이 예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과 은혜의 옷인 것이다. 나는 택함을 받았는가의 기준은 단순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의복을 입는 것이다. 이 의복의 의미는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음을 의미한다. 즉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선인과 악인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는 삶이다.

주께 나올 수 없을 때 나오라

누가복음 5:12-26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설교요약>
예수님이 한 동네에 계실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와 엎드렸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나병환자는 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 나타날수 없게 되어있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올수 없는 2가지 불가능한 장벽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나병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병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수 있는 위험한 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께 나올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꾸짖지도 않으셨다. 많은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13절에 보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라고 기록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손을 쉽게 대실수 있는 가까운 거리까지 나병환자가 온것을 알수있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삶의 문제가 너무 크고 힘들다 보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올 힘조차 상실하게 될때가 있다. 주님께 가기도 전에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거나 영구적인 해결이 안될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나병환자의 풀수없는 불치병 문제를 풀어주신것을 주목해야 한다. 24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 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예수님께 나가도 이 문제는 절대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거야 라는 산같은 문제는 무엇인가? 그러함에도 주님께 나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말을 한마디 사용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보신다. 이제 당신은 예수님께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수 있다. 그럼 어떻게 나가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될것이다. 

첫째. 솔직하게  나가라 

나병환자도 중풍병자도 또 다른 공통점은 자신들을 감추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간것이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 그럴듯한 옷이나 장식품을 구해 가릴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운 나라기에 태양을 가리기 위해 긴 세마포 치마 같은 것을 입는 나라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사람처럼 어느 정도는 위장할수 있었다. 중풍병자는 늘 자신이 드러누어 있던 그 침상에 누운채 예수님께 나왔다. 따라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는 보기 힘들고 악취나는 모습 그대로 나왔다.이 사람들 자신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었을 것이다. 예수님께 나올때 침상도 흉칙한 자신의 모습도 감추지 말아야 한다. 나병에서 정결케 된 사람은 몸의 털을 모두 밀고 물로 몸을 씻고 처음으로 이스라엘 진영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자신의 텐트(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7일 동안 야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진영안에 즉 교회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7일 야영은 그의 삶을 성결케 하는 시간들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집을 떠나 마음껏 집없이 떠도는것을 자유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반대다. 진정한 자유는 집안에 있다. 가장 자유로울 때는 집안에 있을때다. 우리의 영혼의 집은 교회다. 천국이다. 이때 우리의 영혼은 가장 자유하다. 이 집 안에서 우리는 반복해서 몸을 씻고 잘라낼것을 잘라낸다. 7일째 다시 몸을 씻고 옷을 빨고 머리카락, 수염, 눈썹까지 모두 깍아내게 한다. 두번째 씻음과 잘라냄이다. 계속적인 성화를 의미한다. 특히 골방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서로의 나눔을 누설하지 않는 소그룹이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도 솔직한 나감이다. 혹은 자신의 상황을 진실하게 나누며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하늘의 문을 여는 솔직한 태도다. 병이 낫기를 위해서는 첫째,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고 둘째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둘째.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선함을 바라보며 나가라 

사람들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을 금기시 했고 그런 생각조차 부정하게 여겼다.나병환자가 가까이 오면 돌을 던지며 증오하고 조롱했다. 그런데 오랜세월 나병을 앓으면서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산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이 사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절망' 이라는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예수님께 원망과 증오의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수 있나이다 하니'(12절) 라고 고백했다. 이 말속에는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이라는 뜻도 들어있다. 이것은 자신이 앓고 있는 이 병도 주님의 지배아래 있고 섭리아래 있음에 대한 고백이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마음도 예수님에 대해 그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긍정적이고 선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할수 없는 반응이었다. 나병환자도 중풍병자를 데리고 사람들도 공통점은 그 생각이 소망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꼭 고쳐주실것이라는 선한 이미지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 줄것이라는 선한 이미지가 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기뻐하신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부정적이고 쓴뿌리로 가득한 사람들의 내면을 먼저 바꾸신다.예수님은 나병환자가 오기전에 생각한 대로 아무도 손대기 싫어하는 나병환자를 거침없이 즉시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그리고 '내가 원하니 깨끗함을 받으라'(눅:5:13)  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가 생각한 대로 깨끗함을 받았다. 중풍병자는 그의 친구들의 생각대로 죄사함을 받았다. 그리고 침상에 의해 지배받던 그가 자신의 침상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도 그것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 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5:26) 한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주께 나가면 그 영광은 더 멀리 더 높게 더 오래 확장된다.  친구들이 예수님을 생각한 대로 되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병든 친구를 메고온 그 선함을 볼때 그들은 아마도 뜯은 지붕을 다시 더 튼튼히 고쳐주고 갔을 것이다. 

주께 나병환자 처럼 중풍병자 친구처럼 주께 나올때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볼것이다.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것이다. 누군가 당신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것이다.

벽을 허문 삶

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설교요약>
삶의 벽을 쌓는 사람들의 4 가지 특징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지만 주님을 사랑하거나내면에 그 은혜가 스며들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증상들이 나타난다. 첫째. 자신의 일용할 양식과 예수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베드로와요한의 무리처럼 수입과 생존에 필요한 공급에대해서는 예수님은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 분이라고 단정짓고 바라보지 않는다.  둘째.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보다 자신들의 수익이 더 관심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며칠전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바다에서 고기잡고 그물을깁고 있을때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람을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바로 옆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셋째. 주님을 한결같이 따르지 않는다. 네째. 아무리 수고해도고기가 없다. 그물은 천국과 같다고 했다. '(마:13:47) 그물에 고기가 채워지듯 마음에 천국이 채워진다. 그런데 아무리 이땅에서 성실하게 수고하며 살아도 주님이 없으면 그물에채워짐이 없다. 

3년 후의 삶의 3가지 특징 
3년 후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첫째. 배에 7명의 제자들이 타고 있었다.  예수님을 판 가롯유다를 제외하고 11명 중에 7명이 한 배에 타고 있었다.  3년 전 에는  배가 두대였고  각각의 배에
베드로-안드레 요한-야고보가  타고 있었다. 그 당시 어선의 장비가  비쌌기 떄문에 어부들은 보통 협동조합에서 동업자들과 함께  일했거나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가족들이 함께 일했다고 한다. 고기를 잡았을때 그것의 수입을 나눌 사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제자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도우며 가족보다도 더 진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베드로는 배와 고기를뒤로하고 새벽 바다에 뛰어들었다. 3년전 베드로는 예수님이 옆에서 말씀을 전하는데도 바라보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자신이 원했던 고기를 많이 잡았음에도 그것보다 예수님이 보고싶어 차가운 새벽 바다로뛰어 들었다. 
셋째. 영혼을 낚는 어부의 마음이 있다. 3년전베드로는 사람보다 고기에 관심이 더 많았다.그런데 뭍에 올라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사랑하느냐' 라고 하실때 '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했다. 그때 주님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3번에 걸쳐 말씀 하셨다. 이것은 문자적인 동물 양이 아니라 한 영혼을 양으로 비유한 것이었다. 

3년전과 삶이  달라진 이유 
채워짐 
베드로는 채워짐을 경험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예수님과 잃어버린 영혼들에 관심없이 영혼없는 얼굴로 그물을 씻고 있을때 그에게 먼저 다가 가셨다. 그리고 그의 배를 바다에 띄우라고하셨다. 그리고 그 배에 올라타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내면의 그물이 채워지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육신적인 필요도 채우셨다. 3년후에는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던지라고 하는 곳에 던지면 사방의 물고기들이 그 그물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잡혀진다. 고기는 잡는것이 아니라 잡혀지는 것을 베드로는 그날 이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다.
찢어짐 
베드로는 찢어짐을 경험했다. 베드로가 3년 후에 바뀐 또다른 이유는 채워짐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베드로는 이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순종했을때 그물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그물이 찢어지는 것도 같이 경험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때로 모두 빠져나가버리는 경험을 할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다시 우리 삶에 채워지고 얻어진것이 나의 능력이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배우게된다. 우리는 주님 주신 것이 다시 찢어지는 경험을 할때 이 찢어짐을 통해 두가지 반응을 주께 드려야 한다. 


주께 드릴 두가지 반응 

첫째.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것 
히브리서 5장8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겸손의삶을 사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원하신다. 순종은 내가 원한 정반대의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라도 거룩한 삶으로 간구했다 
히브리서 5장7절을보면  예수님은 거룩 그 본체셨다. 그럼에도 인간의 몸을 입고 어떻게 살고 기도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주셨다. 심한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기도했다. 특히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거룩한 삶, 경건한 삶, 신실한 삶을 추구하셨다. 

다른 삶

누가복음 4:38-44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40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히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설교요약>
베드로의 변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가정에 풀리지 않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셨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물과 배와 고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른 사실에 주목하지만,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어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회당에 들어간 일이다. 베드로가 아무리 예수님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하고 따랐다 하더라도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 예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계속적인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희생은 베드로의 또 다른 자기 자랑과 자기 의가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변화는 그가 주를 위해 무엇을 포기했나에 있지 않고 예수님이 어떻게 그의 내면을 진리의 말씀으로 채우고 영혼을 회복시켰나에 기초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면 삶은 점점 걱정과 근심과 고통의 올무에 얽매이게 되어 불행해 진다. 반복해서 주님의 말씀과 은혜를 받는 것에 집중하라. 그러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보일것이다. 우리의 삶의 키를 내려놓지 않으면 하늘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닌, 땅에서 오는 것으로 채워진다. 주님은 우리 직장, 가정, 인간관계, 애매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짊어 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계속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내어 드리기 위한 예수님의 삶의  원리
첫째. 모든 사람들을 사역의 대상으로 보라.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나와 왜 갑자기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께 시몬의 장모의 병을 고쳐달라고 아주 절박하게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님을 위해 애걸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해가 지고 있는 시각에도 마을로 들어가서 자신의 일처럼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다. 평생 고통받는 사람들이 치유되어 천국을 누리기 원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때 우리의 것을 희생하고 넓은 가슴으로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며 산다. 그러나 어떤 때는 반대로 누군가에게 유치해 지고 이기적이고 나의 권리를 요구하며 불평하고 미움을 갖으며 다시 나의 자아가 살아난다. 중요한  이유  한가지는 누군가에게는 주는 것 보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역의 대상으로 대하셨다. 그들로 부터 무엇을 받으려고 하거나 기대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냥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사람을 우월감 없이 사역하는 마음, 일일이 예수님 처럼 나의 손을 얹어 주어야 할 존재로 생각하고 대하면 우리의 내면이 채워짐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 거룩한 일의 중심에서 어둠의  존재들에게 높임 받고 인정받는 것을 거부하라.
계속해서 하늘의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둠에 의해 인정받고 높임받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단수)의 졸개들(귀신들-복수)이 자신을 알아보고 소리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때 그것을 꾸짖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높이는 것으로 혼동할수 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던 마귀는 예수님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동안 떠났다고 했다. 사람들의 높임 받고 싶어하는 죄악 된 본성은 때로 그것이 어둠이고 악한것을 안다해도 그런 것과 결탁하고 자신의 삶의 일부를 내어준다. 사람들은 지극히 거룩한 영적인 일을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죄악된 본성이 끓어 오를수 있다. 거룩한 사역의 한 중심부에도 사단은 자신을 드러내고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자극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세상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많은 어둠의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한다.

셋째, 사람들이 원하는 때를 쫓지 않으시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때를 따라 사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전날 저녁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와서 축복을 받게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마음속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조종하려는 미성숙이 함께 존재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만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수많은 군중을 뒤로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복음으로 풀어주고 축복하기 위해  새로운 장소를 향해 떠나셨다.예수님의 결정의 기준은 자신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셨다. 세상의 대다수는 자신의 유익을 따라 얼마든지 모든것을 결정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 마져도 기회주의적인 삶을 쫓아가곤 한다. 언제든 사랑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때를 묻지 않고 버리고 자신의 명성과 삶에 물리적인 유익을 주는것은 주저하지 않고 덥석 문다. 그러나 이런 삶의 마지막은 큰 고통으로 자신을 스스로 찌르는 결과를 낳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3가지 점검
1) 좋은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기다린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 오지 않는것을 경험하고 크게 실망하고 낙심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따라사는 사람은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것을 기대한다. 당신이 그토록 원했는데 분명하게 눈에 볼수있도록 주지 않는것이 있을것이다. 그때 다시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것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살고 있는 것이고 당신 믿음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 때에 맞는 것을 주실것을 믿는다.
때에 맞는 것은 주변 것들과 조화를 이룬다. 주변 사람들과 여건에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인위적인 창조는 주변 것들과 계속 마찰과 분리와 상처와 불쾌함을 남기게 된다. 따라서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주변의 정황과 사람들을 계속 무시하지 않고 살피는 삶을 산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때를 구하며 사는 사람이다.

 3) 추수할 열매가 있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때에 맞게 어떤 것을 주실 때에는 어떤 열매가 드러난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연결되고 그분으로 부터 축복을 받는 열매들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더 큰 열매들을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거절과 사모함

누가복음 4:14-37
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설교요약>
그리스도인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는 첫째, 승리 후에 더 깊은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사적인 영광”을 모르기 때문이고 둘째, 승리한 자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공적인 영광”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적인 영광
저자 요한의 청년 때의 믿음을 가장 성숙한 위치에 두고있다. 청년 믿음은 먼저 싸워서 강해진 믿음이다. 전쟁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실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 보다 더 강하고 담대하다. 청년 믿음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내면에 거하고 있다. 늘 죄사함 받는 것에 머물러 있는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아비의 믿음으로 나가야 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는데 정작 영적인 공격이나 분별력은 점점 떨어져 어둠과 유혹에 잘 속는 노쇠해 지는 아비의 믿음에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흉악한 사단을 분별하고 파괴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이 어둠의 영혼과 세상 가운데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되는 청년의 영성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아이의 믿음에서 아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에서 청년의 믿음으로 계속 성숙해 가면 더 큰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청년의 믿음을 가지고 사단의 유혹과 공격을 향해 싸워가다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내면 안에서 온전해 진다. 온전 하다는 것은 그 사랑이 더 깊어지고 더 예수님 같은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우리 안에서 사단의 유혹을 대적하고 죄와 싸워 이기면 이길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우리 안에서 더욱 커지고 그 사랑은 두려움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모든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영적 싸움을 그치거나 포기하지 청년의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다. 

공적인 영광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셨고 가장 먼저 회당에 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회당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시기에 짐승으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없어 성경 봉독과 강해 및 기도, 그리고 축도로 예배를 드리는 데에서 유래했다. 저자 누가는 예수님이 들어간 회당을 두 지역, 나사렛  회당 사람들과 가버나움의 회당 사람들을 비교하며 소개한다. 나사렛 회당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강퍅한 마음을 가졌고,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으나, 그분의 외적인 출신성분 때문에 거절했다. 그리고 심지어 화가 나서 그 동네 산 낭떠러지로 끌고가 밀쳐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갇히고, 눌리고, 보지 못하고 가난한  영혼들을 살려 주시려고 그곳에 가셨는데 단 한사람도 그런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했다. 반면, 가버나움 회당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모했고,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골방의 불은 사방으로 퍼진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혼자였지만 그 광야의 불이 가버나움으로 흘러왔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화려하지 않고 소수만이 모일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모임이 성령에 붙들렸다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런 모임들은 또 다른 영혼들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일으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 되리라'(눅10:3) 광야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광야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면 외로운 모임, 작은 모임이라 할지라도 그 불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곳으로 퍼져 나간다. 하나님은 오늘도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들을 부어 주시고 또 부어 주신다. 그 불은 또 다른 곳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당신은 거절 하는가? 사모하는가?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1부> | 은혜 받는 감람나무<2부>

<1부 - 배현석 전도사님>
마가복음 5:1-20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2부- 양정상 목사님>
나훔 1:9-15
9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설교 요약>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다. 나훔은 남 유다 요시야 왕 때 선지자였다. 요시아는 8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우상을 버리고 성경을 정리하는 종교 개혁을 통해 남 유다 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나라로 회복 시켰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남 유다도 두 번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이 당시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였으며, 남 유다의 히스가야는 하나님이 기뻐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히스가야가 우상과 산당을 없애는 것을 보고 앗수르 왕은 히스가야가 마치 자기 신을 부순다고 여기며 비웃었다. 그러나 3천년 동안 강국이던 앗수르는 작은 남 유다를 결코 함락하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인들이 서로를 해치도록 교란시키시어 185,000명이나 죽이셨기 때문이였다. 나훔서 3:17의 기록처럼 앗수르는 1845년 발굴 전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던 나라였다. 또한 나훔의 예언대로 그 시대 최강국이던 앗수르에 대한 심판이 성취되었으며, 이 일은 억압받던 남 유다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곧 앗수르의 멸망은 남 유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되었다.

 바울 또한 로마서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사단으로부터 건지고 사망에서 해방시키심을 아름다운 소식이라 일컬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단을 심판하시며 우리를 구원함에 있다. 하나님의 성품엔 공의와 사랑(은혜)이 공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았기에 그 분의 공의를 실감하지 못한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지불한 대가에도 공감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은혜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 분의 이끄심을 바라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십자가에 못밖힌 손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기뻐하시기 위해 노크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선과 의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이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 세상 사람들은 구원을 원치 않으나 죄인이기에 구원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 돌 감람나무의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이 구원 받은 일을 가지고 구원 받은 유대인들과 은혜를 저버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우선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교만해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교만한 불신 유대인도 벌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방인 그리스도의 교만은 더욱 가차 없이 벌하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였다. 여기서 심판 받은 앗수르가 누구인지 되짚어 보자. 앗수르는 노아의 아들 함의 자손인 니므롯의 후예들이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괴롭혔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앗수르의 조상 함은 노아와 함께 방주 속에 있었다. 앗수르가 만약 나의 가족이라면 앗수르의 심판이 당연하게 느껴질까? 아니다 그들이 우리의 가족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인 비유를 들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 농사법에 관한 옛 문서를 보면 이렇게 접붙임을 하는 이유는 돌 감람나무에서 열매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열매 못매는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이면 생기 잃은 참 감람나무가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즉, 이방인을 하나님 백성으로 살릴 뿐 아니라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도 함께 살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 것이다. 탕자의 이야기에서도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하고 사랑했다. 그 모습에 불평하는 탕자 형도 본인이 늘 성실하다는 교만을 버리고 탕자와 행복하게 살기를 아버지는 바랬을 것이다. 우리도 원래 탕자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탕자 형이 된 사람이다. 우리가 행하고 섬긴 것에 대해 탕자에게 자랑하고 교만할 것도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참 감람 나무 같은가? 돌 감람 나무인가? 답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참 감람나무가 되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선택받을 수 밖에 없는 특별함이 이스라엘 백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 내리고 있었기에 참 감람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앗수르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옮기시어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 감람나무가 된 것도 은혜이다. 바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두 가지도 살펴보자. 첫째, 특권의식이다. 둘째, 은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영혼들로 인해 주시는 은혜를 찾자. 그 영혼들이 열매 없는 우리를 깨울 것이며 우리가 있었던 구원의 은혜를 회복시킬 것이다.

꼭대기에서 안으로

누가복음 4:9-13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설교요약>
마귀의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시편 91장 11-12절 말씀을 인용해서 그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리라고 유혹한다. 왜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것일까? 민수기 10장 11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인도한 불과 구름기둥이 증거의 성막위에 있었다. 그 증거의 성막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를 의미하는데 마귀가 예수님을 세운 성전 꼭대기가 바로 불과 구름기둥이 임재했던 위치와 같다. 즉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그분의 능력의 근원지에 예수님을 세운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 세운 이유
첫째는 십자가의 조건없는 사랑을 짓밟고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왕의 자녀의 권세를 파괴하기 위함이다. 거짓의 본체인 사단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진실한 관계와 교제를 끊기 위해서사랑의 확인이라는 전략을 시도한다. 또한 사단은 시편 91장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매개체로 오인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조건적인 사랑을 하도록유도한다. 사실 사람들도 깊은 성숙에 들어가면 조건이 무의미해지는데 허물러 하나님이 우리들을 향한 사랑은 절대로 조건이 성립이 안 된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만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속죄를 위한 복잡한 번제의 과정과 몇 번에 걸쳐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고 거룩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보여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를 수있게 해주는 완벽한 거룩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조건이 성립될 수 없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우리의 죄를 덮어 주셔서 그분의 임재 앞으로 나오게 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단은 이런 지성소, 즉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짓밟고 서서 다른 사랑의 조건을 계속해서 제시하라고 한다.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성취한 것이 자신이 하나님에게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여기게 유혹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능력을 분산시킨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이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배웠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신 목적은 마귀의 유혹을 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에 집중하면서 곧 시작될 3년 반의 공생애를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마귀는 마지막 시험으로 예수님이 가진 능력과 열정을 헛된 것으로 만들라고 했다. 즉 자신만이 가장 거룩하고 가장 영적이고 가장 신령한 존재임을 알리는데 관심을 두게 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탐욕의 도구로 전락시키려 했다. 그럼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를 이기셨는지 보자.

예수님의 승리의 방법
첫째는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자.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신다. 이 말씀 속에는 매 순간 출애굽기처럼 응답-결핍-응답-결핍-응답-결핍이 계속 반복될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되 한 번으로 그치지 말고 계속 신뢰하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성전 꼭대기로 올라가지 마라. 사단은 성전 꼭대기에 선 사람들, 즉 높은 마음, 자신이 가장 영적이라고 우월한 마음을 갖도록 유혹한다. 이런 마음이 들면 '사단아 물러가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선포해야 한다. 성전은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곳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매 순간 인정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들의 예배와 사랑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 진심의 예배와 사랑을 드릴 때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조건 없는 사랑, 완벽한 기쁨, 평안이 임해 영화롭게 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의 길을 가게 한다.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것을 고난이라고 하시지 않고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라고 '영광'이라고 하셨다. 그런 고난은 부활이 있고 열매가 있고 생명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난다. 당신은 성전 꼭대기를 향하는가? 성전 안을 향하는가?

예배 전쟁

누가복음 4:5-8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

<설교 요약>
광야로 이끈 두번째 이유 -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
마귀가 두번째 예수님을 유혹한 것은 자신에게 절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절하다' 라는 동사는 '~을 향하여 입맞추다, 경배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다'라고 할 때 사용되는 언어다. 사단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자신에게 하라고 유혹한다. 그 미끼로 세상 영광과 권력을 모두 주겠다고 유혹했다. 이것을 사단은 다시 한번 자신도 모르게 네 가지를 인정한 셈이다. 첫째.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들의 예배를 받으신다. 세째. 예배에는 놀라운 축복이 숨겨져 있다. 넷째.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자신에게 하기 원한다. 이 시점은 예수님이 3 년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려는 시점이다. 예수님은 저물 때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갈 때도 홀로 감람산으로 가셨다. 요한복음 7:53-8:1에 따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저녁이 되어 제자들을 배에 태우어 보내신 후 홀로 산으로 가셨다. 마가복음 6:46에 따르면 새벽에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마가복음 1:35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주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이셨었고, 기본적으로 열 두 명의 제자의 늘 함께 하는 삶을 사셨다.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도 홀로 어디론가 가곤 하셔서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찾아야만 했다. 혼자있는 것은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있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8:29을 보면 예수님은 삼 년간에 공생애 동안 제자를 훈련하고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시고 병든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자 들을 자유케 해주시는 사역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시간 그분께 예배하는 시간만큼은 어떠한 것과도 타협하지 않으셨다. 수많은 무리가 자신을 애타게 찾을 때도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러 떠나셨다. 요한계시록 22:5에 따르면 하나님의 임재가 단절된 곳에는 영원한 고통, 절망, 지루함, 그리고 슬픔만이 존재한다. 시간이 아닌 사단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는 아직 시간도 존재하고 하나님의 임재도 존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 분과의 깊은 예배가 깊어질수록 우리 삶의 시간속에서 지루함도 외로움도 점점 작아지고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분과의 교제가 단절 될수록 시간 안에 있는 아픔과 고통과 절망과 슬픔과 외로움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가 흐르는 예배는 이땅의 시간 안에서 천국을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이고 생수의 근원이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그 시간에는 기쁨과 치유와 회복과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없는 곳에는 사단이 지배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예배가 건강하고 살아있을 때 그들은 매순간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임재를 경험한다. 그러나 예배의 태줄이 끊어지면 내면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간다. 당신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온전히 드리고 있는가? 예배드리는 것을 다른것과 타협하지 않고 있는가?

마귀의 유혹 - 예배 안에 있는 축복들을 받지 못하도록
마귀는 예수님의 예배를 파괴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렇게 단계별로 유혹했다. 순식간에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여주었다. 세계의 나라의 왕국에는 부귀와 권력과 영화가 모두 있다. 한 나라의 왕은 뭐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한다. 누가복음 4:6과 요한복음 3:35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던 공생애 초기에 한 말씀이다. '주셨다' 라는 동사가 현재 완료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에게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모두 예수님에게 주심을 알 수있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아들의 것이기도 하다. 잠언 8:27 에는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잠언8:29-30에는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알수 있다. 한 나라의 왕국은 하늘과 땅, 바다와 태양과 자연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왕국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고 예수님 이시다. 그러므로 마귀의 이 거짓말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농토를 가진 주인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와 그 주인의 농토를 보여 주면서 당신이 나에게 잘만 보이면 내가 이 농토를 당신에게 주겠다' 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귀의 조그마한 유혹에도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린다. 거짓말에도 잘 속아 넘어간다. 세상의 영광과 권력에 취하고 유혹에 점점 무릎 꿇을 때 나타나는 두드러지는 증상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세상의 영광과 권력의 달콤함의 유혹이 너무 강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권력과 영광과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이 땅의 주권을 넘겨준 일이 없으시다. 스스로 자신의 것이라고 거짓말 한다. 자신이 하나님인양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세상 정욕과 유혹에 넘어지고 변질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도 자신의 영달과 야망을 위해서는 단숨에 포기한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사단에게 팔려고 한다.

마태복음 6:25, 31-34 말씀은 무엇인가? 하늘과 땅의 주인은 마귀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니고 우리의 육신의 부모나 권력이나 재력의 빽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 이시다 라고 말씀하신다. 막상 예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희생시켜 돈을 벌고 직장에 들어가고 출세를 한다해도 우리는 우리 힘으로 지혜로 안되는 일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누가 우리를 이런 정신적이고 육체적이고 영적인 총체적인 고통에서 구해줄수 있을까?  한분 밖에 없다. 하늘과 땅과 세상 모든 영역에 주인되신 하나님 이시다. 그 하나님은 예배안에 계시다. 예배가 풀리면 모든것이 풀린다. 예배가 막히면 모든것이 막힌다.

당신은 삶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인가? 당신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원수가 두려워하는 것

누가복음 4:1-4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설교요약>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 하늘로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 라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이 일 직후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끄심을 받았다. 왜 하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 머무르게 하셨을까?

이유 -  떡 만이 아닌 말씀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 가운데로 인도되셨다.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고 맑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 세상 육신의 자랑, 안목의 정욕, 쾌락의 삶이 이때 거룩함과 순결과 사랑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고 있을 때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하러 왔다. 

유혹 - 하나님의 음성 듣지 못하게 하도록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질 때 마귀는 특별히 예수님이 거의 잡수시지 않기로 작정한 기간의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유혹했다.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예수님은 얼마 전에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 그러나 마귀는 그래도 다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유혹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할 때 내면에 들려오는 마귀의 음성을 잘 분별하고 대적해야 하는 이유를 확인시켜 준다. 이것은 아빠와 아들 엄마와 딸이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와서 아들과 딸에게 '네 아빠 엄마 맞아 정말?' '이렇게 닮은 구석이 없는데' 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귀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고 육신의 본능과 탐욕대로 살라고 부추긴다.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라고 속인다.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다. 그러나 돌을 떡으로 만들며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시지 않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핑계 대며 돌을 떡으로 만들며 합리화시키지도 않으셨다. 인간적인 욕정과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사셨기 때문이다.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사는 방법 
1) 입을 하나님께 드리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를 원하신다. 
2) 열방을 두려워하지 말고 파괴하고 세워라. 하나님의 말씀이 입을  통해 마음에 들어오면 파괴할 것이 보이고 다시 세울 것이 보인다. 
3) 맞서게 하시는 은혜. 세 번째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내가 너를 보호하고 함께 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당신은 사단이 파괴한 하나님의 창조물을 되살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다. 원수가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75인 중에 빛나는 보석처럼

누가복음 3:23-38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24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25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26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27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28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29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30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31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32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33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34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35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36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37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설교요약>
누가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를 추적해서 그 근원까지 적고 있다. 아담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탄생하고 번성했지만 하나님이 한 족속을 선택했고, 그 족속 중 한 사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셨다. 여기에 기록된 75인 중,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며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사람들의 특징을 추적해 보자.

하나님의 씨를 일으키는 것에 마음을 쏟았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보다는 나의 유익을 우선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어 갔다. 분명 아담과 하와와 그의 후손들은 가인의 후손과 멀지 않은 곳에 살았고, 가인 후손의 악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따르는 새로운 씨가 일어나길 갈망했을 것이다. 창세기 4장 2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벨을 대신할 셋이라는 다른 씨를 주셨다. 하나님은 셋을 통해서 혼돈과 타락 속에 있는 가인의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 놓길 원했다. 하지만 창세기 4장 26절에 보면 셋의 아들인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셋이 105년 동안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삶을 드린 결과였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회의적일 때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바라보시고 그 분의 불을 보내주시기 때문이다.

셈과 아르박삭의 후손이라도 하나님께 믿음의 반응해야 한다
노아의 아들인 셈은 1년 10일 동안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체험했고, 아버지인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실수했을 때, 동생 야벳과 함께 부친의 나신을 옷으로 덮어드렸다. 그 후로 셈은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복을 받았다. 셈과 그의 아들인 아르박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생존해 있었다. 서로 교류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의 직계 조상인 노아와 셈이 경험했던 방주와 하나님에 대해 분명히 전해들었을 것이다. 그 때까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직접 만나주시고, 그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번성케 할 것이라 약속해 주셨다. 아직 상속자가 없던 85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도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을 믿는 고백을 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셨으며,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은 어린 다윗이 하나님을 비웃는 골리앗에 대항해 믿음으로 싸우게 하셨고,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에게 천사를 보내 잉태될 아들이 예수님임을 계시하여 그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삶 속에서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려다 되지 않아 모든 걸 내려놓고 성령을 의지하여 신실함으로 기도하는 영적 방법을 통해  때 닫혔던 문이 쉽게 열린 경험은 없는가? 누가의 족보에 있는 75인 중에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주실 때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점이다.

잠언서 11장 30절에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신약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 지혜로운 자는 영혼을 얻는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의인을 축복하면 의인의 마음은 항상 따르는 사람에게 자신을 우상 삼게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섬기게 한다. 그 생명나무는 생명 되신 예수님이시다. 요한 계시록 2장 7절에 보면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가지려면 댓가 지불이 필요할 수도 있음을 전제한다. 사랑은 희생이다. 처음 사랑은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처음 행위도 이렇게 순수하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하려면 마음을 다칠 수 있고 아픔을 경험할 수 있고 상처가 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하신다. 또한 치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평안과 기쁨과 보화들을 안겨준다.

흥정과 믿음

누가복음 3:18-23
18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설교요약>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자기 앞으로 나서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때 그 군중 사이에 섞여 있던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러 세례 요한 앞으로 나오셨다. 줄 서 있던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식하거나, 알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물에서 올라오실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째, 비둘기 같은 형체의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했다.  둘째,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 답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어느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수의 무리 속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질 때 
예수님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줄을 서 세례 요한에게로 나아가고 계셨다. 아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사랑 받는 분임을 알지 못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미미함을 느낄 때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자체의 가치를 상실하면 슬퍼지고, 우울해지고, 심하면 여러 유혹들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잘 나고 경쟁적인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나의 말을 들어 줄 누군가가 그리워 질 때가 있다. 하나님은 이 때, 우리에게 주목하시며 하늘을 여시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시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대단한 일을 이루지 못했어도, 우리가 어떤 것으로 인해 기뻐할 때, 우리의 기쁨을 더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당신은 오늘도 당신을 향해 이유 없이, 조건 없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다, 너는 내 기쁨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있는가?

공적 사역으로 여러가지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 
예수님은 30년 동안 목수의 아들로 이름 없이 살았다.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신 후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일을 그르치지 말아라, 멋지게 일을 해야 한다, 일주일에 금식은 몇 번 해야 한다'류의 음성이 아니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자다' 라는 음성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이러한 음성과 마음이 항상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옆에 있는 사람의 사역을 보니 그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아.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지? 나는 왜 이렇게 능력이 없지?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해' 라는 음성도 들릴 때가 있다. 식물의 생명이 뿌리에 있음 같이, 사역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뿌리가 뽑히거나 상하면 줄기나 가지나 열매나 모두 금방 시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열매가 더디 맺혀도, 외적인 식물의 형태가 초라해 보여도, 뿌리만 튼튼하면, 언젠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일을 했을때, 그것에 대해 인정 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넣어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 이유는 우리를 보고 있고, 인정해 주는 어떤 존재가 반드시 있음을 의식하며 우리가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때로 희생을 해야 하고, 헌신을 하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기쁨으로 그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건강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어려운 상황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날 때 
헤롯 안디바는 선을 알면서도 악을 선택한다(19-20절). 이런 인격을 형성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 헤롯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헤롯은 자기 두 딸과 아내를 죽이고, 충직한 신하들을 감옥에 보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 지역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모두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성장한 자녀들은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부모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내면은 사랑이 아닌 공포와 불안으로, 그리고 곧 헤로디아가 아버지 헤롯의 사랑으로 채워졌어야 할 안디바의 내면을 대체 하였다. 헤로디아는 그를 악하게 조종하였다. 하나님은 안디바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세례 요한을 통해 다시 주셨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을 죽였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죽인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헤롯 안디바 혹은 헤로디아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성장 과정부터 꼬이고 묶인 사람들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자라나며 잘못 형성된 인격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때로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 넣는다. 심하면 판단력도 흐려진다. 더 심하면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의해 깊은 우울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비둘기 같은 형상의 성령으로 오실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채워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고전 2:11-12) 분별력과 은혜로 우리는 이미 주신 선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확인의 방법 : 흥정인가? 신뢰인가? 
예수님 물에서 올라오신 것은 세례 요한의 인도 덕이였다. 예수님이 인간의 손을 의지한 것은 인정과 사랑 때문이다. 이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들려왔다. 구약에 나병 환자였던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몸을 여섯번이 아니라 일곱번째 몸을 담글 때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처럼 회복되었다.
물은 말씀이다. 물은 예배 속에 흐르는 성령이다. 찬양과 기도 속에 흐르는 성령이다. 일곱번은 반복을 의미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 속으로 계속 반복해서 들어갈 때 우리 삶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닫혀있던 것들이 열리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해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만두는 것은 흥정이고 조건적인 믿음이다. 몸이 물로 들어갈 때 마음도 영혼도 들어간다. 그래서 예수님도 친히 자신의 몸을 세례 요한에 맡기시며 물 속에 잠기셨다.

당신은 계속해서 그 성령의 강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말씀의 강물 안으로 반복적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흥정이 아닌 믿음으로 주를 따르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