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가족의 능력

누가복음 8:19-39
19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26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35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쌔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주님의 소원, 네 번째 밭

누가복음 8:1-18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1. 길가- 믿음과 구원 첫번째 비유는 길가에 떨어진 씨다. 이스라엘의 밭은 경사가 진 계단 언덕처럼 형성된 곳이 많다. 그래서 농부가 위에서 씨를 뿌리면 계단식으로 된 밭의 길가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첫째, 사단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것과 구원받는 것을 싫어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갖게하고 구원을 받게 해주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영혼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는 능력이다. 믿는 사람들이 성령에 인도받아 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둠과 죽음에 묶인 영혼들이 풀어지고 살아나는 일이 일어난다

2. 뿌리- 돌짝밭 두번째 밭은 돌짝밭이다. 두번째 밭의 문제는 뿌리가 없는 것이다. 뿌리란, 첫째 자신을 감추는 삶이다. 겉으로 드러나고 자신을 주목시키는 삶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드러나지 않게 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갖는것이 필요하다. 이런 삶을 훈련하면 내면이 견고해 지는 것을 자신이 가장 먼저 알게된다. 둘째 뿌리는 깊이 있는 삶이다. 1) 깊이는 어려움이 와도 계속 주를 위해 사는 삶이다. 하나님과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쉽게 등을 돌리거나 거절하지 않고 어려울 때 더욱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깊음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깊이는 거절을 당해도 거절감을 갖지 않고 더 큰 신뢰로 반응하는 삶이다. 학생이 공부를 마치고 세상의 일터로 나가면 격려받기 보다는 경쟁 구도 속에서 거절받고 무시받고 자신이 이룬 일도 누군가가 가로채 가는 거친 삶을 경험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뿌리가 있는 사람은 자신은 존귀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3) 깊이는 먼저 하는 사랑이다. 뿌리는 땅속에 저장된 물을 흡수해서 줄기와 가지에 영향을 전달한다. 물이 뿌리 있는데로 오지 않고 뿌리가 물이있는 곳을 향해 뻗어간다. 은혜의 물,성령의 물,말씀의 물을 향해 가는 것은 뿌리,깊이있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먼저 주는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채우고 깊어지게 한다. 4) 깊이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것이다. 한 영혼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며 변화되고 싶어하는 것은 뿌리를 내리는 깊이다. 그러다 보면 삶의 열매들이 드러난다.

3. 재물 -가시덤불 세번째 밭에 대해 예수님은 물질은 좋은것도 나쁜것도 아니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 재물을 인생의 주인인지 주님이 인생의 주인인지 알려면 근심하는지 안하는지를 보면된다. 물론 주님이 주인된 삶도 재물이 없으면 불안해 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이 공급해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는 것을 경험함으로 근심이 아닌 평안으로 산다. 그러나 돈을 의지하는 삶은 많아지면 향락에 빠지기도 하고 잃을까봐 두려워 한다. 따라서 근심과 향락의 삶은 주님이 아닌 돈을 의지하고 있는 증거다. 근심과 향락을 극복하려면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4. 열매- 이땅에 완벽한 땅이 없듯이 완벽한 마음도 없다. 누구나 근심도 있고 유혹도 있다. 앞의 3가지 밭의 특징들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착하고 좋은 마음' 으로 말씀을 듣고 그것을 계속 붙들고 인내 하면 백배의 결실을 맺게된다.

*백배의 결실 (6가지 열매) 

(1) 한 영혼의 인격이 변화되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것이다. 예수님이 언급한 3종류의 밭들, 씨가 길가에 떨어진 밭이 말씀을 빼앗기지 않고 내면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바뀌는 것이다. 재물의 노예가 되어 염려와 향락으로 인해 결실하지 못하던 영혼이 재물을 주를 위해 사용하는 주인이 되고 이런 성령의 성품으로 바뀐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다. (2)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영혼들이다. (3) 헤매이는 목자없는 양들이 선한 목자를 만나 말씀으로 세워져 방황을 중단하고 정한 마음으로 주를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방황하는 영혼을 말씀으로 인도해 주는 사람을 추수꾼으로 그런 영혼을 열매로 보셨다. (4) 삶과 입술의 변화가 열매다. 히브리 기자는 원망과 불평의 입술이 변해 찬양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열매라고 한다. 세상의 쾌락과 정욕을 예배하던 자가 변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입술로 변하는 것은 놀라운 열매다. (5) 삶에서 선을 행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예배라고 하신다. (6) 예수님은 제자와 열매를 동일하게 보셨다. 한명의 제자가 탄생하는 것이 곧 열매다.

*씨뿌리는 비유를 주신 목적 

말씀 사역시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라. 말씀 사역을 하다보면 첫번째 땅 처럼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마귀에게 빼앗겨 구원받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음을 미리 알려주셨다. 두번째 땅 처럼 말씀을 받고 기쁨으로 반응하나 잠시견디다가 시련이 오면 세상으로 쾌락으로 떠나가 버리는 영혼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세번째 땅은 말씀을 듣지만 곧 바로 재물과 염려와 세상 쾌락의 가시 만나 결실하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런 영혼을 보고 만나게 되어도 실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네번째 땅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네번째 땅이 첫번째에서 세번째 땅 같은 사람들도 좋은 땅으로 바꿀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네번째 밭을 바라보며 말씀의 씨를 뿌리는 천국의 농부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소원에 반응하겠는가?

준비된 임재 속으로

누가복음 7:36-50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저녁식사에 초청했다. 그런데 초대받지 못한 그 동네에서 소문난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이 한 집에 초대받으심을 알고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그 집에 들어왔다. 예수님 뒤로 다가가 서서 눈물을 흘리며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초대한 시몬은 이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속으로 여자의 행동을 정죄하였다.

한집에 두 부류의 대조적인 사람들이 만났다. 죄인 여자와 바리새인 시몬이다. 여자는 그 동네의 소문난 죄인이었지만 예수님께 나왔고 그의 뒤로 가서 그 발 곁에 섰다. 마음 깊은 곳에서 눈물이 솟구쳤고 그 눈물은 서서 흘리는데도 예수님의 발등을 적셨다. 눈물은 우리의 의지대로 언제든 흘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향유를 드리러 왔다가 예수님을 두르고 있는 성령의 임재 안으로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주체할수 없는 눈물이 흘러 예수님의 발등에 떨어지자 준비하지 못한 수건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러 수건을 대신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다. 이 행동들은 여인이 미리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으러 왔다가 그 내면의 눈물이 먼저 터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머리가 아닌 발에 사랑의 상징인 입을 맞추게 되었다.그러나 시몬은 대조적으로,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바로 자신의 집에 자신과 마주보고 있는데도 그의 내면은 여전히 황폐했다. 여인은 예수님과 거리가 좁혀 질수록 자신의 내면에 급작스런 반응이 일어났다. 자신도 예측못한 부어지는 은혜였다. 그러나 시몬은 미움과 정죄로 채워졌다.

차이점은 무엇일까? 죄인 여자는 예수님만을 바라 보았고 시몬은 사람만 바라보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어떤 부분이 해결되면 다시 회복 될것인지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깊은 임재속으로 들어갈때 알게 된다. 그분의 임재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시고, 공식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들어갈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말씀은 이 여인을 통해 우리에게 힌트를 준다. 그것은 예수님께 나오는 것의 중요함이다. 여인은 죄인이었고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지 못했다면 예수님이 그녀에게 주셨던 선물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예수님께 나와야 하는가? 첫째. 사람들의 비난과 질시가 난무할때다 여인은 사람들 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을때 예수님께 나갔다. 자신이 드릴수 있는 선물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갔다. 둘째. 아직 해결받지 못한 죄가 있을때 예수님께 나갔다. 그녀가 아직 죄를 청산하지 못한것은 예수님이 그녀를 향해 죄사함 받았다는 말씀을 현재시제로 말씀한 것을 통해 알수있다. 셋째. 예수님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계실때다. 예수님을 초청한 시몬은 평소에 길을 걸어가다가 자신과 마추친 사람일수 있다. 그 눈빛이 혐오와 무시의 눈빛임을 쉽게 알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이 죄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시몬도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의 초청에 응하셨고 그에게 무시 받으시면서도 식사를 하셨다. 사랑은 작은 것으로 인해 미움으로 표출되고 사랑으로 표출 되기도 한다.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점은 공통적인 시각이 아닌 그 시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일수 있다. 시몬에 대한 모든것을 아셨고 보고 계셨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우리와 다르다. 예수님은 부드럽게 일관성을 가지고 시몬의 내면을 스스로 보게 해주셨다. 또한 동시에 여인의 내면에 있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도 동시에 보게 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시몬같을 때도 주님께 나와야 하고 여인같을 때도 주님께 나와야 한다. 당신은 예수님께 나오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께 나와야 하는가? 준비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준비와 기다림을 본다.

당신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눈에 생각에 감정에 유난히도 다른 사람보다 크게 와닿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받고 싶은 선물이다. 예수님을 기다리면 예수님이 더 먼저 나를 기다리고 계신 그 것을 보게 된다. 그 분의 준비된 임재속으로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분의 임재속으로 들어가면 그순간 내안에 사단의 속이며 붙혀논 모든 딱지들이 강풍에 날라가듯 모두 날아가 버린다. 그 임재의 바람은 모래를 날려 그 속에 숨어있는 큰 보석들을 드러나게 하듯 우리 영혼에 주님이 주신 보석들이 빛을뿜으며 드러내게 한다.여인이 받은 또 다른 하늘의 선물은 평온해진 양심이다. 사람은 안정된 삶이 필요하다. 삶이 안정되지 않으면 어떤일에 집중하는 것이 어렵다. 하나님의 일도 안정된 삶에서 집중할수 있다. 그러나 평안없는 편안하고 안정된 삶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그 불안한 마음을 죄를 통해 메꾸어 보려한다. 인간의 평안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이다. 평안은 예수님 안에 있다.

에베소에서 찬송하라

에베소서 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요약>

바울은 고린도, 빌립보 등 당시의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워나갔다. 대도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열방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에베소는 바울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었다. 에베소는 다른 대도시들과 달리 정치, 군사, 무역이 발달한 곳이 아닌 종교의 중심지였다. 종교의 중심지였던 만큼 에베소에는 에베소 주변 황제들의 신전들보다 웅장했던 아르테미스 성전이 있는데 이 성전을 통해서 에베소는 주된 재정적인 공급원으로 삼았다. 신상과 기념품, 여관업, 대금업, 은행업을 했고 주술, 마술하는 무당 그리고 몸을 팔았던 신창들도 가득한 곳이었다.


이런 도시에 바울은 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자신이 다닌 선교지 중 가장 오랜 시간인 3년을 머물렀을까? 에베소야말로 거짓 신과 욕망을 좇는 열방의 영혼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가장 어두운 그곳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빛이 절실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제자들('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전, 그래서 서로 '제자'로 호칭)이 성령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을 알고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기도를 해주었고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 그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 시대의 에베소

에베소에도 장로들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우상과 전혀 상관없는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힘들었을 것이다. 도시 전체가 아데미 신전의 덕으로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있었다.

현대인들과는 달리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을 자아 성취의 기회로 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상숭배와 관련된 자신의 직업으로 인한 내적, 외적 갈등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직업들을 다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상 우상과 관계없는 직업을 찾으려면 그들 모두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를 떠나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보다 그 현실과 그들의 고통을 알았으나 주님의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지 말고 그곳에서 도리어 예배하고 말씀을 흥황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행 20:28)

주변에 사진의 일을 즐거워하고 보람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 것이다. "능동적"이 아닌 "수동적"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직장인은 일생에 평균 60%라는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는데 직장을 싫어한다고 하니 불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도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더 심각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한복음 15:19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였으니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다. 비그리스도인들 처럼 세상에 묻혀서 살지 않고 세상이 나를 미워할 때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환한 빛을 세상에 비출 때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미워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예배받기를 원하신다. 그런 곳에서 예배와 찬송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 세상이 교회를 더욱 미워하는 그런 악한 사회에서 고통 받고 있을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이 편지를 썼고 에베소 같은 곳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주님의 편지이기도 하다.

찬송하는 이유

본문 시작을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한다. 이것은 시편에 "할렐루야"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찬송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셨기 때문이다. (본문 4,5,9,11절)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으로 우리를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고 마음에 두고 계셨다고 그것을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다.(본문 7절) 짧은 한 절이지만 아주 강력한 말씀이다. 구약에서 죄 사함은 언제나 '피 흘림'의 대가로 이루어졌고 그 피 흘릴 제물은 흠이 없고 가장 값진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죄가 없는 사람은 없고 죄를 용서받기에는 이 세상의 제물은 너무나 부족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역사상의 모든 인류의 가치를 다 합쳐도 남고 넘치는 가치를 가지신 분, 동시에 죄 없는 인생을 사신 유일한 분, 그분의 피가 흘려짐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게 된 것이다. (히 10:10)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엡1:9) 때문에 우리는 찬송해야 한다.

'두란노'라는 학교

두란노는 사람 이름인데, 학자들은 대체로 학교의 주인이면서 선생이었을 것으로 본다. 두란노 학교는 당시의 신전이나 극장들처럼, 우상 숭배자들이 자신들의 신들을 위해서 땅을 고르고, 벽돌을 쌓아서 지어진 헬라식 건물이었고, 그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런 세상의 교육과 우상 숭배 만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그런 학교가 두란노라는 라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므로 인해 바울이 에베소에서 2년여 동안 매일 밤낮으로 강론을 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르는 신학교가 됐을 것이다. 강론한다는 공중 설교를 뜻하기도 해서 이 건물은 학교가 뿐 아니라, 예배당이 된 것이다(행 19:10)

전 세계인이 모이고 금융과 문화와 우상숭배가 가득한 세계의 중심지인 뉴욕,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우리와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건물 "학교", 과연 이 학교는 하나님 눈에는 그냥 학교 건물일 수가 있을까? 우리가 이 에베소 같은 뉴욕에 있고 예배드리는 것이 과연 유연의 일치일 수가 있을까? 에베소의 두란노 학교처럼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통해 이 교회를 통해 예배 받기를 원하신다.

공감의 정서

누가복음 7:18-35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설교요약>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메시야 사역을 준비했던 사람이고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드릴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던 분이시다. 하지만 7장 19-20절에 보면 그가 옥에 있을 때 순간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회의를 품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가 맞은 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에 예수님이 23절에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하신다. 그럼 요한의 믿음을 흔들리게 했던 원인은 무엇인가?

주님보다 앞서는 때

누가 복음 3장 16-17절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았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능력 있는 분이시며 또한 심판 때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고 심판하시는 주님이심을 알았다. 또한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어린양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를 흔들리게 했던 것은 시간이다. 그가 원하는 시간에 그가 원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이 움직이길 원했다.  

공감 정서의 부재

성자와 같은 삶을 살던 세례요한이 흔들렸던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 예수님보다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공감정서의 부재이다. 이것은 사랑이 없고 정서가 메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고 있는 일들이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심판에 능력을 보여주지 않은 것에 대한 믿음의 회의였다. 하지만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약함을 체휼하신다고 했다. 함께 고통을 느끼는 정서가 바로 예수님의 성품인 것이다. 하나님의 그의 시간을 쫓고 함께 걸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공감의 정서를 부여 하신다. 그것은 곧 그들을 공감의 사람으로 준비시키자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으로 들어야 할 예수님의 음성

예수님의 눈에 화려한 요한

누가 복음 7장 24-26절에 보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요한은 극빈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외로운 곳에서 희생과 헌신으로 살았던 요한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보는 눈에서는 요한이 왕궁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보다 요한이 더 화려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바로 잡아 주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칭찬을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하신다. 이것은 그 뒤의 세대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함을 말씀해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높음을 위해 낮음을 선택한 삶

500년 전에 구약의 말라기와 이사야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언되었다. 11절에 보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은 큰 사람이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셨다. 세례요한은 구약과 율법과 선지자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옛 언약에 속한 사람이지만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복을 받은 새 언약의 사람들이다. 즉 신약의 사람들은 오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낮추심으로 예수님의 크심을 들어내셨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예수께 주목 시켰고 사람들로 예수님을 주목하고 예배하고 사랑하게 했다. 우리의 삶에 주님이 보이지 않을 때 깊은 터널을 통과할 때 우리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는 분의 음성과 주님을 향한 헌신과 사역을 사랑하시는 분의 음성을 들으려 하는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오실 때

누가복음 7:11-17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노메드 영성

마태복음 8:19-23 | 예레미아 35:14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14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설교요약>

믿음의 절개를 지킨 영성
예레미야3:14에 따르면 노메드 레갑족속의 영성은 30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런 절개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셨다. 레갑의 노메드 영성은 예수님을 닮았다.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마귀로 부터 3번이나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의 친 형제들은 그가 정말 위대한 분이시면 시골에 묻혀있지 말고 세상에 드러내라고 자극했다. 요한복음 7:4-5을 보면 그의 사랑하는 제자로 부터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유혹' 도 받았으나 타협하지 않으시고 꿋꿋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셨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했으나 죄인들의 죄사함을 위해 인내하셨다.마태복음 27:42에 예수님이 받은 유혹은 십자가를 지지 말고 세상 영광과 쾌락을 즐기라는데로 모아진다. 짧은 인생 예수님을 위해 거룩한 고난을 받는것을 중단하고 스스로의 육신의 정욕을 채우라는데로 모아진다. 바울은 로마옥에 갖혀 있을때 이렇게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다. 빌립보서 1:28-30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많은 사람과 상황을 통해 많은 은혜를 부어주신다. 그러나 그 은혜가 고난을 받게하기 위해 주신것임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한것은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이다. 한 영혼이 예수님 처럼 살도록 돕는것이다. 지옥의 고통속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영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이다. 예배자들이 되도록 돕는것이다. 나에게 준 은사와 가진것을 나누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 어려움을 격는 것이 고난이다. 이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고난받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는 동일한 싸움이기에 이 세상 어디든 존재한다. 주님 만날때 까지 피할수 없는 일이다. 우린 고난을 피해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한 세상 어딜가도 동일한 싸움이 있다. 그것은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마귀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공격해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레갑족속의 절개, 예수님의 절개를 가진 그분의 자녀의 삶을 모두 지켜보고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세상 정욕에 빠져 길을 잃은 자들을 깨우는데 사용하고 싶어하신다. 당신은 깨우는 사람인가? 깨워야 할 사람인가? 
무소유의 영성
노메드는 땅을 사지 않는다. 목초지를 따라 계절마다 이동하며 산다. 최소의 생활 용품을 가지고 다니는 거의 무소유의 삶에 가깝다. 이 명령을 300년이 흘러도 레갑자손들은 지켜오고 있었다. 예레미야 35:8-10에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8:20에 따르면 예수님은 바다위를 걸을수 있고 폭풍도 잠잠케 하시는 분이시다. 죽은자도 살릴수 있는 분이시다.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수 있다. 온세상의 주인이시다. 그런분이 없어서 가난하게 된것이 아니라 가진것을 포기함으로 가난하게 되셨다. 체념을 무소유의 삶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체념은 가진것이 없지만 어떤것을 소유할 기회가 주어지면 움켜쥐는 삶이다. 그러나 무소유는 가질수 있지만 포기하는 것이다.다시 가질수 있는 기회가 와도 움켜쥐지 않고 나눔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체념이 아니라 무소유의 삶을 사셨다. 무소유의 삶을 사신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집중하시기 위함이셨다. 이 말씀 다음에 한 제자가 아버지를 장사하고 따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마태복음 8:21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8:22에 이것은 하나님 사역의 긴박성을 보여준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내주실때 한사람 한사람을 더 깊게 더 따뜻하게 사랑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오늘 아니면 내일하지가 아니라 긴박감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 누구든 오늘이 마지막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긴박감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중에 하나가 '소유' 다. 가진 소유가 많아질수록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소유에 더 많은 관심과 관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소유가 없다고 대답하게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마태복음 8:19을 보면 이때 예수님은 여우와 새를 비유하며 머리둘곳이 없다고 하셨다. 이것은 나를 따르려면 소유보다 사람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수있니? 라는 의미다. 그 다음 장사하고 따르게 해달라는 사람에게도 때로 혹독하게 대답하신것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무거운 소유가 될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도 소유가 아니고 사람이지 않는가? 라고 의문을 제기할수 있다. 예수님은 부모를 사랑하고 가족도 사랑했다. 십자가에 죽으면서도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의 사랑이 더 우선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릴 보낼때가 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신다. 그러나 이때 내가 원하는 우선순위를 내세우며 그것을 먼저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사람이 소유로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으면 사랑이 아닌 도피처가 된다. 우상이 된다. 우상은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을 흘러가지 못하게 한다.따라서 무소유의 삶은 우선순위다.영적인 민첩성과 무소유의 삶은 연결되어 있다. 영적으로 민첩할수록 더 무소유의 삶을 살게되고 무소유의 삶을 살게 될수록 영적으로 민감해진다. 하나님이 소유를 계속해서 부어주시면 어떻게 하나? 라고 반문할수 있다. 민첩하게 흘려보내라. 사용하라. 그러면 썩지 않을것이다. 그러면 영적인 지방이 되지 않고 근육이 될것이다. 
당신은 무소유의 영성이 있는가? 
상급 
예레미야 35:18-19을 보면 하나님의 상급도 특별하다. 이세상의 상급과 다르다. 레갑의 자손에서 하나님을 섬길 사랑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실것을 상급으로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탄생부터 죽음 부활까지 한결같이 신선한 향유처럼 순수했다.하나님을 향한 사랑 사람을 향한 사랑이 열정이 불탔다. 이것이 하나님의 상급이다.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계속되고 순수함을 잃지 않고 열정의 불이 계속 타오르는 것은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하는 일이다. 주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야만 계속 탈수있고 태울수 있고 녹일수 있다. 
주님은 오늘도 노메드의 영성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신다. 

응답해 주고 싶은 믿음

누가복음 7:1~10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설교요약>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에 있던 로마의 백부장이 그의 종을 살려달라고 예수님을 초청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고 크게 놀라셨고 그의 소원을 들어 주셨다. 그럼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보자?

사랑의 믿음: 노예는 그의 생명이 주인께 달렸다. 그런 노예가 죽을 병이 들었다.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백부장이  그 종을 사랑했다고 기록했다. (2절) 따라서 사랑과 믿음은 비례함을 알수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가 간구하게 된다. 따라서 믿음이 성장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전과 다르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사랑하는 믿음을 보시고 그 종의 병을 고쳐 주셨다. 그럼 우리의 기도가 사랑의 기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수 있는가? 첫째.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사랑의 기도다. 둘째. 누군가를 위해 불가능한 기도를 하고 있다면 우리안에 사랑이 있다는 증거다. 그럼 이런 인격과 사랑의 음은 어디서 부터 흘러나오는 것인가?

예수님의 가치를 아는 믿음: 백부장은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할 자격도 자신의 집에 모실만한 동등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집에 까지 오시는 수고를 하시지 않게 하기 위해 무리를 예수님께 급히 보냈다. 백부장은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회당도 지어주고 자신의 민족도 아니고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받는 유대인을 섬기고 사랑했다. 사람들이 가치있게 여기지 않는 노예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대해 주었다. 그럼에도 그런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의 가치와 예수님을 감히 비교 할수도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백부장은 어떻게 예수님의 소문만을 듣고 이런 믿음을 보일수 있었을까? 요한복음 6장 37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백부장을 감동해 예수님께 나오도록  이끌어 주셨기 때문임을 알수있다. 백부장의 이런 아름다운 사랑과 인격은 자신을 부인할때 하나님이 부어주신 영적인 축복이었다. 그럼 자신을 부인하며 사는지 시인하며 사는지 어떻게 알수있을까?  

말씀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가? : 7-8절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말씀 하시는 예수님을 믿었다. 그러나 오늘도 그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기다리는 사람은 드물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본것은 자신의 모든 생각대로 예수님을 움직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주인에게 명령을 받으려는 종의 상태로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반응할수 있었던 것은 그는 삶속에서 종들의 헌신과 순종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자신이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매순간 순간 어디있든 어떤일을 하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고 그분과의 친밀감속에서 임재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납득되지 않는 명령에도 순종하는가? : 오늘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납득할수 있는 것 이해가 되는 것만 명령하시길 기대한다. 또한 납득이 되어야만 어떤 일을 시행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가고 있는것 같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가능한 것만 순종하려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경우 분명 납득되지 않는 일을 하게 하셨다. 이런 일을 하려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어야 가능하다. '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그분은 완벽하신 분이시다. 말씀하시면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어떤 불가능도 어려운 것도 없으시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수 있으려면 그분을 믿지 못하면 불가능 하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부인한다.



요구가 무거울수록

누가복음 6:20-49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3단계의 사랑 중 1단계는 하나님에 대해 갈급한 영혼들이다. 20-22절에 보면 예수님은 영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하고 갈망하는 영혼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채워짐과 하늘의 기쁨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2단계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목말라하는 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과 어려움을 격은 단계를 의미한다. 3단계는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세 단계를 정리해보면 1단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2단계는 나와 나와의 관계, 3단계는 나와 원수와의 관계이다. 이 단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럼 당신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

이 불가능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3가지 방법들이 있다. 첫째는 자책감을 주려 함이 아니라 자책과 결별하게 하기 위함이다. 35절에 보면 “기대하지 말라” 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누군가가 내 공로를 인정해 주고 고마워 할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37절에 보면 “용서해라” 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이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된다. 38절에 보면 “헤아려라” 이다. 이것은 상대의 사정을 배려하는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헤아릴 때 우리의 영혼에 채워지는 기쁨과 생명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는 자책의 마음이 끼어들 공간이 없다. 둘째는 땅이 아닌 하늘의 복의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22절에 보면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 복이 있도다 말씀하셨는데 교인들은 이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어려움이 올 때 인간적인 분한 마음과 진실을 분별하기 전에 오는 죄책감, 그리고 성령의 핍박에 대한 기쁨의 감사와 상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단이 우리들에게 주는 속임수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분별하면 상급과 소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믿어야 한다. 셋째는 훈련으로 원상복구 되어지길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사랑으로 행하지 않은 이유 중에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얻고 훈련 받지 않기 때문이다. 40절에 보면 “온전하게 된자”는 “원상으로 복구시키다” 라는 의미이며 배우는 훈련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다. 그래서 기초가 중요하다. 1단계가 중요하다. 주를 향해 가난하고 배고파하고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울고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할 때 그 영혼은 2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과 충돌하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았도 기뻐하고 감사하면 반드시 3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지혜롭게 대처하며 기다리는 사람으로 변해 갈 것이다. 당신은 이런 3단계의 사랑을 하고 있는가?

48-49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 반면에 행하지 않는 사람은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3단계의 사랑을 하면 영혼이 견고해 진다. 내면은 더욱 담대해 지고 거룩해 진다. 결국 예수님 같이 된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눈에 선한 십자가

갈라디아서 3:1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설교 요약>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보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갈:3:1/새번역)   예수님은 A.D 33년 4월 3일 오후 3시 경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바울은 A.D 33-36년 사이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다메섹 회심 후 14년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갈라디아서에 말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을 전한 지가 길어야 2-3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주고 싶어하는 사랑이 가득했다. 그러나 갈라디아 성도들의 마음은 다시 완악해지고 옛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갈라디아 3장 1절을 보자. 갈라디아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 절기도 지키고 구약의 제사도 다시 지내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질된 삶의 열매는 다시 예수님 믿기 전에 드러났던 옛 삶의 태도들이었다. 성령의 열매나 육체의 열매는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한 가지 죄악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면 다른 죄악도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 한 가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다른 열매도 계속 따라서 드러나기 마련임을 말씀해 준다. 열매는 그 뿌리와 나무의 결과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완악해져 가는, 육신적이 되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의 은혜에 기반을 두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율법으로의 귀향 때문이었다. 외적으로 더 신령하고 거룩하고 타인보다 더 절제하고 금욕적인 삶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분별하기 어렵다. 신실해 보이고 특별해 보이고 경외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세속적이고 정욕적이고 서로 비난하고 경쟁하고 움켜쥐고 정죄하는 모습이 강하게 드러난다. 은혜는 반대다. 그 뿌리가 아직도 십자가다. 십자가가 눈에 선한 것 같은 마음은 얼굴과 행동과 삶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바울은 힘이 빠지고 낙담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다시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그들을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고백한다. 우린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다가 누군가가 다시 옛사람으로 율법으로 돌아가면 크게 낙심한다. 그러나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자처했다. 그럴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뿌리가 율법이 아니고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눈에 선한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바울처럼 세월이 지나도 십자가가 눈에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계속 율법이 아닌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죽음의 권세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자. 이 말씀에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씀이 현재 완료 수동태로 되어 있다. 우리 노력과 힘이 아닌 복음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매 순간 주님이 내 삶의 보좌에 않으시도록 내어드리라. 그럴 때 두가지 은혜가 임한다. 세상의 정욕을 내가 참고 죽이려 하지 않아도 세상의 유혹이 나에게 다가오다가 그냥 힘을 잃고 죽어지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the world had been crucified to me”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세상 쪽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세상 정욕을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서려 하는 욕망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상이 나를 보면서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세상의 권세를 잡는 사단이 우리 뒤에 있는 십자가의 권세, 예수님의 피의 권세를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죽은 자의 권세다. 변화된 삶은 노력한다고 되지 않는다.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복음을 듣고 십자가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할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산다. 그 다음부터는 그 죽음이 계속 권세가 되어 나의 정욕, 세상 자랑, 욕망, 육의 사람을 죽인다. 내 안에 사랑, 용서, 평안, 기쁨, 겸손, 소망, 비젼, 거룩, 절제는 살아나게 해준다. 이것이 죽음의 권세다. 당신 삶에 눈에 선한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십자가의 그 사랑이 눈에 선한가?

형제를 보게 하는 사랑 <1부> | 높은 부르심 <2부>

<1부 - 양정상 목사님>
요한 일서 3:12-19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부 - 배현석 전도사님>
에베소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설교 요약>
본문에 바울은 편지를 받는 자들은 성도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은 평안을 찾지 못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2014년 한 조사기관에 의하면 미국의 18세 이상 성인 중에서 무려 44.7%의 사람들이 정신관련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현대인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정신적인 스트레스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불확실성’(uncertainty)라고 합니다. 이 불확실성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외부적인 것과 내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부적 불확실성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볼 수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그 외부의 불확실성을 ‘믿음’이 필요한 영역으로 봅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장을 도전받습니다. 내적 불확실성은 그 크신 하나님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딸임을 확신할 때 해소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다는 것은 당시 어떠한 종교에도 받아드릴 수 없는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도 하나님을 절대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아빠로 두었다면 평안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라는 자신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확인시키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갈1:1)(롬1:1) 이뿐만 아니라 그가 기록한 13개의 목회서신 중에서 11개에서 자신이 사도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갖힌 자”이다. 이렇게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역시 본인이 누구인지 주님 안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밝힘으로서 서신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이토록 강조하면서 서신들을 시작한 것은 그에게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수많은 어려움들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겪었던 여러가지 폭력과 위험들, 셀 수 없는 고생스런 선교 사역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또 평생동안 독신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특히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 대를 이을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늘도 버린 저주와 같이 여겨졌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가치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봤다면, 그가 극심하게 좌절하고 우울해질 이유는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라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부르심을 굳건히 붙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세상의 어떤 낯선 사람의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세가지 호칭이 등장합니다. 사도, 성도, 그리스도 입니다. 이 중 ‘성도’라는 호칭은 사실은 굉장히 놀라운 호칭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는 장면이 나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귀신이 소리지르며 일렀습니다. (막1:24)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오늘 ‘성도’라는 단어와 똑같이 쓰인 ‘ἅγιος (하기아스)’입니다. ‘성도’라는 말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거룩한 자’랑 원어로 보면 똑같은 말인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이 모두 “거룩한 자”라고 말해주고있습니다. 그 정체성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 보다도 더욱 위대한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리고 볼 이름은 바로 예수님의 호칭인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인 크리스토스에서 왔고 그 의미는 ‘메시아’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를 가진 호칭이 되는가?(갈2:20)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우리 안에 예수가 사시는 삶 “작은 예수”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라는 말로서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입니다. 구원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구원자-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예수들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작은 그리스도들, 작은 메시아들! 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 작은 메시아들은 그들 앞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가진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그게 우리가 입은 옷이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반드시 기억하세요! 인생에 무게에 마음이 내려 앉을 때에 더욱 기억하세요!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하실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을 향한 십자가의 걸음을 시작하세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메시아 예수의 모습이 여러분에게서 환하게 빛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만나지는 은혜

빌립보서 4:19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설교 요약>
만나지는 은혜
빌립보서 4:19절에(NIV) 보면 meet와 glorious riches 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자.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데 어떻게 우리들을 만나 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신 사람들은 위로와 격려, 기쁨, 소망을 주며 우리들의 삶을 부여케 한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은 만남은 우리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채워지게 한다. 또한 그 사람들을 우리들의 삶 안으로 이끄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값없이 받은 예수님의 그 사랑과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과 희생, 목숨을 드렸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다. 그 만남은 감사로 시작한다. 그러나 한가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필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
누가 복음 17장 17절에 보면 10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다 깨끗함을 받지만 한 명에 사마리아만 다시 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하신다. 19-20절에 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하신다. 여기서 너는 그의 나병이 아닌 너 자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9명의 나병환자들의 필요는 채워졌지만 더 중요한 구원의 은혜가 아직 임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 후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을 주목하고 믿으면 병보다 더 중요한 영혼인 그 사람 자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를 통해서 삶의 필요는 채워졌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즉 감사한다고 그것이 구원 받은 증거는 아니다. 구원받은 증거는 감사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이 자신의 삶에 주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분만을 예배하며 그 은혜가 커서 누군가에게 그 은혜를 주기 위해서 고난과 희생의 일을 자원하는 것이다.

혼동
한 가지 혼동하지 말자. 병 고침을 받은 9명의 나병환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일반 은총은 받았지만 구원 받은 특별 은총은 받지 못한 것이다. 즉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영적 리더가 9명과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도 한번 받은 구원이 영원하다고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한번 받은 구원도 이후의 삶에 따라 다시 상실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은 결과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만약에 경고와 두려움으로 삶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하자. 그것은 두 가지 결과가 생긴다. 첫째는 구원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는 못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섬기게 된다. 둘째는 사랑 받았기 때문에 우러나는 헌신이 아니라 사랑 받기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감사의 능력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천국을 경험해도 내면에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인가? 라고 질문할 수 있다. 요일 4장 18절에 보면 구원을 받았어도 두려움 속에 살수 있다. 하지만 두려움에는 형벌과 고통이 있다 그래서 사랑하며 살라고 하신다. 그 두려움의 뿌리는 잘못된 추측을 통해서 우리들의 생각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그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온전한 사랑이다. 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감사해야 한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는 인생을 허비했고 아무것도 아닌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잘못된 추측들을 심어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잘못된 추측을 분별하고 감사해야 한다. 감사는 사람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운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보면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올 때 감사함으로 기도해라. 그러면 원수는 떠나갈 것이다. 감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기도로 감사하고 삶으로 감사하라. 둘째는 사람에게 감사하라. 말로 편지로 행위로 감사를 표하라.

깊음과 얕음

누가복음 6:12-19
12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13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 유다이다.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18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몰려온 사람들이다. 악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다. 
19 온 무리가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다.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와서 그들을 모두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보여주고 싶은 천국

요한복음 3:1-8/16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설교 요약>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저녁에 예수님에게 나왔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당시 최상류층 사람이었다. 니고데모는 은밀히 아무도 모르게 저녁에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수 없음이니이다'(요3:2) 그의 말속에서 예수님을 높이고 칭찬하는 것을 엿볼수 있다. 그러나 이런 칭찬의 말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요3:3)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칭찬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에게 두가지를 간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첫째. 너는 거듭나지 못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거듭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가를 알게 해준다.

거듭나야 하는 이유 -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당신은 당신이 본 어떤 아름다운 나라나 장소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질것이다. 나는 하와이 이야기 열방대학 이야기를 종종한다. 그곳을 생각하면 열정이 타오른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큰 기쁨과 은혜와 치유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느끼고 만져 본 곳이기에 표현이 생생하다. 그곳에는 두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아름다운 자연이다. 잉크빛 바다와 열대아 나무와 완벽한 날씨이다. 둘째는 보이지 않는 기쁨과 치유와 은혜와 평안이 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두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으로 알고있다. 둘째. 니고데모를 많이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오늘 크로스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맛본 '천국'에 당신도 들어오길 바라는 소망때문이다. 그럼 그 천국을 어떻게 들어갈수 있을까? 그 천국은 바람같은 성령을 통해 들어간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 요한복음 3장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의 실체는 눈으로 볼수없다. 그러나 결과는 볼수있다. 따라서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해서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하셨다. 하나님의 존재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심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말 중요한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바람처럼 존재하신다.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한 것은 진리다. 성령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인격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보게 하신다. 요한복음 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 죄를 회개케 하신다. 그 바람같은 성령은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오로라 처럼 아름답게 승화 시키신다.성령은 예수믿는 후에 짖는 죄를 찔리게 하시고 새롭게 바꾸신다. 성령은 지구의 자전 공전 속도 보다 더 빠르게 하나님의 임재안으로 우릴 데리고 들어가신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에 아무소리 안들려도 하나님의 임재를 영혼으로 보고 느끼게 해주신다.

내가 존경하는 미국의 선교사 한분이 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브레이 너드 다. 그는 1718년 커네디컷 에서 태어났다. 그는 9세때 아버지를 잃고 14살때 어머니를 잃은 외로운 소년이었다. 방황끝에 21살에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일에서 공부하던 중 자신의 생애를 인디언의 영혼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1743년 그의 나이 24살에 인디언 선교사가 되었지만 그는 움막의 짚푸라기에서 자야했다. 옥수수 죽을 먹고 길을 잃어 온 밤을 늑대가 우글거리는 숲에서 자야만 하는 날들을 보냈다. 결국 피를 토하는 폐결핵에 걸려 몸이 쇠약해 져갔다. 그러나 29살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갔다. 선교2년동안 인디언들은 그를 조롱하는것 처럼 전혀 변하지 않았고 죄악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런중 그가 절망중에 복음을 전하던 어느날 놀라운 성령의 부흥이 그 마을에 일기 시작했다. 그때의 한 상황을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회중위에 강하고 급한 바람처럼 내리는 것 같았고 모든 사람이 그 앞에서 놀라 엎드러지고 말았다. 나는 그 영향에 놀라 그저 서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다 사로잡힌 것 같았고 마치 앞에 무엇이 있든지 다 쓰러뜨리고 휩쓸어 버리는 강한 폭풍과 엄청난 대 홍수의 저항할수 없는 큰 힘과 비교할 만했다.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서로 관심을 가지고 구부리고 앉았고 그 놀라운 사실의 충격에 견딜 사람이 없었다. 중년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여러해 동안 술꾼으로 지내던 나이 많은 사람들과 6-7세 밖에 안된 조그만 아이들 까지도 자기 영혼에 대한 깊은 고뇌를 느끼고 있었다. 이제 가장 고집이 센 사람이 수그러지고 있었다. 그 전만 해도 스스로 의롭고 안전하다고 자랑하며 어떤 인디언들 보다도 아는 것이 많고 자기도 과거에는 10여년간 그리스도인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고 자신 만만하게 말하며 자기의 상태는 양호하다고 호언 장담하던 인디언 추장이 이제 와서 자기 영혼의 상태를 보고 심각하게 염려하며 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또 한 사람도 나이가 든 사람인데 살인자요 마술사에다가 악명 높은 술 주정뱅이 였는데 그가 눈물을 펑펑 쏱으면서 용서를 구하며 자신이 처한 위태한 사실을 볼때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수 있겠느냐며 오히려 투덜거렸다. 집 구석구석에서 사람이 모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고 문 밖에서도 또 여러 사람이 가지도 못하고 서 있지도 못할 정도였다. 사람들 마다 자기 영혼에 대해 심각한염려를 하게 되었고 자기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저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이것이 바람같은 성령이시다. 당신은 거듭났는가? 천국을 맛보고 있는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거듭나고 천국안으로 들어온다.

선교는 누가 왜 하는가?

고린도전서 12:12-26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설교 요약>
* 1995년부터 아마존 선교를 시작하신 강광수 선교사님의 말씀입니다.

선교는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그 사명에 미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체인 우리가 하는 것이 선교이다.

브라질 아마존은 어떤 곳인가?
아마존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다. 브라질의 아마존 우림은 7 million km2 로 미국의 본토 지역과 맞먹는 사이즈이다. 이곳은 지구의 열대우림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 지 구 산소의 20% 이상을 생성한다. 그래서 지구의 허파라고도 불린다. 날씨는 6월에서 8월이 겨울, 12월에서 2월이 여름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아마존은 대체로 덥고 습하며 평균 온도는 23에서 29도이다. 안데스 산맥에 인접한 아마존 숲은 연간 4,000 mm로 엄청난 양의 비가 내 린다. 우기 (1월-4월)에 내리는 비는 상대적으로 기간은 짧지만 양이 많고 종종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다. 남미의 아마존 강은 나일강 다음으로 지구에서 두번째로 큰 강이다. 아마존 사람들 은 이 강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는다. 거주하기도 하며, 먹을 것을 강으로부터 얻고, 생활의 모 든 공급원이 이 아마존 강이다. 아마존 사람들은 소규모의 집단을 이루며 생활하고 다산으로 인해 계속적으로 인구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유아들이 유아기에 사망하기 때문에 일 정하게 그 수가 유지되고 있다.

아마존에서는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 이 세 나라가 만나는 곳에서 ‘삼국경 신학교’를 운영 하고 있다. 180 acre (21만 6천평)의 땅을 사서 4년제 현지 지도자 양성을 위해 학교를 설립 하였다. IeFaM (Igr ej a Evangél ica Tr ês Fr ont eir as Amazonas) 라는 교단을 세우고 이 것을 협력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재정적으로 독립된 기관 PSI 를 세워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 하도록 하였다.

2030년까지 이 신학교를 통해 150명의 현지 지도자를 양성한다라는 미션으로 현재 사역에 임 하고 있다. 그들이 100개의 교회를 세우고 1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농장 사역을 통해서 경 제적으로 자립하는 단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삼국경 신학교는 2005년 6명의 현지 학생을 데리고 시작하여 현재 3명의 풀타임 목사님이 교육하고 있으며 작년에 40명의 학생들 을 졸업시켰고, 올해는15명의 소수의 학생들을 데리고 운영하고 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 니라 어떤 학생들을 어떻게 키워내는가가 더 중요하다.

기도제목:
1) 여자 신학교와 도서실 건축을 위해
2) 후방교회와 연관해서 새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3) 팀 사역을 위한 헌신적인 젊은 청년들이 많이 모일 수 있도록
4) 아마존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때까지 사역이 이어질 수 있도록

떡과 칼

누가복음 6:1-11
1 한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 
2 그러자 몇몇 바리새파 사람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주렸을 때에, 다윗이 한 일을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4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거기에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다.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섰다. 
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물어 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10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서, 그 사람에게 명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11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설교 요약>
안식은 하나님이 지치고 피곤해서 쉬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것을 즐기고 그것들로 찬양받으시고 예배받으시기 위함이다. 안식일의 2가지 축복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을 체험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오른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바짝붙어 안식일에 일하는가 고발하기 위해 엿보고 있었다.예수님이 손마른자의 손을 고쳐 주시고 누가복음 6:9 처럼 이렇게 말씀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누가복음 6:11처럼 반응했다. 예수님과 이 사람들의 안식일이 대조적이다.이 치유를 통해서 창세기에 하나님이 제 7일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고 예배하도록 복주신 그 원래 목적이 회복되지 않았는가? 오늘도 이 복된 날에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을 기대하며 나올때 그분은 치료의 하나님으로 만나주신다.

둘째. 떡과 칼이 주어지는 날이다
구약에 다윗이 사울에게 시기를 받아 억울하게 쫒기고 있었다. 다윗을 따르는 부하들과 동료들은 배가 고파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놉이라는 작은 마을로 숨어들어 갔다.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모두 배가고파 기진맥진에 있으니 먹을것좀 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아히멜렉은 하나님의 성전에 매주 안식일에 드리는 진설병이라는 떡을 다윗과 그의 일행에게 주었다. 그러나 성전에 하나님께 드려진 고기나 진설병 떡은 제사장 들만 먹을수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먹으면 죽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다윗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하지도 못했다.그러나 하나님은 억울하게 쫓기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 법을 어겼음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윗은 진설병을 먹고 창이나 칼은 없냐고 아히멜렉에게 물었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전에 골리앗을 죽인 칼이 보자기에 싸여 제사장이 입는 예복 에봇 뒤에 있다고 했다. 사무엘상 21:9 말씀처럼 다윗은 그것이 최고의 무기라고 말한뒤 그것을 가지고 떠났다. 골리앗을 죽인 칼을 다시 찾은 말씀도 큰 영적 의미가 있다. 다윗은 전에 하나님만 의지했다. 그 믿음이 자신보다 거대한 도저히 무너뜨릴수 없는 골리앗을 무너뜨렸다.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속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그의 영혼을 점점 약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에서 떡과 칼을 다시 돌려 받은후 다윗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이 무엇일까? 떡과 칼이 주어진 이후

첫째. 강한군대를 이루었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은 떡과 칼을 받은 직후 사울이 두려워 자신이 죽인 골리앗의 나라로 피신해서 가드왕에게 나갔다. 신하 몇명이 다윗을 알아보자 다윗이 미친척을 했고 다행히 그곳에서 탈출했다. 다윗은 아둘람 굴로 도망했다. 거기에서 환난당한 자 마음이 원통한자 빚진자들이 그에게 몰려와400명의 큰 군대를 이루게 되었다. 사무엘상 22:2을 보면 이것이 다윗이 다양하고 다루기 힘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하나님 나라의 용사로 세우는 지도자가 되어감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의 날에 떡과 칼을 받아 세상에 나가도 우왕좌왕 흔들릴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고 점점 그리스도인으로서 강함을 갖게된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어도 세상에서 안된다고 쉽게 칼과 떡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둘째. 고난의 상황속에서 고난의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사무엘상 23:2-3을 보면 다윗은 즉시 하나님께 순종했다. 사무엘상 23:5말씀에 따르면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다. 다윗은 지금 사울의 대군에 쫓기는 상황이다. 자신의 군대는 갓 조직된 400명의 오합지졸 뿐이었다.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동족들 그일라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위험보다 그들의 생명을 더 먼저 생각했다. 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백성을 블레셋으로 부터 구원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다윗만을 쫓는 사울과 대조적이다. 다윗은 상황을 주님 음성으로 동일화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황을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주의 날에 떡과 칼이 회복되면 자신의 상황이 고통스럽고 어려워도 주변의 고통스럽고 어려운 영혼들을 풀어줄수 있는 힘이 생긴다.

셋째. 자신이 사랑을 준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했다
사무엘상 23:13에 따르면 한가지 놀라운 것은 자신이 구해준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에게 은혜를 악으로 갚았다. 그러나 고난가운데서 고통스런 사람들을 도와주는 시간동안 400명에서 600명의 군대로 더 늘어나 있는 것을 보여준다. 기대할 만한 사람들은 도움이 아니라 해를 주고 기대치 않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기대치 않은 시간에 우리를 도우시고 채우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떡과 칼로 사는 자들에게 어떤 보상을 하실까?
(시편 57:2)하나님은 다윗에게 소망과 확신을 주셨다. (시편 57:5)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에 온 열방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는 거룩한 열정을 부어주셨다. (시편 57:7)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믿음과 찬양의 마음을 주셨다. 시편 57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소망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최고의 보상중에 하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 으로 채워지는 마음이다. 소망은 기쁨을 낳고, 기쁨은 감사를 낳고, 감사는 성취를 낳는다.

주의 날은 떡과 칼을 받는 날이다. 떡과 칼은 ? 
1) 강한 하나님의 군대를 일으킨다.
2) 고난속에서 고난받는 자를 풀어준다.
3) 자신이 구해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해준다.
4) 소망의 보상을 받는다. 

새 부대

누가복음 5:35-39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설교 요약>
새 옷과 새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헌 옷과 헌 부대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정신인 사랑을 놓치고 자신들의 잘못된 해석으로 만든 인간의 전통임을 알려 주신다. 따라서 새 옷과 새 포도주는 율법을 완성케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셨고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이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낙심한 베드로와 외로운 삶을 살던 나병환자, 평생 누어서 삶을 연명했던 중병병자에게 예수님은 다가갔고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것이 바로 조건없은 사랑, 거룩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신 아가페의 사랑이다. 빌보드 차트 hot100 중에 10위에 오른 BTS의 Fake Love를 통해서 세계의 젊은이들이 진실된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들의 내면 속에 있음을 증명한다. 진실된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며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럼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고 거짓 없는 진실한 사랑을 하려면 아가페의 사랑을 만나야 하며 그 속에서 성화되어야 한다.

새 부대
첫째는 거듭남이다

새 옷과 새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서 이것이 사랑의 율법인 것을 안다. 그럼 새 부대는 무엇인가? 새 부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통은 양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만든다. 즉 새 부대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려면 먼저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 니고데모와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베드로, 백부장도 모두 예수님을 믿을 때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새 부대가 되었다. 새 부대 안에 거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거부한다면 그 안에 있는 영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새 부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5가지 특징을 보이는 거듭난 사람들이다.
1-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아드린다.
2- 형제, 자매들을 사랑한다.
3-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고 육체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다.
4- 세상을 이긴다.
5-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둘째는 가치 있는 말과 삶에 집중한다
새 포도주는 성령님으로 비유된다. 오순절 성령사건 이후로 계속해서 사도들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교제하고 서로의 것을 나누고 기도와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 오신 것이다. 요점은 부어주신 새 포도주는 누군가를 위해서 가치 있게 사용됨으로 새 부대가 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새 부대가 메말라 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여름철의 시냇물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것은 속이는 시냇물이다.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거나 속이는 시냇물이 지속될 때 그 화살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당신의 삶에 속이는 시냇물은 무엇인가? 재정, 가족, 직장, 친구, 하나님의 사람들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

예레미야 15장 19절의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는 가치 없는 말이 아니라 가치 있는 말씀을 전하라
즉 하나님은 속이는 시냇물 같은 사람이나 상황들을 만날 때에도 가치 있는 말씀을 전하며 살라고 하신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 삶의 거짓과 속임의 언어, 행동들을 골라내고 스스로 더 깊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시간으로 삼을 수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속이는 시냇물 같은 시기에 더욱 가치 있는 금과 다이아몬드로 바꾸고 계신다.

둘째는 사람들을 쫓지 말고 그들을 돌아오게 하라
가치 있는 말씀을 전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면 진리가 새 부대에 가득 채워진다. 진리로 내면에 채워지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면 우리의 내면에 진리로 채우는 일에 더 많은 마음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우리의 내면에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채워질 때 우리는 사람들을 연연하며 쫓아가게 된다. 우리의 영혼이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면 그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입으로 삶으로 전달하게 된다.

그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삶을 하나님의 입이 되게 할 것이다. 당신은 새 부대가 되어가고 있는가?

예수님처럼

누가복음 5:27-35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설교 요약>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심을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위대한 성자 정도로 본다면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갈등이 생기면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까지 정죄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면 변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세리 레위를 통해서 예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예수님의 관심
첫째는 죄인의 회심- 가버나움에 살던 레위는 이미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알고 있었지만 삭개오처럼 예수님께로 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세금을 부당하게 거두는 세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 27-28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를 부를 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말씀을 보면 베드로, 나병환자. 중풍병자 그리고 레위도 예수님을 만나 모두 죄 사함을 경험했던 죄인들이었다. 또한 교회는 죄인들이 오는 곳이며 자신들이 죄인 됨을 보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경험하고 거듭나는 곳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한 영혼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는가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심이다.

둘째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것- 29절에 보면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연다. 즉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영혼이 기뻐하게 된다. 누가 복음 15장에 양 백 마리가 있는 목자가 한 마리를 잃고 찾았을 때와 열드라크마 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여인 그리고 목자는 가장 먼저 잔치를 벌였다. 이것이 하늘의 천사들의 기쁨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며 예수님의 기쁨인 것이다. 레위의 기쁨과 잔치는 그가 만든 기쁨이 아니고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음 맛보는 기쁨인 것이다.

셋째는 죄인의 회심이 죄인들의 나아옴으로 이어지는 것- 29절에 보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죄인을 부르시고 사랑을 주셨는데 그 한 사람 레위를 통해서 수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회심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예수님의 관심이다. 그러나 이런 기쁨과 영혼이 성령충만할때 그것을 방해하는 세상의 소리가 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언인지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통해서 보자.

내면에서 비방의 소리가 들릴 때
첫째는 죄인들을 병자로 보라- 30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한다. 이 비방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소리지만 우리의 내면에도 이런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죄인들끼리 서로 이해할 것 같지만 그들 사이에도 죄의 등급을 정하고 서로를 무시한다. 이럴 때 우리의 내면에는 네가 뭐가 부족해서 이런 죄인들과 상대하니 라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같은 병자들을 고치시기 원하셨다. 즉 죄인들을 병자로 보고 그들에게 의사가 필요함을 인정하셨다. 그럼 우리들 마음에 불쌍한 마음, 즉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둘째는 혼인 집 손님으로 보라- 33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금식하지 않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식탁에 몰려온 죄인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보았다. 당시에 혼인잔치는 우울과 슬픔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서 어떤 임금의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종들이 길가로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는데 잔치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어두운 곳으로 쫓아내는 기준이 선한 자나 악한 자가 아닌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인 것이다. 바로 이 예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과 은혜의 옷인 것이다. 나는 택함을 받았는가의 기준은 단순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의복을 입는 것이다. 이 의복의 의미는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음을 의미한다. 즉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선인과 악인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는 삶이다.

주께 나올 수 없을 때 나오라

누가복음 5:12-26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설교요약>
예수님이 한 동네에 계실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와 엎드렸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나병환자는 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 나타날수 없게 되어있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올수 없는 2가지 불가능한 장벽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나병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병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수 있는 위험한 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께 나올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꾸짖지도 않으셨다. 많은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13절에 보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라고 기록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손을 쉽게 대실수 있는 가까운 거리까지 나병환자가 온것을 알수있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삶의 문제가 너무 크고 힘들다 보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올 힘조차 상실하게 될때가 있다. 주님께 가기도 전에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거나 영구적인 해결이 안될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나병환자의 풀수없는 불치병 문제를 풀어주신것을 주목해야 한다. 24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 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예수님께 나가도 이 문제는 절대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거야 라는 산같은 문제는 무엇인가? 그러함에도 주님께 나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말을 한마디 사용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보신다. 이제 당신은 예수님께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수 있다. 그럼 어떻게 나가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될것이다. 

첫째. 솔직하게  나가라 

나병환자도 중풍병자도 또 다른 공통점은 자신들을 감추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간것이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 그럴듯한 옷이나 장식품을 구해 가릴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운 나라기에 태양을 가리기 위해 긴 세마포 치마 같은 것을 입는 나라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사람처럼 어느 정도는 위장할수 있었다. 중풍병자는 늘 자신이 드러누어 있던 그 침상에 누운채 예수님께 나왔다. 따라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는 보기 힘들고 악취나는 모습 그대로 나왔다.이 사람들 자신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었을 것이다. 예수님께 나올때 침상도 흉칙한 자신의 모습도 감추지 말아야 한다. 나병에서 정결케 된 사람은 몸의 털을 모두 밀고 물로 몸을 씻고 처음으로 이스라엘 진영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자신의 텐트(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7일 동안 야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진영안에 즉 교회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7일 야영은 그의 삶을 성결케 하는 시간들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집을 떠나 마음껏 집없이 떠도는것을 자유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반대다. 진정한 자유는 집안에 있다. 가장 자유로울 때는 집안에 있을때다. 우리의 영혼의 집은 교회다. 천국이다. 이때 우리의 영혼은 가장 자유하다. 이 집 안에서 우리는 반복해서 몸을 씻고 잘라낼것을 잘라낸다. 7일째 다시 몸을 씻고 옷을 빨고 머리카락, 수염, 눈썹까지 모두 깍아내게 한다. 두번째 씻음과 잘라냄이다. 계속적인 성화를 의미한다. 특히 골방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서로의 나눔을 누설하지 않는 소그룹이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도 솔직한 나감이다. 혹은 자신의 상황을 진실하게 나누며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하늘의 문을 여는 솔직한 태도다. 병이 낫기를 위해서는 첫째,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고 둘째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둘째.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선함을 바라보며 나가라 

사람들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을 금기시 했고 그런 생각조차 부정하게 여겼다.나병환자가 가까이 오면 돌을 던지며 증오하고 조롱했다. 그런데 오랜세월 나병을 앓으면서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산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이 사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절망' 이라는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예수님께 원망과 증오의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수 있나이다 하니'(12절) 라고 고백했다. 이 말속에는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이라는 뜻도 들어있다. 이것은 자신이 앓고 있는 이 병도 주님의 지배아래 있고 섭리아래 있음에 대한 고백이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마음도 예수님에 대해 그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긍정적이고 선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할수 없는 반응이었다. 나병환자도 중풍병자를 데리고 사람들도 공통점은 그 생각이 소망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꼭 고쳐주실것이라는 선한 이미지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 줄것이라는 선한 이미지가 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기뻐하신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부정적이고 쓴뿌리로 가득한 사람들의 내면을 먼저 바꾸신다.예수님은 나병환자가 오기전에 생각한 대로 아무도 손대기 싫어하는 나병환자를 거침없이 즉시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그리고 '내가 원하니 깨끗함을 받으라'(눅:5:13)  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가 생각한 대로 깨끗함을 받았다. 중풍병자는 그의 친구들의 생각대로 죄사함을 받았다. 그리고 침상에 의해 지배받던 그가 자신의 침상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도 그것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 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5:26) 한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주께 나가면 그 영광은 더 멀리 더 높게 더 오래 확장된다.  친구들이 예수님을 생각한 대로 되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병든 친구를 메고온 그 선함을 볼때 그들은 아마도 뜯은 지붕을 다시 더 튼튼히 고쳐주고 갔을 것이다. 

주께 나병환자 처럼 중풍병자 친구처럼 주께 나올때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볼것이다.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것이다. 누군가 당신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것이다.

벽을 허문 삶

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설교요약>
삶의 벽을 쌓는 사람들의 4 가지 특징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지만 주님을 사랑하거나내면에 그 은혜가 스며들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증상들이 나타난다. 첫째. 자신의 일용할 양식과 예수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베드로와요한의 무리처럼 수입과 생존에 필요한 공급에대해서는 예수님은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 분이라고 단정짓고 바라보지 않는다.  둘째.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보다 자신들의 수익이 더 관심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며칠전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바다에서 고기잡고 그물을깁고 있을때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람을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바로 옆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셋째. 주님을 한결같이 따르지 않는다. 네째. 아무리 수고해도고기가 없다. 그물은 천국과 같다고 했다. '(마:13:47) 그물에 고기가 채워지듯 마음에 천국이 채워진다. 그런데 아무리 이땅에서 성실하게 수고하며 살아도 주님이 없으면 그물에채워짐이 없다. 

3년 후의 삶의 3가지 특징 
3년 후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첫째. 배에 7명의 제자들이 타고 있었다.  예수님을 판 가롯유다를 제외하고 11명 중에 7명이 한 배에 타고 있었다.  3년 전 에는  배가 두대였고  각각의 배에
베드로-안드레 요한-야고보가  타고 있었다. 그 당시 어선의 장비가  비쌌기 떄문에 어부들은 보통 협동조합에서 동업자들과 함께  일했거나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가족들이 함께 일했다고 한다. 고기를 잡았을때 그것의 수입을 나눌 사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제자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도우며 가족보다도 더 진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베드로는 배와 고기를뒤로하고 새벽 바다에 뛰어들었다. 3년전 베드로는 예수님이 옆에서 말씀을 전하는데도 바라보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자신이 원했던 고기를 많이 잡았음에도 그것보다 예수님이 보고싶어 차가운 새벽 바다로뛰어 들었다. 
셋째. 영혼을 낚는 어부의 마음이 있다. 3년전베드로는 사람보다 고기에 관심이 더 많았다.그런데 뭍에 올라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사랑하느냐' 라고 하실때 '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했다. 그때 주님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3번에 걸쳐 말씀 하셨다. 이것은 문자적인 동물 양이 아니라 한 영혼을 양으로 비유한 것이었다. 

3년전과 삶이  달라진 이유 
채워짐 
베드로는 채워짐을 경험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예수님과 잃어버린 영혼들에 관심없이 영혼없는 얼굴로 그물을 씻고 있을때 그에게 먼저 다가 가셨다. 그리고 그의 배를 바다에 띄우라고하셨다. 그리고 그 배에 올라타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내면의 그물이 채워지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육신적인 필요도 채우셨다. 3년후에는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던지라고 하는 곳에 던지면 사방의 물고기들이 그 그물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잡혀진다. 고기는 잡는것이 아니라 잡혀지는 것을 베드로는 그날 이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다.
찢어짐 
베드로는 찢어짐을 경험했다. 베드로가 3년 후에 바뀐 또다른 이유는 채워짐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베드로는 이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순종했을때 그물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그물이 찢어지는 것도 같이 경험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때로 모두 빠져나가버리는 경험을 할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다시 우리 삶에 채워지고 얻어진것이 나의 능력이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배우게된다. 우리는 주님 주신 것이 다시 찢어지는 경험을 할때 이 찢어짐을 통해 두가지 반응을 주께 드려야 한다. 


주께 드릴 두가지 반응 

첫째.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것 
히브리서 5장8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겸손의삶을 사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원하신다. 순종은 내가 원한 정반대의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라도 거룩한 삶으로 간구했다 
히브리서 5장7절을보면  예수님은 거룩 그 본체셨다. 그럼에도 인간의 몸을 입고 어떻게 살고 기도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주셨다. 심한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기도했다. 특히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거룩한 삶, 경건한 삶, 신실한 삶을 추구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