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믿음을 위하여

누가복음 1:1-23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쌔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20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22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설교요약>
바울에 동역자였던 누가는 데오빌로다라는 로마의 고위직으로 추정되는 수신자에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헌정한다. 하지만 누가는 데오빌로와 유사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전 세계의 이방인들에게 이 책들을 기록했을 것으로 본다. 누가는 8번째 반열에 속한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으로 누가복음을 시작한다.

결핍 속에서도 주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을 향한 보상
6절에 보면 사가랴만 의로운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인 엘리사벳도 의로운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런 삶의 결핍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묵묵히 주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갔다. 사가랴가 성전에서 분향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나이가 많아 잉태할 수 없는 엘리사벳에게 잉태할 것 라는 메시지를 준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시절이 다 지나간 다음에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어떤 일들이 진행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늘 하나님이 앞에 계심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의인인 것이다.

번거로운 과정을 선택하신 이유

13절에 보면 ‘네 간구를 주님께서 듣고 계신다’ 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가랴가 아이를 갖게 해 달라는 기도를 어느 시점부터 계속해서 듣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마 사가랴는 현실적인 상황으로 가브리엘의 말을 믿지 못하며 그 이유로 10달동안 말을 못하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가랴가 성전에서 분향하고 사람들이 중보기도를 할 때 이 같은 일을 하셨을까? 그 이유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더 큰 믿음으로 살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더 큰 믿음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계속 듣고 계심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시간 때에 아무리 나의 처지가 불가능한 상태라도 이루실수 있는 분이시다. 따라서 어떤 것을 구할 때 그것이 오지 않았다고 중단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다른 것으로 변형해서 주실 때에는 그것을 중단하고 다른 것을 구해야 한다.

둘째, 큰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어떤 것들이 주어지기 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만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매사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그분의 음성을 먼저 들으려 한다. 이것이 큰 믿음이다. 그래서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광야의 학교를 통과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이다.

셋째,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장애를 가능케 하시는 말씀을 믿으라. 20절에 보면 사가랴는 세가지 숙제를 천사로부터 받았다. 첫째는 지금부터 말을 못하게 된다. 둘째는 10개월 후에 다시 말을 하게 된다. 셋째는 아이가 10개월 후에 탄생한다. 사가랴는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기도해 왔던 것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이 일이 이루어 지면 그는 자신의 이성적인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신뢰하는 사람으로 바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숙제를 주신다. 숙제는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이 해야 한다. 숙제를 통해 지식을 알아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숙제는 현실이 한계에 부딪칠 때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듣는 것이다. 그리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을 맛볼 때 우리는 현실의 벽에 부딪칠 때도 평안히 담대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더 큰 믿음으로 변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숙제 현실의 벽은 무엇인가?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사람들

사도행전 28:11-31
11 석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4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15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바 되었으니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 
21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29(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설교요약

첫째, 만남을 통해 일으키는 성령의 불꽃
바울은 처음 와 본 로마에서 풍랑을 만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그를 로마에 도착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원하는 땅에 바울이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여러가지의 방법으로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에는 하나님이 일으키는 위로와 도움의 사람들이 있다. 최종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그곳에 있는 형제들이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나왔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바울을 만나기 위해 각기 다른 지역으로 부터 먼길을 달려온 것을 의미한다. 이 사람들은 약 30년 전에 (AD33년경/60-62년) 예루살렘에 왔다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제자들이 각국의 언어로 방언을 하는 것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자들일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은지 25년이 흘렀는데도 그 사랑은 뜨거웠고 순수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인간적으로 볼때 바울은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로마에 온 것이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도착했음에도 그들은 그가 복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했고 큰 위로를 받았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에 대해 냉소적이던 사람들이 따뜻한 사람들로 변한다. 인종과 언어와 피부색과 빈부귀천으로 사람을 나누던 사람들이 그런 모든 것을 중단하고 모두를 존귀하게 대한다. 그 사람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감동으로 정과 사랑을 주기 때문에 그 만남들을 통해 서로가 재충전되고 채워지고 회복되는 성령의 불꽃(Spark)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너희는 성령의 약속하신 성령으로 표, 도장이 찍힌 사람' 이라고 말씀 하신다. 한번 찍힌 표는
지워지지 않는다. 누구도 그 소유권을 바꿀수 없고 빼앗아 갈수 없다. 표는 소유권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며 누구의 소유인가를 분명하게 가늠하게 해준다. 성령은 우리가 많은 것을 해줄순 없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작고 소박한 일들을 기쁨으로 하게 하신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게 하신다. 죄를 회개케 하시고 마음이 완악해 지려고 할때 은혜로 녹이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분의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낼수 없다. 사단은 아무리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으려 해도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축복하신다.


둘째, 하나님이 인도 하시는 땅에는 제한적인 상황을 통해 이루시는 무제한의 일들이 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정부를 통해 바울이 셋집을 얻어 민간인과 섞여 살수 있도록 그 삶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바울은 여기에서 유대인들을 초청해 복음을 전했고 이방인들도 초청해 복음을 전했다. 더욱이 바울은 이 2년의 투옥생활을 하면서 지4권의 서신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들을 써서 교회로 보냈다. 이 서신서들은 지금 이순간도 어둠에 묵인 영혼들을 영혼들을 자유케 해주며 천국을 누리며 살게 해주고 있다. 2000천년 동안 셀수없는 사람들을 살리고 자유케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는 이 최고의 성경이 바울이 가장 제한적이고 육체적인 출입이 제한되어 있을 때 탄생했다. 우리는 주변의 화려하고 큰 일을 이루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가 작아지고 아무것도 아닌것 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심하면 하나님에게도 거절감을 느끼게 되고 상대적인 열등감에 젖어들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함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작기 때문에 제한적이기 때문에 타인이 할수없는 일들을 이루어 가는 것들이 많이 있다. 바울은 자신의 묶임을 본것이 아니라 자신의 묶임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무제한의 능력을 보았다. 하나님은 약하고 힘없는 자들 이라도 그분을 의지할 때 아무도 해하지 않도록 자유롭게 왕궁을 드나들듯 많은 곳들을 왕래하게 하시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 분을 의지할때 부지런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개미처럼 준비하고 예비하고 포기하지 않는 인내를 주시는 분임을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이 사도행전 29장을 써 나가길 원하신다. 그러려면 내 안에 사는 분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고, 성령이심을 날마다 의지하고 인정해야 한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만이 하실수 있는 일들을 주목하며 귀하게 여기며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부활의 증거들과 목적

누가복음 24:1-12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 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설교요약>
예수님 부활의 네 가지 증거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였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안에 장사를 지냈으며 주로 여자들이 시신에 향유 바르는 일을 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금요일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지 못하고 안치했고, 다음날은 안식일이어서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에 여인들은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 예수님 부활 사건에 대한 이런 성경의 구체적 기록은 그 당시 유대 문화 및 장례 풍습들과 일치하며,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한다.

두 번째 증거는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 문이 굴려져 나간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냥 ‘무덤 문을 열었다’ 가 아니라 ‘굴려져 열려 있었다’라는 증언 또한 그 당시 무덤 형태와 일치하며 역사성을 지닌다. 예수님 현존 당시 유대인들의 무덤은 바위를 파서 입구를 무거운 돌로 막고 시멘트로 바르는 풍습이 있었고, 성경은 이 장례 풍습과 일치하는 구체적 기록을 남겨 놓았다. 마가는 이 여인들이 인봉되어 있는 무거운 무덤 문을 누가 열어줄까 걱정하며 무덤을 찾아왔다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무덤문은 굴려져 열려 있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할 때 때로 무덤 문처럼 막혀 있을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 막힌 문들을 열어주시는 분이다.
부활이 실제였다는 세번째 증거는 무덤을 찾은 여인들 앞에 나타난 천사의 모습과 성품에 있다. 흰옷 입은 두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너무 눈부셔서 여인들은 얼굴을 숙였다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 나타난 천사의 모습들과 일치한다. 눈부신 광채를 내는 천사들은 자신들의 모습에 집중하지 않게 하고 갈릴리 에서 부활을 예언하셨던 생전의 예수님의 말씀을 여인들에게 생각나게 했다.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목시킨 천사들의 겸손한 성품은 성경 곳곳에 기록된 천사들의 성품과도 일치한다. 이 시대의 천사는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주목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누구를 주목시키며 살고 있는가?
네번째 증거는 예수님 부활 사건에 대한 가감 없는 구체적 기록에 있다. 여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인 사람들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를 뺀 남은 제자들의 수, 실존 인물임을 나타내는 여인들의 이름 에 대한 구체적 언급, 그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까지 찾게 된 이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과 베드로의 반응 등 꾸미거나 가공한 흔적 없이 기록된 점들이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일어난 사건임을 입증한다. 여기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현존 했던 동시대 가장 저명한 유대 정치가이자 역사가였으며, 예루살렘 태생의 비기독교인인 흘라비우스 죠세프스의 책 유대 고대사(Antiquities)에도 선하고 지혜롭고 뛰어난 학식을 지녔다고 소개된 예수님의 현존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및 그리스도인들의 부흥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한가? 부활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실제했던 분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네 가지 변화
첫째, 영혼을 뜨겁게 한다. 여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사도 외에 두명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30리 떨어진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던 두 제자에게 성경 전체가 자신에 대해 증언함을 풀어 해석해 주셨다. 예수님이 사라지고 났을 때 그들은 예수님 생전에 말씀을 들을 때처럼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음을 서로 나누면서 그 분이 예수님이신걸 알아챘다. 둘째, 엠마오 제자들은 그 길로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열 한 제자와 모인 무리에게 그 일을 알렸다. 부활을 믿으면 그 소식을 나누며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한다. 세째,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빵을 떼어주실 때 자신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증거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슬픈 일이나 답답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잘 보지 못할 때가 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과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신다. 마지막 변화는 꿈같은 현실을 종종 선물로 받는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 기뻐 놀라워하고 있었다. 당신은 너무 기뻐 믿을 수 없는 꿈같은 현실을 계속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사람이다. 부활은 꿈같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부활을 보여 주신 목적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라 하였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너희는 이 일에 증인이다’(눅 24:47-48) 복음서에 나약한 제자들과 달리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며 순교했다. 예수님 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기에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의 뿌리인 죽음이 두렵지 않고 내게 주신 오늘의 하루 하루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실존하셨고, 부활로 우리의 생애를 천국으로 주셨고, 부활의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길 원하신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을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부활을 믿는 사람이다.

영혼의 시신경

사도행전 28:1-10
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7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8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9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10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설교요약>

예비된 섬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그레데 섬 미항에서 항해가 위험할 것이라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한 항해를 했고 결국 배는 표류했지만, 기적같이 멜리데 섬에 도착했고 원주민들은 특별한 동정으로 이들을 대접했다. 우리는 살면서 무리하게 우리의 욕심으로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있다. 그리하여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셔도 아무런 말도 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찾는 원초적인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19).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1:19-20) 하지만 하나님을 알아볼수있는 마음이 죄로 인해 어두워 지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시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1:21) 하나님은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고 표현하셨다.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밝은 곳으로 가면 일시에 동공을 통해서 필요한 양을 초과하는 빛이 눈의 망막으로 쏟아져 들어온다고 한다. 이때 필요 이상의 빛을 시신경이 처리할수 없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시신경이 마비 된다고 한다. 이처럼 어두움 가운데 오랜시간 살다보면 마음이 어둠에 익숙해 져서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 주어도 그것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 시신경이 마비된것 처럼 영혼이 마비되어 죽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혼의 신경을 살려 다시 하나님의 빛을 받아드릴 수 있게 하는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죽었던 영혼의 시신경이 살아난다. 당신은 삶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가? 하나님을 느끼고 있는가? 당신의 영혼의 시신경은 깨어났는가?

살아난 영혼들의 특징 두 가지
첫째, 빛을 잘 흡수한다.
우리가 살면서 잘못된 선택을 해서 어려움을 겪을때 빛을 흡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회개한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그런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섬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본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길을 잘 따라가기 위해 계속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계속 기도해야 한다.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집중해서 따라가야 한다.하나님이 인도하신 섬에는 사람들의 도움과 긍휼이 있었다. 또 전혀 뜻하지 않을 일이 일어났을지라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로 보호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 사도행전 28장 4-5절을 보자.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둘째, 어려움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민감하다.
다음에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뱀에 물린 이 아무 의미없는 우연같은 일을 통해 하나님이 그 멜리데 섬에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신 것이다. 바울이 뱀에 물리는 일로 인하여 섬의 추장같은 보블리오라는 사람이 그를 자신집에 초대했고 바울은 그의 열병과 이질에 걸린 부친을 위해 믿음으로 기도해 주었고 기도를 통해 나았다. 미신적인 풍습이 가득했던 그 섬 전체에 예수님의 복음이 빠르게 전해졌다. 마비된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도한 섬인데 왜 다시 이렇게 독에 감염되고 물리고 덫에 걸리는 일이 일어났는가? 라며 절망과 낙담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 우연 같은 의미 없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이런 두 가지 특징이 있다면 당신 영혼의 시신경은 살아있고 왕성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빛으로 나와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 빛을 흡수해야 한다.

파도 속에서 들려온 음성

사도행전 27:1-44
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23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27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 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28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3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34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 륙인이러라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가니 
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설교요약>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이탈리아로 가는 배에 오르게 되었고, 후송 책임자인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이 비록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배에서 동역자와 함께 할 수 있게 자유를 허락해 준다. 가이사랴를 출발한 배는 무라에 정착을 하고, 탑승자들은 무역선인 알렉산드리아 배로 환승을 한 후, 그 배는 다시 니도를 거쳐 그레데 섬 남쪽에 있는 미항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심한 기상 상황으로 인해 바울은 항해를 중단할 것을 권면했지만,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은 백부장은 항해를 강행한다. 물론 전문가의 견해에 더욱 신뢰를 가진 것도 있겠지만, 배에 실은 곡물을 조속히 운송해야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다는 이유도 백부장의 결정에 기여를 하지 않았나는 해석도 나온다. 결국 허리케인의 여파로 배의 짐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리고, 모든 이들이 삶을 포기하는 시점에까지 이르게 된다. 바로 그 때 바울은 하나님께 들은 네 가지를 담대하게 선포하는데, 첫 째는 배만 잃게 될 것이고, 둘 째는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는다는 것, 셋 째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바울에게 맡겨주셨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이 한 섬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주목할 점은 바울을 제외한 배 안에 모든 사람이 살기를 포기한 그 날 밤 바로 그 때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것을 담대히 선포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바울과 그렇지 못했던 나머지는 어떻게 달리 반응했는 지 그 차이를 비교해 보자.

첫 번째, 배가 풍랑에 표류하자 선원들은 자신들만 살려고 구명 보트를 띄워 도주하려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진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모든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 질 수 있기에 바울은 이를 백부장에게 알려 그들의 도피를 막았다. 이렇듯 우리 삶 속에 파도와 고난이 우릴 연단시키고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릴 더 탐욕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만들 수 있다. 즉, 삶의 파도가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파도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다.

두 번째, 14일 이라는 기간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며 나름 정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수들이 도망을 쳐 본인들이 난처하게 될 상황을 두려워한 병사들은 죄수들을 살륙하고자 하는 무정함과 냉정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반면에, 바울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하며 마음이 녹아져 내린 백부장은 병사들을 저지하고 모든 이들이 다 살 수 있도록 진두지휘한다. 즉, 관계를 맺는데 있어 함께한 세월보다 그 관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성품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어떻게 끝까지 사랑하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의 능력 아래에 두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 능력 아래 두신 것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폭풍 속에서도 내 마음이 잔잔해지고 평안해진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과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아셨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하심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내가 속한 곳은 유한하기에 지금 속한 곳에서 더 사랑하고 더 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우리는 삶의 파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한 주 동안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음성에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묵상하고, 적용해보자.

불의한 사람들에 둘러싸였을 때

사도행전 25:1-12, 26:32
1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설교요약>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집요한 영적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 더 헌신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향력이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 우리는 종종 삶에서 불의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불의한 사람들은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며, 약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의한 상사나 동료나 무리들을 만날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성경적 반응
첫째.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앞서 가도록 기도하며 살아라
시편 43장 기자는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의 결정보다 주님의 빛과 진리를 먼저 보내달라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께 먼저 간구하면 주님께서 자신의 상황을 억울하게 하는 거짓과 어둠이 드러날 빛과 진리를 보내주시리라 믿었다. 하나님께서 빛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 안에서 치유가 일어나고, 슬픔과 절망은 기쁨과 평안으로 바뀐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으로 빛과 진리를 보내실 이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바울도 빛과 진리에 권세와 힘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항상 정직하며, 거짓 없이 빛 가운데서 말하고 행동했다. 빛과 소금 같은 삶은 언어와 연결되어 있다. 진실과 거룩, 정직의 말들은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바꾸어 간다. 말과 소금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은혜의 대화를 위해 ‘seasoned with salt’ 를 하라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 고기를 맛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시즌닝은 먹는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한다. 즉 대화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할 때 시즌닝이 된다. 그런 시즌닝이 있는 대화는 지치고 피곤하고 기진맥진한 사람에게 영양분을 공급한다.
둘째는, 말에는 균형과 절제가 있어야 한다. 서로 너무 좋다고, 너무 많이 말을 하거나, 혹은 경계하면서 너무 적게 하면 대화의 진실을 잃을 수 있다. 셋째는 균형 잡힌 시즌닝은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영감과 지혜를 준다. 그래서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라고 말씀했다. 시즌닝 대화는 계속해서 대화 중에 성령의 기름 부음과 인도를 받게 한다. 우리가 불의한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도 또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도 시즌닝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어둠을 몰아내고 영혼들을 풀어주는 소금과 빛의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자기 자신과도 시즌닝 대화를 해야 한다. 정직하게 빛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고백하는 기도를 할 때 어둠과 거짓은 힘을 잃는다. 내면은 고요하고 평안해 진다. 소금으로 빛으로 살수 있는 능력을 준다. 당신의 삶에서 빛과 진리가 당신보다 앞서가도록 기도하고 있는가?

둘째. 불의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응답할 수 있음을 기대하라
베스도는 가이사로 보내달라는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로마를 간다는 것은 그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2년이 지난 후에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 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바울이 법정에 서서 재판 받는 모습이 계속 반복되는 23-26장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재미없는 부분 같지만 이것은 바울을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준 무대였다. 구금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바울에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지도자와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주셨다. 때때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상황들을 불평하고 그 의미를 모르고 답답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당하는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볼 수 있는 상황들이 종종 있다. 또한 그 동안 함께했던 동료들과 삶을 나눌 때에도 어려움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삶들을 살았는지 나눌 기회도 주신다. 또한 때가 되면 하나님은 힘들게 하는 권력자들이나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이끄시고 옮기신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현실이 되게 하신다. 길을 여시고 그분의 빛과 진리가 앞서가게 하신다.

이사야 41장 17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목이 마르고 혀가 마르는 자들에게 응답하신다. 당신은 하나님을 이렇게 목말라 하는가? 바울은 하나님이 2년1개월 전에 하신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재치 있게 가이사에게 재판 받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해 사모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다.

 

믿음과 공감의 차이

사도행전 24:1-27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6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8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12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 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7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설교요약>

오늘도 하나님께 나가긴 하지만 마음 문을 두드리는 주님께 삶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론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깊숙이 만지시려 할때 벨릭스처럼 '그만하면 되었으니 가시오' 라며 발을 빼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자원하며 나오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 하실때 마음을 여는 것이다. 윌리암 홀맨 헌트(1827~1910) 라는 영국화가가 1853년에 완성한 ' 세상의 빛' 이란 작품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예수님의 표정이 어둡고 예수님이 들고 계신 등불에서만 빛이 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왜 문에 손잡이가 없는가 물었다고 한다. 이 질문에 화가는 '마음의 문은 그 자신이 안에서 열어야만 한다는 걸 표현한 것이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그림을 잘 보면 문 앞에 엉겅퀴가 잔뜩 자라나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연상하며 그림을 그렸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영혼은 냉냉해졌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해졌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뜨겁든지 차든지 열정을 다시 회복하라고 하셨다. 그렇치 않으면 그들을 토해 버리시겠다고 하셨
다. 작가 윌리엄 홀맨 헌트는 이 그림을 통하여 믿는 사람의 영혼도 다시 닫힐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마음에 엉겅퀴가 자라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또한 밖에서 열수 있는 손잡이를 그리지 않음으로 안에서만 그 문을 열 수 있음을 표현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30) 라고 말씀하셨다.

열린 마음문의 특징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열고 받아 들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원해서 들으면서도 벨릭스나 드루실라처럼 터치는 되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믿지 못하는 것이다. 공감은 하는데 믿지는 못하는 것이다. 종종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공감' 과 '믿음'을 혼동할 때가 있다. 믿음은 말씀을 받을때 이성과 감정의 동의 속에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믿음은 물리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초월해 어떤 불가능한 것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도 하나님을 믿기에 아멘하며 마음문을 열게 된다. 믿음은 사물이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을 믿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어떤 불가능하고 막막한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잃지 않는다. 공감과 이성을 뛰어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감정을 넘어 사실을 신뢰한다. 우리는 사실을 의지하지 않고 감정을 신뢰할 때 요동함이 있다. 당신이 예민해 하는 감정은 무
엇인가?
돈, 명예, 좋은 직장, 성공, 보여주는 것, 원수들의 엿봄, 이성, 결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집착, 외모, 신발, 자동차, 옷, 보석, 지식, 비교 받는 것, 당신의 어떤 재능, 취미생활..등 이 중에 특별히 예민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냥 놔둘때 하나님과 당신의 교제는 점점 멀어지고 당신은 더 곤고해 질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사실로 돌아가야 한다. 다윗은 감정의 고백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의 사실을 알았다. 다윗의 시는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글을 쓴 증거다. 감정을 하나님 앞에서 적어 보는것이 중요하다. 사실을 신뢰하라. 주님의 당신을 향한 사랑은 영원하며, 구원은 변함없고, 그분의 선하심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감정의 상자에 갇혀 실제를 보지 못하고 슬픔과 근심 속에 살아가는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데려가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보내신 그의 최고의 선물이고 실제인 비둘기는 '성경과 성령' 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감하는데 그치는가? 아니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가? 만약 믿어지면 당신은 감정과 이성의 상자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다.

나누어야 할 고통

사도행전 23:14-35
1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16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17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18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19 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20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21 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22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23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25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8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31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32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33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34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35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설교요약>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계획했던 바울의 암살이 바울의 생질을 통해서 알게 되고 바울은 바로 백부장과 천부장을 통해서 총독이 있던 가이사랴로 안전하게 호송된다. 놀라운 것은 바울을 호송하기 위해서 군인 470명이 호위하게 된다. 하나님은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삶을 오늘도 이렇게 지키신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어려움과 방해가 닥쳐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시편 23장 5절에 보면 주님은 특별히 원수가 우리를 삼키려 하고 공격하려 할때 우리에게 기름 부으시는분 이시다. 즉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며 기름부음을 통해서 원수를 분별하고 싸울 수 있는 힘을 제공하신다. 다시 말해서 기름부음은 나를 노리는 원수를 보고 두려워하는것이 아니라 내 영혼에 성령을 부어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을 보게 한다.

바울이 높은 위치에 있던 백부장을 부를때 그가 즉시 달려온것으로 추측해 보면 그가 처한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권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을 보여준다. 또한 사도행전 23 장6절에 바울의 암살계획을 알려준 생질은 본인의 목숨을 걸고 바울에게 이 모든 과정들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주를 위해 살때 그때그때마다 충성되고 신실한 사람들을 일으켜 우리를 돕게 하신다. 그때 우리는 바울처럼 그런 사람들의 도움과 충성스러움을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로마서 8장 17절에 share란 단어를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가진 좋은것과 귀한것을 나누는것과 또한 힘들고 무거운 짐도 함께 나누는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나눔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다시 쓸 수 있다. 기쁨도 나눌 수 있고 고통도 나눌 수 있다. 공통점은 사랑이있어야만 가능하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의 고통' 을 나누는 자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2천년 전에 고통을 모두 받으시고 끝내셨다. 바울이 이 글을 쓸때는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25년이 지난 시기인데도 바울은 예수님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그분의 자녀가 그 고통을 나누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럼 이미 십자가에서 고통을 끝낸 예수님의 고통은 무엇일까?

천부장에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암살계획을 알린 청년은 '예수님의 고통'을 나눈 사람이다. 그는 지금도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영광'을 누리고 있을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수님의 고통'을 나눌 사람을 찾고 계신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영광' 을 나누는데 관심이 있다. 칭찬받고 주목받고 대접하는일은 기꺼히 자신도 끼고 싶어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통을 나누는데는 인기가 없다.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의 고통을 나누는 눈에 띄지 않는 이 시대의 예수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들의고통이 나누어 져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기꺼이 나누어 주신다. 당신이 나누어 져야할 예수님의 고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복을 채우는 사람들

시편 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설교요약>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우리는 현재 상황들이 복인지 화인지 구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예로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되지만 그는 후에 이집트에 총리가 되는 대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복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화가 되고, 화로 여겨지는 일들이 복이 된다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복 일 수 있을까? 

진정한 복은 시간과 상황에 상관 없이 항상 이루어 지는 복이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과 영생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진정한 복은 예수님 이시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즉 선으로 이뤄진 다라고 믿는 것이 바로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다 복이 있는 자들인데 왜 그 복을 누리지 못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들이 아름다운 결론 임을 담대히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좋은 감정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결코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성을 나타내는 악한 감정들을 거부하기 위해서 좋은 감정까지 없애 버리는 속임에 빠지면 안된다.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한 감정의 회복 없이는 복된 삶을 누리지 못한다. 

1절에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냇가에 나무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는 악인들의 삶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먼저, 오만한 자들은 바로 교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겉으로 겸손해 보이고 말투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일들에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자가 교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죄인들의 길에 서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 두가지 속성은 쉽게 분별할 수 있지만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사람은 구별하기 힘들다. 꾀를 부리는 것이 세상적으로 볼 때 지혜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꾀를 부리는 영역이 많아질수록 본인의 유익과 기쁨이지 하나님의 빛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20절에 보면 악인들은 그의 행위가 드러날 까봐 빛을 미워한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지만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은 부분에서 꾀를 부리며 이윤들을 챙겼던 위선자들이었다. 혹시 우리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삶이 아닌 것인지 확인 볼 필요가 있다. 

2절에 보면 ‘묵상하다” 라는 단어에는 선포하다, 주장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한 단어에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묵상은 혼자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선포는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소리 내는 것이다. 또한 ‘주야로” 는 하루 종일을 의미하는데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면을 채우고 그것이 내 말과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바로 복이 있는 사람이다. 

복이 있는 사람은 단지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나무 잎이 마르지 않고 늘 푸른 사람이다. 또한 복을 꽃 피우고 그 향기를 뿜어내고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 시대에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생각

 

사도행전 22:24-23:13
24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25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 사람이라 하니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29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30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훤화가 일어날쌔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12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3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더라

 

<설교 요약>

• 고난의 한 복판에서 다른 계획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유대인의 공회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고 다시 감금되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이 바울에게 너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들을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 안에 하나님의 성품들이 나온다. 첫째는 하나님은 그분을 거부하고 받아 드리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종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둘째는 하나님은 바울의 미래를 계획해 놓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상황이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우리들의 삶을 보면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의 연속 임을 알 수 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첫째는 하나님이 당신의 미래를 준비하심을 믿어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명에 순종하면 의, 식, 주 를 해결해 주심을 믿어야 한다. 이런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한가지 분명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 결과를 주께 맡기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사랑으로 한다
바울은 공회에서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지만 그 결과 누군가 믿었다는 사람은 없고 반대로 본인을 죽이겠다고 하는 40명의 무리와 그 당시 부활과 천사를 믿지 못한 사두개인들과 그것을 믿었던 바리새인과의 분쟁만 보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에게 너가 오늘 했던 증언을 로마에서도 할거라는 말씀만 하셨다. 바울은 단지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한 것이다. 또한 주님은 결과를 주께 맡기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사용 하신다. 당신은 성실하게 주님이 주신 사명에 순종하는가? 우리는 요셉과 게하시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위 상황도 중요하게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지만 우리 각자의 마음이 더욱 중요한 것을 증명해 준다. 두가지 마음의 싸움이 치열하게 우리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죄의 생각들이다.

• 두 마음의 싸움
바울은 자신의 내면에서 두가지 싸움을 발견했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자신이 원치 않는 악을 행하려는 마음이다. 로마서 7장 18-19절에 보면 마음의 법, 즉 하나님이 주신 계명인데 죄는 사랑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먼저 “생각” 부터 공격한다. 이 죄의 법이 나의 몸을 결박하여 죄수로 만들기 원한다. 그럼 이런 두 마음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수 있는가? 바울은 이 두 마음의 싸움 속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 이기는 열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법을 섬길 수 있는 마음도 주신다. 따라서 영적 전쟁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서 7장 25절에 보면 예수님을 믿고 자유케 되었어도 다시 죄의 법의 공격을 받게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믿은 후에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분의 선한 일 을 하고자 하는 갈망을 없애려는 공격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싸움에 이길수 있는 방법을 로마서 8장에서 가르쳐 주고 있다.

• 성령을 따라 살아라
로마서 8장 1-2절에 보면 성령이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고 말씀한다. 즉 성령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사단의 정죄로 부터 자유하다. 하지만 사단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계속해서 정죄감을 심어 주고 결국에 죄에 넘어지게 한다. 하지만 성령충만함으로 이런 음성을 듣게 되면 “너는 존귀하다. 너는 이미 죄의용서함을받았다” 라는 음성으로 듣게된다. 여기서 누군가는 죄를 짖고 정죄감이 없으면 어떻게 회개하겠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 성경말씀 밖에 없다
육신의 생각은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하지만 이길수 있는 것은 성령의 생각 뿐이다. 성령의 생각을 위해서는 불을 붙이는 기름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다. 
시편 103장 4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과 권세는 사랑과 긍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내면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상급이고 하나님이 주신 권세이다. 이러한 말씀의 기름을 통해 부어진 생각들은 더욱 성령께 붙들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줄 것이고 그 결과는 더 풍성한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해줄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사도행전 21:37-22:23
37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22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설교요약>

하나님은 그분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생명을 철저히 그 분의 임재로 감싸고 있으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고나 병이나 어떤 일로인해 일찍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이때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지 않으신 것인가? 라고 질문할수 있다. 그래서 '그분의 임재로' 감싸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요점은 육체적인 생명이 살았는가? 죽었는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고 있는가? 혹은 그 임재안에서 죽어갔는가? 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죽든 살든, 고난을 격든 형통의 일을 경험하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그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마지막 목적지는 소망이다. 이 소망은 하나님이 마 음에 주시는 어떤 희망이고 꿈이다. 환란에서 이 희망까지 오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그래서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감싸시고 있는 사랑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수 있는가?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려 한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23년동안 세월이 그가 예수님을 모르던 세월 과 너무나도 다른것을 직접체험 했기 때문이다. 예수 이름을 전해 주었을때 그 이름의 권세가 귀신들린  종을 자유케 했음을 보았다. 빌립보 감옥의 자신들을 때리던 간수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어떻게 기뻐하고 자유했는지를 보았다. 루디아가 어떻게 헌신하게 되었고 루스드라의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이 걷게 된 것을 보았고 어떻게 고린도와 에베소의 죄인들이 회개하고 그곳에 천국이 임했는지를 보았다.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사람은 바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기쁨과 평안의 폭포같은 은혜로 인해 감옥속에서도 천국을 살았다. 이 안에 '기쁨, 관용(gentleness), 평안, 기도, 감사' 가 모두 들어있다. 특히 그가 누린 '평안' 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은 NIV 에서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평안' 이라고 번역했다.

우리는 사고와 이해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사물과 상황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생각지 못한 시각과 이해로 불안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면 무엇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의 변화가 있다. 많은 경우 이 관점 때문에 미움, 거절, 관계끊음, 불안, 걱정 등의 감정이 증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가 기도할때 이런 관점들을 부수고 교정하고 분별케 해준다. 우리의 둔하고 어리석은 죄된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 기쁨, 소망 잠잠히 기다림, 낮은 마음등으로 채우신다. 이런 평안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도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필요와 감정들을 기도로 맡기며 아뢸때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의 좁은 이해와 생각을 초월하는 능력을 부어주신다. 잘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나의 갖혀있고 왜곡된 생 각들을 알게 해줌으로 넓은 시야 하나님의 초월적인 관점으로 인도하신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자신이 죽어도 천국에 갈수있다고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을 굳게 믿는 사람들은 이땅에서도 그 예수님을 굳게 믿기에 어떤 고통속에서도 천국을 누리고 경험하며 산다. 그러나 다음 세상에서의 천국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땅에서도 확신이 없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분이 나를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열쇠가 된다는 확신이 없기에 이땅에서도 내 삶의 모든 문제의 열쇠가 된다고 믿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 가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조그마한 미묘한 우리 내면의 불안과 근심에도 세심하게 신경쓰시고 안심 시키시고 평안을 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모든것이 되어 야 한다고 그의 간증속에서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과 환란의 목적지가 하나님의 소망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수있다. 첫째는 이미 이루어진 소망. 둘째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소망. 예수님 만나기 전의 우리가 가졌던 소망과 예수님을 만난후에 가졌던 소망을 비교해 보라.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날것이다. 세번째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형 소망이 있다. 미래의 소망에 대해 자신이 없어질때가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소망에는 모두 사랑이 필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은 이미 그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다고 한다. 예수님 안에 이 모든 축복들이 있다. 이해를 뛰어넘는 평안이 있 다.고난이하늘의소망이된다.그하나님이 주신 소망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묵고있던 지옥의 권세가 풀어지고 자유케 되며 이땅에서 천국의 평안을 누리며 살게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며 사는 사람들은 그 임재를 담고있는 예수님을 주고 싶어한다.

그럼 어떻게 이 천국을 담고있는 임재가 더욱 우리삶에 깊어질까? 사랑을 사용할때 그분의 임재가 더욱 깊어진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주셨기 때문입니다'(롬:5:5/새번역) 이 말씀에 의하면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이 없다고 두려워한다. 중요한것은 그 사랑을 사용하는것 이다. 그 사랑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 사랑은 성령을 통해 계속 우리의 마음에 부어진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길 원하는가? 그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행동으로 나누어 주라. 그 사랑을 다 나눠주어 기진맥진해 갈때 성령은 다시 그 사랑을 우리의 영혼속에 더 크게 부어 주실것이다. 

따로 떼어 놓은 은혜

로마서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설교요약>
이번 2018년 몽골 선교팀은 총 15명 이었다. 몽골팀 3명 (오랑거, 오농, 만두호이), 몽골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4명 (김선재, 서성원, 구나미, 홍평안), 한국에 있는 MMC 가족 3명 (박재성, 서가영, 박성진) 그리고 뉴욕에서 온 3명 (김정영, 장복근, 서난경), 3개의 나라에 흩어져 있는 총 15명을 따로 떼어 모으셨다. 몽골 울란바토르와 에데르네트(Erdenet)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울란바토르에서 순교하신 한국 목사님이 세운 한 몽골 교회에서 이틀간 찬양 집회를 했다. 몽골의 청년들과 사람들이 모였고 둘째날은 더 많이 모였다. 매 시간마다 성령을 부어 주셨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따로 떼어 놓은 시간과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후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의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 성령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영혼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다 성령이 하게 하시는 일이다. 울란바토르의 고아원 아이들은 하나님이 우리 팀이 만나게 하시려 따로 떼어 놓은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찬양 모임에 이틀 동안 참석해 맨 앞자리에서 하나님께 집중하며 예배했다. 우리팀들은 그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우리팀원 중에 MIU 교수로 섬기던 형제가 에르데네트로 향하던 밤 기차에서 은혜스런 나눔을 해주었다. 자신은 아버지의 권유로 중 2때부터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에 전도여행을 다녔다. 그러나 팀들은 일을 못하면 정죄를 받았고 긴장감이 있었으며 서로 미워하는 일들 자주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팀은 일을 실수해도 서로 격려하고 사랑했으며, 일 중심이 아닌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섬기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자신이 그리던 그런 공동체였으며, 이들을 통해 내면에 하나님의 풀어주심과 채워주심으로 감사한다고 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시기에 우린 예수님처럼 살게 된다.

2. 하나님이 주신 새 옷을 입게 하심으로
바울은 골로새서 1장에서 골로새 교인들이 이미 열매를 맺고 구원을 받았고 믿음의 소문과 영향력을 흘려 보내는 사람들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 새로운 옷을 입으라고 말씀한다. 새 옷을 입는 것은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자신을 계속 renew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새 옷을 입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려는 그리스도인의 본능을 따라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본능의 옷을 선물로 주셨다. 그옷을 입고 안입고는 우리의 의지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신 옷은 항상 새것이다. 이 옷을 입으면 닳지도 쇠하지도 않고 계속 아름답고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성품으로 유지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과 소망과 순결의 성품은 변질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성은 이러한 아름다운 성품들을 변질 시키고 하나님의 옷을 멀리하게 한다. 옷을 입을지 않을지는 우리의 의지의 결정이 뒤따른다. 오늘 당신이 생각하고 입어야 할 하나님의 성품의 옷은 무엇일까? 선교여행을 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천국을 경험한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하는 은혜와 기쁨을 팀원이 나누어 주었지만, 동시에 우린 이 기간 동안 우리 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죄성과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되는 모습을보게된다.마지막날 아침 큐티를 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죄와 약함을 솔직히 나누었다. 이런 깨달음은 우릴 더욱 하나님의 성품의 옷을 입도록 인도해 준다. 하나님이 당신을 깨끗케 하려고 잘라내고 있는 성품과 습관, 관계들은 무엇인가? 만약 이런 일들의 우리의 삶에서 일어 나고 있다면 하나님이 우릴 따로 준비 시키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3. 희망이 아닌 믿음으로 살게 하심으로
사람은 자신의 모든 희망이 사라져 갈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믿음만이 이 불가능한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만약 자신이 그냥 소망한 일들이 쉽게 이루어 지면 소망이 믿음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냥 소망에서 멈추게 된다. 그러나 불가능한 상황이 되면 믿음이 싹트기 시작한다. 소망은 대상이 필요 없다. 하지만 믿음은 반드시 대상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소망에서 믿음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각자의 소원을 가지고 소망한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전혀 접촉이 없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과 대화하게 하고 그 대화 속에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한다. 또한 그분의 평안과 기쁨과 사랑이 우리의 영혼에 흘러오게 된다. 사람들은 믿음이 강해지길 원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주목하면 믿음은 자동으로 성장한다. 아무리 믿음을 강하게 하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이 없으면 약해지고 불가능 해진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나를 통해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 감사하며 하나님을 추적하라. 그분의 약속을 추적하라.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가복음 8:4-18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네가지 밭의 비유
오늘 본문의 “네가지 밭의 비유” 중 씨가 뿌려진 첫번째 밭은 길가였다. 사람과 동물의 왕래가 많은 길가의 씨앗은 심기기도 전에 밟히거나 먹혀 사라진다. 첫번째 밭인 길가는 생각이 분주해 들은 말씀이 흩어지는 사람을 의미한다. 두번째 밭은 바위다. 바위 위에 얇은 흙에 있던 탓에 씨앗은 순간 싹은 돋았으나 수분이 없어 금새 말라 죽는다. 이 역시 말씀이 전해진 듯 하나 심기지 못하고 생명 또한 없음을 나타낸다. 세번째는 조금 특이하다. 땅에 잘 심겼으나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 햇빛과 양분을 뺏겨 열매를 못맺게 된 밭이다. 말씀이 안에 있으나 미래에 대한 걱정과 세상 향락으로 열매 맺지 못한 사람들을 뜻한다. 마지막 밭은 ‘좋은 밭’, 즉 말씀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비유하신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 모두에 등장하는 이 비유가 담긴 본문 10절에서 예수님은 또다른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비유는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단순 명료하지만, 숨겨진 진짜 메세지가 있어 누구나 깨닫는 건 아니라고 하신다. 즉, 본문에서처럼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그 비유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 듯, 비유로 된 주님의 말씀을 진실로 묻는자들에겐 그 뜻이 가리워지지 않으나, 헛투로 듣는 자에겐 영원한 비밀로 남게 된다는 말이다.  

등경의 비유
‘네가지 밭의 비유’ 뒤로 이어지는 ‘등경의 비유’ 에는 또다른 메세지가 담겨 있다. 본문이 거의 흡사한 마태복음 5장의 ‘동경의 비유’와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들에게 본이 될 우리의 적극적 착한 행동을 강조한 마태복음과 달리, 있다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빛의 특징이 누가복음에서는 드러난다. 두 비유를 통해 말씀을 듣는 자들의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그리고 말씀에 대한 태도로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누신 것과, ‘빛이 있어서 빛이 나타나는 자와 빛이 없는 자’. 즉, 빛의 특징을 닮은 것으로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신 것을 알 수 있다. 이 비유들에 담긴 메세지들은 결론적으로  가시밭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면, 이 부류의 사람들은 열매는 없지만, 생명은 있다고 생각했는데…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라 경고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 삶에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자신의 삶도 바꾸지 못하는 진짜 빛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진정한 빛이 있느냐? 

비유에 담긴 경고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은 모두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네 가지 밭으로 대변되는 네 부류의 사람들 모두가 있을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우리 중에 없길 바라지만,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생각들로 가득차서 말씀은 밟혀 버리거나 먹혀버리는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스스로도 속고 있을 수 있어 가장 위험한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도 교회 안에 있다. 본문의 비유에 따르면, 이 분들은 예배 속에서 찬양할 때 누구보다 큰 감격을 경험하고, 말씀을 들을 때 큰 행복, 기쁨으로 받는, 누구보다 ‘좋은 밭’으로 비춰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당을 떠나 조금만 지나면 그 싹은 말라버리고, 바로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말씀을 듣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큰 갈등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 나온다는 사실 외에 세상 사람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아간다. 왜 그럴까? 그들은 아직 세상에 속해 있고,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세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들 역시 교회 안에 있다. 제가 생각할 때 좋은 밭에 속한 분들도 일시적인 기간 동안, 이 세번째 밭과 같은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연인이 생기고, 돈이 생기고 뭔가 바라던 좋은 일들이 일어나서 그 유혹들에 마음을 빼앗겨서 말씀이 삶에서 전혀 열매 맺지 못하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이제 믿기 시작한 분들도 믿음과 삶의 불일치를 한동안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수개월 동안 그 상태가 지속되면, 과연 그 안에 빛이 있을까? 생명이 있는가? 의심해 봐야 한다. 참 빛은 결코 가려지지 않고, 결국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세가지 밭에 속한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들이 아니다. 다른사람은 물론 우리 스스로를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다. 이 세가지 밭에 속한 사람은 인정하든, 인정 하지 않든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경고 속에 담긴 구원
그러나, 경고는 언제나 구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처럼 오늘 이 네가지 밭의 비유는 주님께서 교회에게 너희가 어디 있는지, 너희의 상태가 어떤지 깨달아라!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 있는지 영적인 눈을 뜨고 진리를 보아라! 그리고 돌이켜 좋은 밭이 되거라! 그러면 너희에게 안전을.. 그리고 백배의 열매의 선물들까지 줄 것이다라는 메세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 이것은 복음이고, 간곡히 “돌아오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외침이다. 네번째 밭의 비유처럼 좋은 밭이 된다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내와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바보 같이 듣는 여러분들을 통해 결국 세상도 감동을 받고, 우리가 뿜어내는 진정한 빛,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죄를 이기게 하는 사랑

예레미야 2:1-13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찌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3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 야곱 집과 이스라엘 집 모든 가족아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간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7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 
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9 그러므로 내가 여전히 너희와 다투고 너희 후손과도 다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 이같은 일의 유무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찌어다 심히 떨찌어다 두려워할찌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설교요약>
예레미아 2:13 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음을 볼 수 있다.
첫째, 생수의 가치를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렸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사랑해야 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주고, 보살펴야하는 영혼에게 평가를 내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 주고 있지는 않는지, 또한 내가 예배하고 섬겨야 할 곳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원망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멀리하고 헛된 것을 쫓아 우상에게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가치를 세상의 가치과 비교했다.
하나님을 섬기며 우상을 함께 섬긴다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하며 세상의 방식을 따르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어떤 가치와도 비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신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 고민할 때, 우리 때문에 우리의 직장과 삶에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무감각하게 살았다.
우리가 당장 우리 눈 앞의 웅덩이에 집중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며 살아가다보면 생수이신 하나님이 필요 없어진다. 하나님을 찾는 감각이 무뎌진다. 하나님 말씀 없이 사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 없이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을 의지하게 되고, 세상의 가치만으로 삶의 중요한 결정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하나님은,
1.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 7절에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다’ 말씀처럼 이스라엘을 위해 특별히 공급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날마다 새로운 말씀으로 적셔 주신다
2.  변함 없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 2절 '청년의 때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변함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셨다. 다윗과 엘리야 또한 광야의 시간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경험하는 특권을 누렸다. 우리 또한 광야와 같은 시간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신앙 최고조의 시간이다.

3. 하나님은 온전한 사랑을 주셨다 – 3절에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라고 하셨다. 유다 백성을 첫 열매로 전세계에 선포하시며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첫 열매로 여기셨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다. 이스라엘을 공격을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으로 여기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우리는 거룩하게 살도록 해야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림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된 가치를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허망한 것들을 찾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를 통해 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너와 함께한 신혼의 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고 말하신다. 웅덩이를 판 우리가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 할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소중한 첫사랑을 다시 고백하며 하나님보다 더 가치를 두고 살았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오직 그분 앞에 사랑을 고백할 때 우리의 죄악이 떠나갈 것이다. 우리 모두는 소중한 존재다.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첫 열매다. 우리 죄를 숨기고 죄를 만해 하려고 또 다른 웅덩이를 파고 있는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신다. 하나님을 향한 봉사와 헌신이 웅덩이가 되지 않게 하자.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시는 그분께 돌아가자. 광야에서 배운 그 첫사랑을, 아무도 알 수 없는 신혼의 사랑을 들고 주님께 나아가자

하나님의 기쁨

시편 147:11
11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설교요약>
'주님은 오직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과 당신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좋아하신다'(시편 147:11)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변하지 않으시기에,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을 바라는 자들을 책임질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
'주님이 이 땅에 명령만 내리시면 그 말씀이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양털 같은 눈을 내리시며 재를 뿌리듯 서리도 내리시며, 빵 부스러기 같이 우박을 쏟으시는데 누가 감히 그 추위 앞에 버티어 설수 있겠느냐?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보내셔서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니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어 흐른다'(시편 147:15-18) 보면 하나님의 말씀엔 능력이 있다. 즉 말씀이 온 창조물과 사람의 마음을 얼어 붙게도 하시고 녹이기도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군가에 게는 더욱 마음을 강퍅하게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물처럼 녹게 해서 죽어가는 영혼에게 생명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 보면 당신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야고보의 의심과 파도의 비유를 통해 묵상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할 때 쓰러질 수 있다. 즉 의심하지 않고 구하고 믿는 기도는 하나님을 누리고 풀어지고 자유를 주고 기쁨을 주고 축복을 가져다 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대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광야에서 방황할 때 만난 나발은 악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움과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악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페르시아의 왕비였던 에스터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에 만족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까지 나아갔고 그 결과로 고난에 빠진 유대인들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고 기다리는 자를 기뻐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겸비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려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찢어진 날개

시편 143:8
8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설교요약>
'내가 주님을 의지하니 아침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말씀을 듣게 해 주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께 의지하니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십시오' (시: 143:8) 다윗이 매일 아침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되새겨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 하는 것 을 어떻게 보여 주시는가?

날게 하시는 하나님
'날아가거나' 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것은 자유를 의미한다. 하늘에 나는 새도 하나님 의 뜻이 아니면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하늘을 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임을 알게 해준다. 레위기 1:17에 보면 하나님은 짐승을 불살라 드리는 번제 중에 비둘기를 드릴 때 날개를 찢되 아주 몸에서 분리시키지 못하게 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찢으지고 다시 그분의 사랑으로 꿰매셔서 날개를 펴서 넓은 창공을 날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의 삶에 꿈꾸었던 일들이 찢어질 때 다시 꿰매어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시 날개를 펴서 날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해야 한다.

찢어진 날개를 다시 꿰매시는 방법
누가복음 2장 34-35절에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 중에는 예수님께서 하시게 될 3가지 사역의 특징이 들어있다. 3가지 사역을 통해 그분의 자녀들의 찢어진 날개를 꿰매어 다시 날개 하시는 놀라운 능력이 들어있다.

첫째. 많은 사람을 파괴 시키고 일어서게도 하시는 사역이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소유가 그리워서 였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죄를 회개하려고 한것은 그분의 소유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배고픈 처지때문임을 알게 해준다. 그렇기에 그가 집에 돌아와서 잘못을 뉘우치고 겸손하게 아버지에게 굴복한다해도 내면의 거짓의 벽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아들의 내면의 거짓된 벽을 허물었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적이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을 알 면서도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도와주시고 다시 죄의 냄새로 쩔은 나를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야 한다. 이때 찢어진 날개는 다시 창공을 향해 펼쳐지며 그분이 인도하신 길로 날아갈 것이다.

둘째. 많은 사람의 비방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비방과 대적들도 많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찢어진 날개를 다시 꿰매 다시 날게 하기 위해 주님을 위해 '비방 받는' 경험을 하게 하신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가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때마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미움 받음을 생각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미움을 받거나 혹은 그와 유사한 미움을 받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미움 속에서 넓고 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성숙하게 된다. 이때가 찢어진 날개가 꿰매어 지는 시간이다.

셋째. 마리아의 심장(마음) 이 예수님 때문에 슬픔의 칼에 찔릴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 사람들의 내면 안에 있는 칼을 만난다. 슬픔의 칼, 분노의 칼, 미움의 칼, 시기의 칼, 증오의 칼, 정욕과 탐욕의 칼, 교만의 칼...... 우리는 예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역 을 할 때 많은 칼에 찔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와 열매의 기쁨에 비교하면 그것은 모래 사장에 가끔 밟히는 조개 껍질 정도 밖에 안 된다. 이 조개 껍질 때문에 해변의 모래사장을 걷고 누리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칼에 한번씩 찔릴 때 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날개를 더욱 크게 확장 시키신다. 더 높이 더 넓게 날게 하신다. 더 많은 열방의 영혼들을 품고 치유하고 사랑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두 팔은 비둘기 날개처럼 찢어져 십자가에 달렸다. 그러나 그 두 날개 안에서 많은 열방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옥의 삶이 천국이 되고 있다.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상처가 치유되고 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용서받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가지 예수님의 사역의 특성을 기꺼이 행할 사람을 찾고 있다. 그들의 찢어질 날개를 이 세가지 일을 통해 다시 꿰매 날게 하시고 싶어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빌립보서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설교요약>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사야 59:1)  태어 나면서 부터 죄는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과 단절 시킨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후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나무 열매를 먹게 하셨지만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후에 뱀이 선악과 앞에선 하와를 향하여 하나님이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 라고 물었을때 하와는 죄를 짓기 시작했다. 
 
첫째. 하와는 자신이 죄를 지을수 있는 길을 열어놓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바꿨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라고 하셨다. 그러나 하와는'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3) 라고 대답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고 자신의 정욕을 합리화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굴복시키는 것이다.
 
둘째. 하와의 죄는 하나님을 속이는 분으로 본것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뱀을 이용한 사단은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이 같이 되기에 못먹게 했다는 말을 하와에게 했다. 사단은 하나님을 무조건 나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이성에 의혹을 불어 넣었다. 사단은 오늘도 이성적인 논리로 사람의 생각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선하지 않은분임을 주입시킨다. 이것에 넘어가는 것이 죄다. 
 
세번째. 하와의 죄는 하나님 같이 될려고 한것이다. 뱀은 선악과를 보며 갈등하는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라고 속삭였다. 오늘도 사람들은 선행, 성공, 희생, 권력,돈, 불가능에 도전, 업적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같이 추앙받고 싶어한다. 하나님 같이 되고 싶은 죄의 본성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드러난 죄보다 예수님 없는 자선과 희생과 모험과 도전과 업적속에서 더 많은 인간의 교만과 세련된 교활함과 우월감이 존재한다. 

네번째. 하와의 죄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그 나무를 보고 마음으로 죄를 지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창:3:6) 성경은 행하지 않았어도 마음으로 짖는 죄의 심각성을 이야기 한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어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지 불순종 할지를 스스로 선택해야 했고 그런 자유의지가 있었다.

하와의 4가지 죄 유형안에 우리가 짓는 모든 죄들이 다 들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을 만지고 이땅에서 천국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다. 
 
누군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반대의 삶을 사는것을 죄라고 하며 간섭하고 정죄하면 그것 또한 억압과 폭력이 아닌가?' '왜 아들 까지 보내 믿으라고 하면서 우릴 부담스럽게 하는가?' 라고 반문할수 있다. 이때 하나님은이렇게 물으신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다른 사람 만나 잘 살아야 하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왜 그토록 불행한가?’ 예수님은 반석위에 집을 짓지 않은 사람은 모두 비바람의 불어닥칠때 모두 무너질것이라고 하셨다. 열매가 바뀌려면 나무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포도열매를 원하면 가시나무는 먼저 포도나무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내 삶의 뿌리로 놓지 않고 돈과 세상정욕과 자기자신과 사람과 성공과 자랑과 우월감을 뿌리로 기초로 놓으면 언젠가 포도열매가 아니라 가시가 열매로 맺힌다.

예수님이 사랑과 믿음이 당신의 가장 중요한 위치가 아니면 언제가 그 무너짐이 심할것이다. 한 순간에 그동안 쌓았던 모든것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님의 그 말씀, 뿌리를 종자를 바꾸라는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당신의 모든것으로 두었다면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쳐 와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무너진다 해도 하나님이 다시 순식간에 세워 주실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뿌리채 바뀐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삶의 홍수와 파도가 다가온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더욱 빨리 크게 열매를 맺고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게 될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한다.  
 
나의 삶의 뿌리가 바뀐 구체적인 증거에 대해 성경은 '성숙' 이라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기를 원하신다. 예수님 처럼 그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하여 예수님 처럼 살길 원하신다. 

내 안에서 자라가는 예수님의 인격 4가지 
첫째. 헛된 속임과 이기적인 야망의 마음으로 어떤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경쟁심과 허영이 없는 마음의 특징은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겸손으로 나타난다. 
둘째. 나의 관심이 아닌 타인의 관심을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늘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보셨다. 타인을 향한 관심은 보는것에서 시작된다. 
세째.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 사람이 누군가를 섬기고 자신을 비우는 가장 첫번째 단추는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것이다. 예수님의 순종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한다. 종으로 섬기며 사는 것은 자존감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다. 그 자존감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다. 
네째. 일시적인 순종이 아닌 죽는 순간까지 순종하신 인격이다. 예수님의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자신이 원치 않으실 때도 순종하셨다. 순종이 두려워 질때는 그것을 위해 기도하시고 하나님께 물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복종시키셨다. 

예수님 처럼 되라고 하신 이유 
바울은 이 예수님의 4가지 인격의 특성을 품고 예수님 처럼 살라고 하셨다. 그 목적은 첫째: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품을때 그 사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무릎꿇고 예배하는 일을 일으키시기 위함이다. 둘째: 하나님이 이런 일을 나를 통해 이루실때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당신이 오늘 이땅에 존재하는 이유다.

감추어진 보호

사도행전 21:1-36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설교요약>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과 환란이 기다린다는 성령의 증언들을 들었다. 그럼에도 주저함 없이 예루살렘으로 출발해, 배를 타고 이스라엘의 북쪽 두로에 도착했다. 두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 우상들의 근원지였고, 이스라엘 전역에 우상이 들어오게 했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도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역사를 가진 두로에 바울이 도착했음에도 그곳에는 이미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두로에 교회가 생긴 역사를 되짚어 보면, 21년전에 예수님에게 56km 의 거리를 걸어와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자신의 나라 두로 사람들에게 전해주었고 그 소식을 들은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보자 마자 준비되었다는 듯이 예수님께 나가 무릎 꿇고 큰 믿음으로 간구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로부터 약 28여년 후에 바울은 자신의 생애에 큰 환난을 앞둔 시기에 두로의 제자들로부터 위로와 따뜻한 환대를 받고 있었다.

특히 이 두로의 귀신들린 딸문제로 예수님께 나간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 라며 거절감을 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거절감 어린 말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믿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 15:27) 예수님은 짧은 시간에 이 여인의 소원을 들어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믿음을 강하게 훈련 시키셨다. 하나님이 이 여인을 통해 주시는 음성은 하나님에게 거절감을 느끼는 상황을 맞이해도 사랑받고 있는 사람임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말하며 산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이 오거나 반대로 안락하고 편안한 삶이 되면 너무도 쉽게 그분의 나를 향한 사랑의 감각을 잃어 버리게 된다. 이것에 대해 기독교 작가 필립얀시가 지적한 톨스토이와 도스 토예프스키의 이야기를 나눠본다.

톨스토이는 온갖 규율과 말씀을 지키는 척 하지만 결국은 위선적인 자신의 모습만을 발견해 가다 결국 부랑자로 죽었다고 하며,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음울한소설을 쓰고 술과 도박으로 건 강과 재산을 탕진했지만, 죄를 짓고 체포되어 죄수용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 어느 여인을 통해 성경한권을 전해 받고 신약성경을 통독한다. 그는 감옥에서 인간을 악의 절정을 보게 되고 또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만나게 된다.

바울은 두로 가이사랴를 거처 이스라엘에 도착하고 7일째가 되었을 때 그가 율법을 비방하고 성전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돌로 쳐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천부장으로 군인들을 모아 현장으로 가게 해 바울을 지켜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전 여러번 그가 위험에 처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셨지만, 보호를 예비해두신 것은 미리 알려주시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는 그의 삶의 결단과 함께 미래의 축복을 말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가 주님을 따르는 시간이 오래되어 갈 때 주님은 고난(이삭 바침) 만 이야기 하고 이삭대신 양을 메 놓을 것이나 그 고난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그를 향한 축복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시어머니를 따라나선 룻에게도 앞으로 있을 고난만 예견 되었지 그녀를 향한 보아스 와 영적인 축복들을 조금도 이야기 해주지 않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성품 중 하나다. 하나님은 때론 고난과 함께 축복도 말씀하시지만 때론 앞으로 겪게 될 고난만 말씀 하시고 보호와 축복은 감추시기도 한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의 사랑을 보고싶어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 한 많은 말들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향한 사랑을 삶으로 행동으로 순종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향해 아무런 유익이나 번쩍거리는 찬사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함께 있어주고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약속해 준적도 있지만 장차 있을 고난만 이야기 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사랑의 고백을 듣는 것뿐 만이 아니라 보고싶어 하셨다. 이것이 보호 와 축복을 감추신 이유다.

홀로 걸어야 하는 시간

사도행전 23:13-38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설교요약>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지않고 도보로 하루가 걸리는 거리를 홀로 간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홀로 있는 시간동안 성령께서 예루살렘에서 있을 환난과 고난을 미리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오면 본능적으로 사람을 찾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이 찾아오면 먼저 하나님을 찾는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의 앞에 그 어떤 환란과 고난을 성령 으로 직감하고 혼자가 아닌 하나님과 함께 걸었던 것이다.

• 고난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받을 고난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급히 가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게 확고하게 자신이 갈곳과 있어야 할 곳을 알수있었던것은 바울이 하나님과 홀로 있던 시간에 얻어진 것이다. 우리가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 깊어질때, 혹은 혼자 있을때도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는 축복이 주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가야 할 곳이 어려운 곳인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길 원하시는 곳인지를 결정하고 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님도 성만찬 후에 체포될 것 을 아셨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에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삶에 기쁨과 하나님을 사랑함이 있다면 당신은 홀로 하나님 앞으로 나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반대로 당신의 마음에 기쁨이 점점 희미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희미해 지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 보다 다른것에 더 집착해 가고 있는 사람일수 있다.

• 혼자 있을 때 자신의 헌신과 희생의 분명한 목적을 알게 된다.
바울이 미둘레네에서 에베소의 지도자들과 다시 말씀으로 훈련하며 이 두 가지를 상기시켰다. 첫째는 바울의 헌신의 목적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길 원하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헌신과 희생이 삶의 목적이 되면 위험하게 된다. 희생과 헌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목적이다. 그 목적이 상실하면 희생과 헌신이 자기의 우상이 된다. 당신의 희생과 헌신으로 한 영혼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만나는지 명심해야 한다.

• 홀로 있는 시간은 성령이 사람들을 감독자로 세우고 인도하고 계심을 보게 해준다.
28절에 보면 바울은 두란노에서 12명의 제자를 세우고 양육한 것이 본인의 노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성령님이 감독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영혼이 약해질 때 나타나는 증상 중에 하나는 내가 모든 것을 하고 있다라고 하는 생각이 증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야만 볼 수 있는 일이다.

• 홀로 있는 시간은 사랑과 정이 있는 사람으로 세운다.
36-38절에 보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임하면 매정하고 냉정하던 사람이 사랑과 정이 많은 사람으로 바뀐다. 또한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보면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사람이 성장하는 것을 알고 있다. 말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미숙함을 깨닫는다. 깨달으면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꾼다. 그리스도인은 사랑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고민한다. 원수도 사랑하라 했는데 원수가 아닌데도 사랑이 가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고민한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을 기대하면 안 된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옮기고 떠나야 한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할 때 우리의 사랑은 점점 성숙되어 간다. 바울은 오래 참았다. 바울은 불같은 그의 성격을 온유함으로 변하려 생각했고 깨닫고 성장해 갔다.

우리는 홀로 있는 시간들을 통해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들 을 통해 다시 순수한 정과 눈물과 인간미를 회복한다. 사람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자신의 마음에 정과 눈물과 인간미를 잃고 냉정하고 무정해 질 때다. 이런 내면의 정과 사랑은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면서 깊은 자존감과 내면의 견고함을 갖게 해준다. 

깨어 있는 감사

골로새서 4:2
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설교요약>
• 감사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이다
성경에는 '깨어 있으라' 라는 말씀이 많다. 감사 속에는 사랑, 겸손, 진실, 섬김, 기쁨, 소망이 모두 들어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는 사람에게서는 쉽게 교만함을 찾아볼 수있다. 그 교만 안에는 위선, 미움, 슬픔, 절망도 함께 있다.

• 원망할 때 모든 축복은 불행으로 바뀐다
광야에서 모세의 명령을 받고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보낸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이 재앙으로 죽고 오직 2명만이 생존했다. 이런 결과의 원인은 감사와 원망에서 비롯되었다. 죽은 10명은 원망했고, 그 원망에는 세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했다. 이들은 자신들만 원망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실 축복들을 원망하게 했다. 둘째, 아직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그 땅을 악평했다. 셋째,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고 남들도 원망하게 했다. 살아 남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감사의 특징도 세가지였다. 첫째, 이들은 온 회중으로 감사하게 만들었다. 둘째, 하나님이 약속한 그 땅을 그냥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심히 아름답다고 했다. 셋째, 지도자를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 '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민:14:9) 며 사람들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존중하게 했다. 결국 원망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려 했던 모든 축복을 발로 걷어찬 셈이 되었다. 그러나 감사한 사람들은 그 모든 축복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밟는 축복을 누렸다. 바울은 구약의 이런 사건을 거울로 삼고 원망치 말고 감사하라며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9-10) 신약의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불평하고 원망한 내용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보통 오랜 시간 공동 생활을 하다 보면 불편함 점이 많고, 그 가운데 서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특별히 제자들의 불평 불만을 한 기록들이 없다.

• 막막한 상황이 와도 먼저 다시 감사하라
그러나 그렇다고 딱히 감사를 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하셨던 예수님에게서 감사의 모습이 드러난다. 오천명의 굶주린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주님께 드린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개를 가지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gave thanks)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6:11) 예수님은 어떻게 이 작은 음식으로 오천명을 먹일 수 있나요? 라며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막막한 현실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셨다. 이 말씀을 기록한 저자는 사도 요한 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감사의 모습을 그냥 건성으로 보고 지나갈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먹고 남은 조각들을 모두 버리지 못하게 하시고 바구니에 담게 하신 것도 기록했다. 또한 바로 후에 다시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사천명이 먹고 남은 것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게 하셨다. 이 것은 후에 배고플 때 먹게 할 용도로도 모으게 하셨지만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들을 잊지 말고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먼저 감사하고 그 은혜를 붙들고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증거가 거둔 일곱 광주리 떡 다음 이야기에 있다.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건너편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떡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이스트(누룩)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스트처럼 작은 그들의 영향력에 빵 전체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쉽게 착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한 영향력이 퍼지는 것에 대한 경고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룩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이 일곱 광주리 거둔 떡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것 때문에 그런 줄 알고 서로 눈치를 보면 이야기 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개로 사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마:16:9-10)

• 떡과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물고기는 훈제 되었거나 이미 요리가 되있었던 한 끼 음식이었음을 고려할 때 말라 비틀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온몸이 비틀어지고 일그러지는 고통을 상징한다. 따라서 열 두 광주리와 일 곱 광주리에 거두게 하신 떡과 물고기는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예수님이 주신 구원을 한시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우리는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빛 안으로 들어왔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어둠에서 구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가?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이 와도 열 두 광주리를 붙들고 먼저 감사하는가?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직 주시지 않았지만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갈렙처럼, 여호수아처럼 먼저 감사하는가?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