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걸어야 하는 시간

사도행전 23:13-38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깨어 있는 감사

골로새서 4:2
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설교요약>
• 감사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이다
성경에는 '깨어 있으라' 라는 말씀이 많다. 감사 속에는 사랑, 겸손, 진실, 섬김, 기쁨, 소망이 모두 들어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는 사람에게서는 쉽게 교만함을 찾아볼 수있다. 그 교만 안에는 위선, 미움, 슬픔, 절망도 함께 있다.

• 원망할 때 모든 축복은 불행으로 바뀐다
광야에서 모세의 명령을 받고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보낸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이 재앙으로 죽고 오직 2명만이 생존했다. 이런 결과의 원인은 감사와 원망에서 비롯되었다. 죽은 10명은 원망했고, 그 원망에는 세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했다. 이들은 자신들만 원망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실 축복들을 원망하게 했다. 둘째, 아직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그 땅을 악평했다. 셋째,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고 남들도 원망하게 했다. 살아 남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감사의 특징도 세가지였다. 첫째, 이들은 온 회중으로 감사하게 만들었다. 둘째, 하나님이 약속한 그 땅을 그냥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심히 아름답다고 했다. 셋째, 지도자를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 '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민:14:9) 며 사람들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존중하게 했다. 결국 원망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려 했던 모든 축복을 발로 걷어찬 셈이 되었다. 그러나 감사한 사람들은 그 모든 축복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밟는 축복을 누렸다. 바울은 구약의 이런 사건을 거울로 삼고 원망치 말고 감사하라며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9-10) 신약의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불평하고 원망한 내용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보통 오랜 시간 공동 생활을 하다 보면 불편함 점이 많고, 그 가운데 서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특별히 제자들의 불평 불만을 한 기록들이 없다.

• 막막한 상황이 와도 먼저 다시 감사하라
그러나 그렇다고 딱히 감사를 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하셨던 예수님에게서 감사의 모습이 드러난다. 오천명의 굶주린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주님께 드린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개를 가지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gave thanks)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6:11) 예수님은 어떻게 이 작은 음식으로 오천명을 먹일 수 있나요? 라며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막막한 현실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셨다. 이 말씀을 기록한 저자는 사도 요한 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감사의 모습을 그냥 건성으로 보고 지나갈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먹고 남은 조각들을 모두 버리지 못하게 하시고 바구니에 담게 하신 것도 기록했다. 또한 바로 후에 다시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사천명이 먹고 남은 것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게 하셨다. 이 것은 후에 배고플 때 먹게 할 용도로도 모으게 하셨지만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들을 잊지 말고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먼저 감사하고 그 은혜를 붙들고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증거가 거둔 일곱 광주리 떡 다음 이야기에 있다.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건너편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떡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이스트(누룩)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스트처럼 작은 그들의 영향력에 빵 전체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쉽게 착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한 영향력이 퍼지는 것에 대한 경고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룩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이 일곱 광주리 거둔 떡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것 때문에 그런 줄 알고 서로 눈치를 보면 이야기 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개로 사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마:16:9-10)

• 떡과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물고기는 훈제 되었거나 이미 요리가 되있었던 한 끼 음식이었음을 고려할 때 말라 비틀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온몸이 비틀어지고 일그러지는 고통을 상징한다. 따라서 열 두 광주리와 일 곱 광주리에 거두게 하신 떡과 물고기는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예수님이 주신 구원을 한시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우리는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빛 안으로 들어왔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어둠에서 구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가?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이 와도 열 두 광주리를 붙들고 먼저 감사하는가?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직 주시지 않았지만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갈렙처럼, 여호수아처럼 먼저 감사하는가?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것이다. 

살아야 할 청년 유두고

사도행전 20:1-12
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 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설교 요약>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열심히 하나님이 계신 여러 모임에 참석해도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음을 청년 유두고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유두고처럼 죽어버린 이 시대의 청년들의 영혼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다음 4가지 영적 원리를 기억하자.
첫째, 먼저 청년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둘째, 삶으로, 행동으로, 말씀대로 사는 모습의 본을 보여준다.
셋째, 어떤 형태로든 영적으로 죽어 있는 청년들을 계속 끌어안고, 말씀을 심어주고, 사랑을 주고, 지도자로 세워주려 한다.
네째, 소망을 주고,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그들 곁에 서 있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유두고의 이야기를 바울의 드로아 사역 중  대표적 일로 기록하게 하신  이유는 청년의 때에 살아 있는 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삶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청년에 때에 하나님이 낛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찾으면 기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낛’, ‘기쁨'인 것이다.

둘째, 노년의 때에는 생각해 내는 일이 어렵고 받아들이는데 둔해지기 때문이다. 
청년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가장 크게 누릴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을 만지실 때 흘러나오는 통로다. 이 때의 생각들은 하늘의 영감과 통찰력과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확신과 소망들로, 그것들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을 보고 체험하는 축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연로해지면 생각도 노쇠해지고, 영감과 소망도 현저히 약해지므로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열정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체험하는데 헌신한다는 것이다. 체험의 가장 큰 장애물인 ‘실패에 대한 두려움’ 또한 수많은 실패의 체험을 통해 제자들이 스스로의 연약함을 보고 주님을 어떻게 신뢰하게할지 깨닫게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도 극복할 수 있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상황과 타인의 평가를 너무 두려워만해서는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없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주실 때 열정적으로 체험하고 도전하라. 그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두 가지 평안

요한복음 14: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017 CROSS 특별 예배

<설교요약>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두 가지 평안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과 세상이 주는 평안이다.

• 세상이 주는 평안
첫째: 탐심과 연결되어 쉴 수 없는 평안이다(눅12:19)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부자가 많은 재산을 쌓아 놓고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속삭인다. 이 사람의 평안은 자신의 재산과 소유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소유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소유에 생명을 걸고 사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에 대한 해결점은 20-21 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세상의 평안은 탐심과 연결되어 있고 그 탐심은 상황에 따라 사람을 쉬지 못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의 탐심으로부터 오는 평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가려면 자신이 가진 소유를 하나님의 자리에 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오늘 생명을 잃으면 그 소유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가진 소유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천국의 평안이 오기 때문이다.

둘째: 고통과 상처와 천대를 주는 평안이다(요19:3)
요한복음 19장 3절에 보면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에게 고통과 치욕, 멸시를 주기 위해서 왕이나 귀족들이 입었던 자색 옷을 입히고 손으로 때리면서 평안하라고 속삭였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다. 이러한 세상의 평안은 예수님의 몸에 자색 옷을 입혀 주는 것처럼 일시적인 고통을 잊게해 주지만, 후에 수치와 고통, 두려움이 동반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결과를 알면서도 이 세상의 평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그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것일까?
첫째: 예수님의 평안은 예수님의 은혜로 치유 받았지만 스스로를 부정한 존재로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평안이다. (막5:33-34)
마가복음에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나온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한 번만 만지면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고, 병이 낳았다. 하지만 그녀는 유대교의 율법 때문에 두려워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을 믿으면 성경 말씀대로 살지 못할거라는 죄책감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여인처럼 예수님이 부르실 때 여전히 예수님과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 느끼며 살 수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 5장 33-34절에 보면 예수님은 여러가지 은혜의 통로를 통해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평안함과 자유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평안이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 보면 예수님의 평안이 임하면 내일 일에 대해서 준비해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축복이다. 세상의 평안은 불안이 올 때 세상의 일시적인 쾌락과 흥분을 주는 곳으로 도피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두려움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그것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불안과 두려움의 일상 속에서도 기도를 통해 오히려 더 큰 평안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경험하게 된다. 내일 일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내일' 이라는 명사는 인격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일을 주장하고 있는 인격이신 하나님이 내일을 주관하도록 맡기라는 의미가 된다. 내일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라. 그 분이 우리의 내일을 미리 준비하시고 인도하신다.

빛의 권세

에베소서 5:8-11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설교요약>

빛은 어두음을 드러낸다. 어두움은 사람들의 내면, 즉 영혼 안에 남아 있는 어두움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빛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려 할 때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한다. 삭개오가 세리장이었을 때 인파를 뚫고 예수님께 나아가려 했으나 사람들이 길을 내어주지 않아 예수님께 다가갈 수가 없었다. 결국 삭개오는 나무위로 올라가서야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 결국 그를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막은것은 사람들(어두움) 인 것이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성도를 대상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빛으로 어두움을 밝혀라”는 것은 어두움에 참예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물드는 것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어두움은 열매가 없고, 있다면 파괴적인 열매 뿐 이고 빛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어두움이 우리를 막는 것이다. 

우리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빛의 열매는 9절의 말씀처럼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은 나무였다. 여기서 나무는 삭개오의 원함을 이루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했다. 나무는 또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결국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고, 혹은 만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극적인 일들이 사람을 통해서 일어난다. 나는 누군가의 빛이 되어 주고 있는가, 아니면 빛을 가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빛이 그의 자녀들을 통해서 한 영혼의 어두움을 비출 때 그것을 보고 무릎을 끓고 엎드리면 하나님은 막힌 것들을 부어 주시고 채워 주시기 시작한다. 어두움은 믿지 않은 자들에게 나가지 못하는게 하고, 믿는 자들을 통해서 예수님 보지 못하게 막아서는 역할을 한다. 내 안의 깊숙이 자리잡은 어두움을 자백하고 고백하여 그것이 깨어져 나갈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존재하는 빛을 보고 나오기 시작한다. 

어두움은 영혼이 없는 겉만 번지르르한 언어다. 겉으로는 기도하고 좋은 말을 하고 가르치는데 내면에서는 사랑도 느껴지지 않고 진실도 없고 공허하다. 겉으로는 영적이나 실상은 아무 것도 와 닿지 않는 공허함 뿐이다. 겉으로는 별거 없어 보이는데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데, 그 삶 자체가 자유로우면서 경건하고 평안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한다. 말씀을 읽으면 영혼이 맑아지면서 분별력이 생기다.

영적인 방법으로 싸워 영적전쟁에서 이기고 빛의 권세를 사용하는 방법 10가지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1. 매일 아침 가장 조용한 시간에 성경을 읽어라. 혼미한 마음이 정화되어지고 맑아진다. 
2. 마음이 와 닿는 말씀을 적고 내 마음에 상처와 고통을 주는, 그 문제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적어보고 거기에 초점을 맞춰라.
3. 자신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적거나 입으로 고백해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 맡겨라. 
4. 자꾸만 신경 쓰이게 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 임하도록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그 사람의 어두움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5. 분노가 아니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구하라. 분별은 분노와 반대되는 것이다. 분노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해가 생겨날 수 있기를 구하라. 
6.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단어들을 하나 하나 노트에 적으라. 그것은 예언 같은 것이다. 미리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들을 붙들고 주님께 올려드리면서 기도하라. 말씀을 읽고 나면마치 과즙기의 즙을 짜내 듯 자연스럽게 기도가 흘러나온다. 기도하기 힘들 때는 집중해서 말씀을 보면 기도할 제목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7. 하나님이 이 싸움을 통해서 확장시키려고 하는 나의 성품이 무엇인지 알아보라. 그 것을 배우고 주님께 감사하고 순종하라. 
8.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9.  주위의 분별없는 사람이 그 사람에게 속지않도록,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라. 하나님의 빛은 다 동일하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 빛에 임재하는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시각을 갖게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은 동일하게 그것을 간파해 낸다. 
10. 두려워 하지 말라. 하나님은 결국 어두움의 정체를 드러내실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것을 폭로 시킨다. 우리의 앞뒤를 가로막거나 힘들게 하는 것들을 두려워 하지 마라. 우리가 신경 쓸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고 거짓없는 마음으로 순수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Father Heart of God


요한복음 17:6-26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설교요약>
Jesus prayed to the Father, a day before he was crucified. This prayer is very significant because it reveals to us what is inside of the heart of God, heart of Jesus, and heart of the Holy Spirit. It also explains the reason for Jesus to die on the cross, that is, the purpose of our redemption. The purpose is about intimacy with God. Jesus was born as a human being and he is the son of God. He came to demonstrate for and to teach us that is the way.

God is Love 
In John 14, Jesus said ※I do only what I see the father doing.§This decision were right because he didn't do his will, but did the will of the Father who sent him. This is a completely new radical life style that Jesus brought. In the world, most religious people like to follow the rules. Jesus' lifestyle didn't throw away the laws, but he fulfilled the law. This way of fulfilling the law is based on the intimacy with the Father's heart and the father is love. God is love. God does not have love. He is love, living love, only real love there is on earth and heaven. This love is completely free form selfishness.

When Jesus challenges us to follow Him that means to live the same kind of intimacy and power that comes from relationship with God. Trust God for this radical lifestyle that is not based on rules. But based on the ability hear what God is sayings, then you are no longer under the law. God is calling us to live by faith. Jesus died on the cross to make this possible and prayed that love the Father has for his son will be in us. Love that Father has for his eternal son is the same love that God has for each one of us. We must encounter and experience the love of the Father for a child. Jesus died on the cross to redeem us, so that we can experience the love and have faith that Holy Spirit will fill us with the power to know what God is each day. 

We are forgiven by the blood of Jesus on the cross. So that we can have intimacy with Father and live from relationship that is pure love, love that is eternal, and love that is not selfishness. This is the way of life for Christian. The way of the life is the way of the cross; the way of the cross is about the love of God. 

Hearing God's Voice
The most important thing for Christians is to learn to live like Jesus through hearing the voice of God. For that, we need to pray everyday to God to fill us with the Holy Spirit, life of the trinity. We are created to be filled with the living presence of God for purpose of redemption. It's the heart of being the disciples of Jesus. Jesus died so that God will become one with us. When Peter walked on the water, he took a step with faith. But he let go of the faith when he was distracted by wind, then started to sink. It's not because God's word failed, but Peter's faith failed. But God of love with no condemnation grabbed Peter and pulled him up. We have faith that God will do the same for us as we are learning.

Every day he will lead us to the cross, which is to die. Cross is about dying; but at the moment there is death on the cross, resurrection happens. New life comes. Lay down your life and your will, but look for the will of the Father. Make your life's main goal to hear God's voice and to live the life of Jesus. God is living in us when we live by faith.

고난을 통한 창조

사도행전 19:21-41
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35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41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설교요약>
고난을 통한 창조     
바울이 에베소에서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2년 동안 열 두 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결과 그 제자들을 통해 터키 전역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아데미 다이아내 신을 숭배하며 마술을 행하던 신전의 리더들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자신들의 마술 책을 불태워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삶에 변화가 일어날 수 밖에 없음을 보게 된다. 

 사람의 영향력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판매하는 큰 사업장이 있었다. 그 사업장의 사장은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으로 거느린 종업원의 수도 많은 성공한 사업가였다. 어느날 데메드리오는 다이아나 신상의 판매율이 떨어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것이 곧 자신의 사업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게 할 것임도 간파했다. 신상 판매율 저조의 직접적 원인은 바울의 전도 활동으로 사람들이 아데미 숭배를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수 천 수 만의 그리스도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에베소에서 성령을 받고 2년 동안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던 열 두 명, 소수의 제자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진 일이였다. 그리고 그 열 두 명의 제자들 뒤에는 바울과 그를 도우며 따랐던 몇 명의 신실한 제자들이 있었다.

상황이 이렇자 데메드리오는 사람들을 선동해 아데미를 외쳤고, 자극된 군중 심리로 흥분한 군중들은 바울의 동역자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사로잡아 당시 공공집회 장소로도 사용된 연극장으로 끌고 갔다. 흥분하여 모여든 군중들로 인해 바울 대신 체포된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까지 놓이게 되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시 섬기게 된 제자들로 바울과 함께 다시 3차 전도 여행을 하던 중 에베소에서 체포되어 목숨이 위태롭게 된 것이었다. 바울을 포함해 가이오나 아리스다고 같은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위험과 고난을 겪었음에도 계속해서 선교 여행을 통한 전도를 지속했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
당시 소요 사태 등을 책임지는 정당 중앙 집행 위원회 서기국의 우두머리인 서기관은 데미드리오가 일으킨 소요를 제압하고 군중들을 순식간에 흩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그 서기관을 통해 하나님은 아무 잘못 없이 붙잡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풀어지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헌신하며 따라가는, 그 분의 사람들을 철저히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는 하나님은 왜 이런 고난과 위험들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막아주시지 않고, 바울, 가이오, 아리스다고 같은 불쌍한 사람들이 이런 고통과 환난들을 꼭 통과하게 하시는걸까? 반문할 것이다. 하나님이 왜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과 환난을 허락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을 통해 그 비밀을 밝히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심으로 그 분을 깊이 찬양하고 그 분의 임재를 경험케 하신다
만약 당신이 조용히 앉아 당신에게 반복되는 문제들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위로들을 노트에 적어 본다면, 하나님의 수많은 위로와 그 분이 여러가지로 공급하신 것들이 그 문제들을 통과하는 가운데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문제들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셨음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문제를 통해 깨달은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께 낮아진 마음으로 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그 분의 세심한 사랑을 경험하고 있음도 알게 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위로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신다
우리의 삶에 허락된 환난은, 환난과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 냉담하고 무관심하고 심지어 정죄하기까지했던 나의 교만한 마음과 죄악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누군가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위로하는데는 심리학적 지식이나 스킬보다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 최고의 능력이 될 수 있다. 즉, 누군가를 살리고 치유하고 영적으로 깨우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사람을 살리시고 치유하는 분이심을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셋째. 고난이 넘칠수록 위로가 더 넘친다.
바울, 가이오, 아리스다고, 베드로, 그리고 성경의 셀 수 없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의 길을 걸어갔다. 그들이 계속 그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고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난이 넘칠수록 예수님의 위로가 더욱 넘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로를 많이 받으며 고난을 체험한 사람들은 너그럽고 겸손하고 진실되며, 그 마음이 평안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어 지옥에 매여 사는 한 가정과 나라와 열방이 풀어지게 하여 작은 천국을 만들어가는 변화들을 가져왔다.

환난의 시기에 고난을 피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무엇을 해보려 하지 말고 그냥 고난을 받아보라. 아픈 마음과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고난 속으로 주님을 계속 따라가면 된다. 그러면 주님이 다시 우리 내면에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주신다. 주님께서 처음보다 더 새 것, 더 좋은 것으로 우리를 다시 재생되게 하실 것이다.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

사도행전 19:1-20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헬, 또는 침례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1)세례를 받으니 헬, 또는 침례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설교요약>
제자들을 세우는 일
1절에 보면 먼저 예수님을 믿었던 제자들을  바울이 에베소에서만나게 되는데, 그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묻는다. 하지만 2절에 그들은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 대답한다. 6절에서는 바울이 그런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할 때, 그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은 이미 예수님을 믿었는데 왜 성령을 알지조차 못했는가?이다. 고린도 전서 12장 3절과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에베소의 제자들은 이미 성령 이 그들 안에 거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베소의 제자들은 성령 충만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고 믿었지만 사도행전 1장 4-5절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말씀에 따라 성령을 사모했고,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게 된다. 또한 에베소서 5장 18절에 바 울도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성령 충만 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한다. 사도행전 2장 4절에보면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어 성령이 내 안에 거하셔셔도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충만의 목적첫째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분의 사랑과 위로를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 위함이다
6절에 보면 방언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성령충만의 외적인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증거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 분의 사랑과 위로를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절에 보면 바로 이것이 예언이다. 예언 기도는 사람들에게 공포심과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이다. 즉 사람들에게 덕과 위로, 격려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은 마음에 찔림을 주는 말씀을 해도 사람들에게 위로와 마음의 치유를 주는 특징이 있다. 또한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셔서 깨닫게 해주심으 로  또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게 하시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런 일을 행하신다. 설상 한 영혼 의 숨은 죄를 드러나게해도 자신의 경험과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영으로 그것을 드러나 게 함으로 그 상한 마음에 평안을 주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소수의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기 위함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나 안수해 준 제자들은 열 두 명이었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두란노 서원에서 2년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다. 그 결과는 10절에 보면 ‘아시아 지역에 사는 모 든 이들이 주의 말씀을 듣더라’로 나타난다. 바울 혼자서 이 넓은 지역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바울이 말씀을 전했던 열 두 명의 제자들을 통해 지금의 뉴욕과 같았던 에베소에 모인 전세계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이 열 두명의 소수를 통해 타락하고 문란한 도시 에베소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셨다. 이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그냥 그리스도 인이 아니라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신다. 또한 그냥 제자가 아니라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제자를 찾고 계신다.

성령 충만한 제자가 되기 위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싶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19) 이 말씀을 볼 때 마다 '함께 구하면'에 초점을 두었었다. 그러나 최근 묵상에서는 '합심' 이라는 단어가 눈과 마음에 들어왔 다. 그것은 서로 동일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마음이 서로 서로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두에게 동일한 마음을 주신다. 그 동일한 마음으로 함께 구할 때 성령이 부어진다.

새롭게 하는 사랑 2

사도행전 18:12-28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설교요약>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크게 세 유형의 사람들로 분류할 수 있다.

육신의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첫번째 무리는 육신의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한 아이의 음식이였던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의 무리를 먹이고도 남는 음식들을 제자들에게 열 두 광주리에 담게 하셨다. 이 기적을 보고 오천명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했다. 이것을 미리 아신 예수님은 홀로 조용히 산으로 가 몸을 숨기셨다. 이튿날 이 수 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찿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찿기 위해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가는 열정을 보였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이 내려주셔서 먹었던 만나라는 떡이 바로 자신을 예표하는 그림자였음을 말씀해 주셨다. 자신이 생명의 떡이기에 자신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될 것이라 하셨다. 썪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을 위한 양식을 위해 일하라 하셨다.

예수님 모시고 자신의 힘으로 사는 이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택하여 사역을 시작하던 초창기였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는데, 풍랑이 일어나 배가  바닷물에 덮이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자기들이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불평하며 예수님을 깨웠다. 이때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고 잠잠케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무서워하고 믿음이 없느냐?'라며 책망하셨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예수님은 모시고 살지만 여전히 자신이 삶의 주인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인생의 배에 모시고 있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나 삶의 어떤 힘든 문제가 찿아오면, 예수님을 자주 원망하고 그 모든 원인을 주님께 돌린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만 자신들의 주님으로 예수님을 인식하지 않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 은혜를 주시고 계셨다. 첫째, 삶에 적용할 생명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고 둘째, 많은 표적들을 통해 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간섭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보여주셨다.하지만,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생명의 말씀을 들었느냐가 맏음의 성장과 태도의 변화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때문에 예수님은 받은 말씀과, 삶 속의 공급하시는 기적을 토대로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럼 어떻게하면 우리의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할 수 있을까?그 모델을 세번째 유형의 사람을 대표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찿을 수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처음에 로마에서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을 추방하는 일로 고린도에 생업을 따라 이민 왔다. 그러다 바울을 만났고 하나님이 어떻게 고린도에서 역사하시는 지를 모두 지켜 보았다. 회당장 그리스도와 그의 온 가족의 회심과 그 후임자 회당장 소스데네의 회심과 제자가 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 하시며 그를 강권적으로 사용하시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을 보고 체험하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이 두 사람을 자신들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은 사람들로 소개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5) 이 두 사람이 마음을 새롭게 한 방법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뜨거운 사랑'이었다. 이 두 사람은 바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감사를 받을만큼 사랑과 열정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가장 안정된 순간에도 주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든 순종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 사랑이 아볼로에게 흘러갔고, 아볼로는 그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의 가르침과 함께 흘려 보냈다. 이렇듯 세번째 유형의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다. 사랑하며 사는 제자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다. 이러한 사랑하는 마음에 더해지는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의 폭포로 우리의 막혀 있는 영혼의 답답함이 뚫어질 것이다. 그 동안 없다고 불평하고, 비교하고, 원망하던 마음이 떠나고, 하나님이 지금 당신의 삶에 부어주고 계신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소망의 일들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또한 당신의 마음을 긍휼함으로 채워 우리가 도와주고 싶은, 아볼로와 같은 사람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적극적으로 헌신하라. 

우리는 이 세 유형 중에 어디에 있는가?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있는가? 좋은 말씀과 체험은 많이 하나, 마음이 냉랭하진 않는가? 그렇다면 세번째 유형으로 변모하라. 세번째 유형은 받은 말씀과 체험들을 사랑으로 매일 새롭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 때 당신의 영혼은 소망과 긍휼과 담대함으로 매일 새롭게 채워질 것이다.

새롭게 하는 사랑 1

사도행전 18:12-28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공급하심

사도행전 18:1-11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설교요약>
무역도시이자 남 그리스와 북 그리스 사이의 연결 도시로 이용되었던 그리스는 그 당시 가장 부유하고 사람이 많은 도시였다. 그러나 이런 재물로 인해 교만과 부도덕, 동성연애 등의 사악한 죄악이 이곳에 만연하게 되었다.이 곳에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장막을 지으며 복음을 전하게 된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시는 공동체 내에서의 사람과의 은혜와 수동적인 은혜들을 살펴보자.

사람 은혜
바울이 홀로 아덴을 거쳐 낯선 고린도에 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침 믿는 유대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해주셨다. 그들은 당시 로마에 살고 있었는데 황제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바람에 고린도로 이민을 와야만 했다. 당시 수공업의 기술을 가지고 있던 바울과 이 부부의 직업도 동일했다. 그래서 함께 일을했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을 도우며 헌신했다. 당시 지중해 근방에는 많은 나라들과 도시들이 있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 많은 로마의 식민지와 도시들로 갈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고린도에 왔을 때는 놀랍게도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한 시점 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까지도 아까워 하지 않고 바울을 도왔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누군가 당신을 위해 목숨도 아까워 하지 않고 돕는다면 어떨것 같은가? 꺼져가던 영혼도 다시 뜨겁게 타오르지 않겠는가?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경험들을 자주한다. 함께 주를 위해 일하고 먹고 웃고 울었던 사람들이 곁을 떠나간다. 그때 마음이 슬퍼질수 있고 열정이 약해지며 힘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다시 하나님을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또 다른 도울자를 예비시키시고 보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아굴라 부부처럼 함께 일하고 주를 섬기며 헌신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일들을 주도적으로 세워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사람들의 존엄성을 세워주고 사랑받고 사랑을 주는 관계로 세워가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새롭게 주시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라. 만약 지금 아무도 없는것 같다면 떠나간 사람으로 인해 슬퍼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도하라. 하나님은우리에게 사람을 주시는 분이시다.

수동 은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도 자신이 주도적으로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고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와 베뢰아로 들어갔다. 거기서도 자원해서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했고 믿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한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다시 몰래 그곳을 떠나 아테네에 도착했다. 아테네 에서도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매일 장터에서 철학자들과 변론하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체포되다 시피해 법정에 서야 했다. 그 전에는 빌립보에서 자원해서 귀신들린 여종을 귀신을 쫓아내어 자유케 해주었다가 빌립보 감옥에 수모를 격어야 했다. 그러나 그 감옥에서도 자신을 때리고 고통을 준 간수에게 복음을 전해 구원받게 해주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바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한 일이다. 그런데 당시 바울 곁에서 카메라맨 역할을 했던 저자 누가는 고린도에서 두드러지는 한 인상적인 장면을 적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영에 강하게 붙잡힌 모습이었다. 지금까지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열정적으로 사역하며 헌신했다. 그런데 고린도에서는 하나님이 그를 등에 엎고 뛰시는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몸은 추운데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할때가 있다. 몸은 휴식을 원하는데 생각은 전혀 힘들지 않고 괞찮다고 느낄때가 있다. 그 상태를 방치하면 몸에 문제가 생긴다. 바울은 어쩌면 자신이 느끼는 어떤 영적인 육적인 기갈이 있는데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는 고린도에서 노동을 하면서 안식일 마다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했다. 4절 '안식일 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he reasoned in the synagogue, and persuaded the Jews and the Greeks' (4절-NIV) 여기서 두개의 동사는 분명 능동태로 쓰여졌다. 우리는 주를 따르면서 자신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할때가 있다. 자신의 느낌과 실제가 다를때가 있다. 실제는 마음이 두려운데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외로운데 외롭지 않다고 느끼며, 몸이 힘든데 크게 힘들지 않다고 느낀다. 반면 그 반대일때도 있다. 두렵지 않은데 두렵다고 느끼고, 외롭지 않은데 외롭다고 느끼고, 힘들지 않는데 힘들다고 느낀다. 이때 우리의 상태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 이시다.이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수동태의 은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으시는 은혜다. 그 우리 자신과그 짐의 무게도 모두 그분이 짊어지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수동의 은혜다.

우리는 그분의 푸근한 가슴에서 다시 새힘을 얻는다. 그분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큰 평안과 생명을 공급받는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 바울을 보면서도 그를 핍박하고 공격하는 유대인들의 증오는 계속되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 증거를 남기며 유스도라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고 회당장 그리스보와 온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밤에 다시 환상중에 바울에게 나타나 두려워 하지 말고 계속 전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와 함께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그를 아무도 해할수 없게 지켜 줄것이라고 하시며 그 도시에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들이 많다고 다시 수동의 은혜를 주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수동적인 은혜를 보면서 그것을 의지가 약하고 의존적이고 요행을 바라는 삶이라고 유대인의 율법적인 관점으로 볼수있다. 매순간 하나님 앞에 굴복하라. 그분 앞에 무릎꿇고 십자가 앞에 나오라. 그리고 은혜 아니면 살수가 없다고 고백하라. 그때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고 우리의 사랑은 더욱 진실해져 가고 우리의 선행은 더욱 생명을 주는 축복이 될것이다.

하나님을 보려면

사도행전 17:15-34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나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고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들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붇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나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여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슴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고 있었더라 
 

<설교요약>
사도바울은 2차 전도여행때 베레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해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도록 방해를 받았다. 바울은 핍박하는 무리들에게 쫒기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아테네에 머물면서 베레아에 남아있던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바울이 전했던 말씀중에 두개의 구절을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한다.

정해주신 시간과 경계
26절에 보면 두 개의 단어가 눈에 띈다. '연대와 경계' 다. 연대는 “정한 때” 라는 어떤 시기와 기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계는 “정해진 한계”라는 장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간과 장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간과 장 소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라
27절을 보면 성령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더듬어' 라는 단어는 “만져보다” 라는 의미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주의 깊게 묵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을 찾는 방법
1) 축복하는 사역이다.
야곱의 생애를 한가지로 압축하면 “축복하는 일”이었다. 창세기 47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 애굽의 왕인 바로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다. 그 다음에 야곱의 죽음이 가까워 올 때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하는데 이때 장자인 므낫세에게 야곱이 오른손을 얹지 않고 둘째인 에브라임에게 얹은 것을 보고 잘못 얹은 줄 알고 요셉은 아버지의 손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창: 48:19) 하며 그 손을 옮기지 않고 에브라임을 므낫세 보다 앞세웠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 축복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12명의 아들들을 축복하며 생애를 마쳤다. 그리고 훗날 그 예언들이 모두 성취되었음을 그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또한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한 축복임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선택하시고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겠다고 감동시키신 일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야곱이 가졌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다.당신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2)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시편 143장 7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그분의 얼굴을 숨기실 때 자신의 영혼이 피곤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얼굴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그분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취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는 기쁨과 평안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침을 뱉었다.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수치와 폭력으로 인해 일그러진 이 땅의 영혼들의 얼굴을 그분의 손으로 감싸주고 상처를 싸매주며 흐르는 눈물과 피를 닦아주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가로막는 고질적인 방해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수치와 폭력에 상한 마음이다. 우리는 마음이 완벽하게 죄 사함 받고 치유 되기 전 까지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삶 속에서 겪는 슬프고 마음상하는 일들이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의 고통 받는 마음에 치유와 기쁨을 줄 수 있는 능력임을 말씀하고 있다.하나님이 당신의 그 해결되지 않은 슬픔과 고통들로 누군가를 치유하고 있을 수 있음을 믿으라.

3) 하나님을 찾으려면 한번에 한 사람씩 사랑하라.
야곱이 요셉이 보낸 수레를 타고 애굽으로 내려갈 때 그의 전 가족은 70명 이었다. 하지만 야곱이 147세에 그의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창: 48:4). 야곱이 이 비전을 40세에 받았다고 하면 거의 100년이 지난 시간이지만 야곱은 죽음 직전에 하나님의 비전을 분명히 기억한다. 외적인 상황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계속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이 일에 중심에는 요셉이 있었다. 야곱에게 있어 요셉은 두 가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다. 첫째. 사랑은 다시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둘째. 완벽하지 않은 사랑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야곱의 불완전한 사랑으로도 요셉같이 훌룡한 용서와 사랑과 생명을 사랑하는 열매를 거두게 하셨다. 또한 죽은 줄 알았던 그 사랑을 다시 부활시키셨다.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처럼 완벽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은 물거품처럼 되버릴때가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것 보다 계속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 우리가 한번에 한 사람을 사랑하려 할 때 완벽하지 않아도 때로 물거품처럼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신다.

당신은 누군가를 축복하고 기도해 주고 있는가? 당신의 슬픔과 고통으로 누군가의 얼굴의 수치와 상처를 닦아주고 있는가? 한 번에 한 사람씩 사랑하고 있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살도록 인도해 주신 땅과 그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보게 될 것이다.

준비된 마음

 

사도행전 17:10-14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설교요약>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그분의 말씀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신중히 기쁨으로 듣기 원하신다.

준비된 마음과 믿음
듣는 것이 신중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도 상대방이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신중하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그도 다른 사람이 말할 때 신중한태도를 취하지 않는 현상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가 말씀을 듣는 중에 읽고 묵상하는 중에 소망의 생각과 마음들을 주셨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눈으로 보는 것을 누릴 수 있는 준비된 마음
성경에는 눈으로 보았지만 누리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다. 12명의 정탐꾼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눈으로 보았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실것이라는 약속을 약 1년 4개월 전 이미 홍해를 건너기 전에 모세를 통해 들었다.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실것 뿐만 아니라 그 땅에 할일도 미리 말씀해 주셨다. 따라서 그들이 보았지만 누리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다. 1년 4개월 전에 주신 말씀을 마음에 넣어 놓지 않고 신중하게 듣지않고 건성으로 들었기 때문에 막상 현실에 부딪칠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현실의 상황 앞에 절망하게 된것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해준 사랑의 말들을 쉽게 잊지 않는다. 그것은 건성으로 듣지 않고 진심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듣는 것은 사랑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을 어려서부터 암송하고 외웠다. 그러나 그 말씀안에 예언 되어 있는 메시야 예수님에 대해서는 왜 보지 못하는가? 이것은 지식으로는 받아 드렸는지는 모르지만 준비된 마음, 신중한 마음으로는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받아 드리지 않는 말씀은 결국 사단이 그의 눈을 가려 속임 가운데로 인도하기 마련이다. 말씀은 우리 삶의 '사용설명서' 다. 우리는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알려면 말씀을 준비된 마음으로 잘 들어야 한다. 그러면 그분을 더욱 잘 보게 되고 그분이주시는 것을 보는것 뿐만 아니라 모두 누리게 된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
주님이 우리와 24시간 동행 하시는데 왜 만남을 준비해야 하는가? 공식 예배와 또는 개인 경건의 시간은 늘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과 밖에서 만나는 시간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런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고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간을 통해 기대와 기쁨으로 채워지는 천국을 경험한다.

1) 할 말들을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을 미련한 사람 보다도 더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말들 속에는 소원도 고백도 아픔도 갈등도 감사도 기쁨도 모두 들어 있게 된다.

2) 기도로 준비한다.
기도하며 준비할 때 이미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축복들이 부어 지기 시작한다. 응답들이 주어진다.

3) 빈 그릇을 준비한다
미리 시간 전에 와서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메마른 땅이 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은혜를 사모하면 하나님은 그 준비한 마음의 그릇에 그분의 은혜를 부어 주신다. 특히 당신의 모든 생각, 계획, 염려를 비워 빈 그릇이 되게 하라. 온갖 세상 것들로 가득 찼다면 먼저 주님 앞에서 고백하며 비우면 주님이 채우실 것이다.

4) 선물을 준비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무엇인가 주고 싶어진다. 주면서도 받아주면 너무도 고마워 한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생각하며 나오라. 그때 눈으로 보는 것을 누리게 될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사도행전 16:35 - 17:9
35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한대 
38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니라

<설교요약>
두 종류의 사람
우린 삶에서 위로 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상황은 위로 받기 보다 위로 해주고 돌봐주어야 하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그때 내면에는 갈등이 일어날수 있다. '나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지? '라는 불만이 계속 솟아오른다. 그러나 또 다르게 반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계속 위로하고 누군가를 돌보면서 자신의 길을 간다. 그리고 계속 누군가에게 공급을 받는 것처럼 힘이 있고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그들은 '다음엔 누굴 위로하고 도울까?' 라고 말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당신의 삶은 이 둘 중에 어느 쪽에 속했는가? '위로 해 주는 자를 계속 찾는가?' 아니면 '위로 해 줄 사람을 찾는가?'

기대치 않은 위로
바울 일행은 야손의 희생 덕분에 안전하게 형제들에 의해 베뢰아에 도착했다. 사도행전 17장 10절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리라' 야손과 그의 가족은 바울과 그 일행을 향한 하나님의 큰 위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소유까지 걸고 바울을 도왔다. 더 큰 위로는 이 짧은 시간에 데살로니가에 많은 영혼들이 예수를 만났고 그들의 삶과 믿음은 '아가야' 즉 마게도냐 남쪽 그리스 영토 전역에 본이 되고 향기가 된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계속 위로하고 돌보야 하는 상황에도 계속 기쁨으로 그 일들을 해 나갈 때 하나님은 전혀 기대치 않은 위로와 선물로 우리를 만나주심을 믿는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음
잠언서 29장 25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 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잠: 29:25) 'It is dangerous to be concerned with what others think of you, but of you trust the Lord, you are safe' (GNT)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각인 되고 싶다.
2) 사람의 도움과 사랑을 받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3) 그 관심과 도움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사람의 거절과 배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마음을 쏟을 때 일어나는 변화들은 무엇인가
1)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상황속에서 인도해 가신다.
2) 기도하게 된다.
3) 진정한 사랑으로 사람을 대한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유익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피곤해지고 유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유치하게 생각되면서 점점 사무적이고 이익중심적이고 실용적인 가치만을 추구하게 된다. 이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는 삶의 전형이다. 바울은 빌립보에 한 영혼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그는 루디아 한 사람, 귀신들린 한사람, 감옥의 한 간수, 데살로니가의 한 사람 야손을 세상의 가치기준과 직업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으로 진심으로 대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전혀 기대치 않은 위로를 주셨다. 그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을 일으키셨다. 그런 삶을 살수 있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주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많은 시간과 삶을 드리는 하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신뢰할 때 나의 내면과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확인하고 글로 적어 보자.

잃어버린 슬픔

사도행전 16:16-34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설교요약>
영혼에 대한 슬픔
바울과 그 일행들은 이방인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점치는 귀신이 들린 노예 소녀를 만나게 된다. 이 소녀는 귀신의 영에 사로잡힌 고통은 물론, 점을 쳐주고 번 돈 모두를 자신의 주인에게 바쳐야 하는 이중고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소녀 안에 귀신은 바울과 그 일행이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음을 알고도 소녀 안에서 머물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들이라” 라고 하며 계속해서 크게 외쳐댔다. 바울이 몹시 괴로워하며 귀신을 쫓아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괴로움이란 슬픔으로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번역된다. 따라서 바울이 이 귀신 들린 소녀를 보면서 가졌던 내면의 괴로움은 한 영혼이 받는 고통에 대한 큰 슬픔 또한 동반된 것임을 분명하다. 그래서 소녀를 통해 유익을 얻고 있는 주인으로 해를 입을 수 있음을 알았알 것임에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그 아이에게 떠나도록 명령했고, 아이는 결국 자유케 되었다. 결국 그의 슬픔이 한 영혼을 풀어주는 생명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실 때 그 분을 위해 우는 자들을 향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볼 때마다 자신이 지은 죄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 것을 슬퍼하며 울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즉 가족과 타인의 영혼 구원을 위해 울라고 하셨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애통함으로 울고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사람이다.

슬픔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근본적인 원인
귀신 들린 소녀의 주인들은 여종이 당하는 고통은 안중에 없이, 그로 인해 얻는 재물이 더 소중했다. 이렇듯 탐욕에 빠진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슬픔은 없고, 오직 악한 슬픔만이 가득하다. 이 귀신 들린 아이를 노예로 부려 수익을 얻은 여러 주인들 중 단 한 명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회개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애통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타인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약속 하셨다. 그렇기에 이 소녀를 악용한 주인들의 내면에는 진정한 '위로'가 없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칭찬과 위로가 필요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 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을 하셨다. 이것은 모든 창조물에 하나님의 칭찬을 갈망하는 본능을 심어 놓으셨음 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칭찬과 위로 탱크를 자신의 위로와 칭찬으로 채우신다. 특히 채우는 과정 중 중요한건 '보시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 분이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의 내면에 위로와 칭찬이 채워진다. 그 위로와 칭찬은 우리의 내면에 탐욕과 정욕이 근접하지 못하게 우리를 더욱 거룩한 열정들로 내면을 뜨겁게 한다. 그런데 내면에 하나님,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사람들을 보려 하지 않고, 사람들을 낮은 곳에서 자신을 하나님처럼 우러러 보라고 압박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을 대신해서 사람들을 봐 줄 사람들, 칭찬하고 격려할 사람들을 찾으신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위로를 부어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정반대의 상황으로 보내실 때 크게 세 종류의 반응을 보인다.
1)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한다.
2) 몸은 가까이 있지만, 마음이 멀어진다.
3) 그래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과 몸을 다하여 주를 계속 따라가는 사람이다.
바울과 실라는 세 번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한밤 중에 아프고 힘들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기도하고 찬송했다. 그 때 지진이 나고 손발로 묶인 쇠사슬이 모두 풀어졌다. 하지만 간수의 처지를 알고 옥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 받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를 위해 살다 당한 어려운 상황들로 모든 것을 쉽게 속단해선 안된다.  바울이 감옥에 갖힘으로 인해 하나님은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에는, 그냥 찬송하고 기도하라. 그럼 다음은 하나님이 길을 알려주신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그 어떤 짐보다 우리 존재 자체를 가장 무겁게 느낄 때가 많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자기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짐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짊어지신다고 하셨다. 그럼 그 분이 나를 짊어지시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첫째. 하루 종일 모든 일과 만남 속에서 그분이 나를 어떻게 짊어지시는지 기대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 그분이 나를 짊어지신 일들을 감사하며, 구체적으로 하루를 기록으로 마감한 다음, 종종 그것들을 다시 보는 것이다.

헛되지 않은 일

사도행전 16:1-15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설교요약>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헌신하면서 지칠 때가 있다. 주의 일을 평생 사는 동안 얼마 동안은 할 수 있지만 '항상'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바울은 항상 주의 일에 힘쓰라고 했다. 항상 주의 일에 힘써야 하는 이유는 '그 수고가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하나님이 심기 원하시는 일
바울은 예수를 믿으면,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나 새로운 삶을 살다가, 육체의 생명이 다하면 그 영혼이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혈과육이 아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고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날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님께서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죽어 흙으로 돌아간 육체도 다시 부활의 몸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주의 일' '헛되지 않는다'고 말한 그 일은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롭게 성령으로 거듭난 일을 말한다. 그들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이 땅에서 영적인 부활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 천국을 가져오는 통로가 된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여 제자가 되어, 예수님처럼 삶을 살면서 또 다른 영혼들을 거듭나게 한다. 그리고 그들로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살게 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헌신의 삶을 살도록 돕는다.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할지, 어떻게 입을지, 무엇을 마실지 준비하며 살까 걱정하고 혼동스러워한다. 당신은 어떤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슨 일을 해야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인도 받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으로 심고 있는 사람이다. 주의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헛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헛되지 않은 주의 일을 하며 성령으로 심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증거들
1) 갈 길과 해야할 일을 인도 받는다
우리가 헛되지 않은 주의 일에 우리의 삶을 고정하고 삶을 드릴 때, 하나님은 그 때 그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을 내리도록 쉽게 인도하고 계심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해야할 지 분별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가 주의 나라와 그분의 일을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셔서 그 분이 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신다.

2)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성령의 갈망을 감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1차 선교 여행처럼 아시아 즉, 그가 전에 활동했던 곳으로 떠나려 했는데, 그 길을 성령이 막으시는 걸 감지 했다. 바울 일행은 분명한 계획을 세웠었다. 그들은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성령이 막으셔서 다시 비두니아(터키 북부지역)로 가려고 무시아에 도착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 분을 전심으로 따르고 구하고 순종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갈망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타내신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세운 계획이 있다 할지라도 성령이 그 세운 계획들을 막으시는 것 같을 때 그 계획을 내려 놓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3)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임하는 축복은; 기도로 도울 자를 만난다
바울은 기도처를 찾다가 강가에서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곳에서 옷감 장사를 하던 루디아의 마음을 하나님이 여셔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여인은 강권하여 자신에 집에 바울 일행을 머물게 했다. 바울 일행이 처음에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도하는 곳을 찿으러 가다가 루디아를 만난 일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은 단 번에 루디아를 통해 그들의 의, 식, 주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주의 일에 힘쓰는 삶을 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환상을 보고 막상 순종하여 행동해도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하려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만남의 축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순종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쉽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바로 기도해야 할 때이다. 기도할 장소를 찾아야 할 때인 것이다.

당신은 주의 일에 힘쓰고 있는가? 성령으로 심고 있는가? 이것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임하는 축복들이다. 헛되지 않은 일에 당신의 생애를 드리고 싶지 않은가?

다시 세우시는 성령님

사도행전 15:36-41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설교요약>
1차 선교 여행 이후 바울이 바나바와 마가와 헤어진 약 13년 경에, 마가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도 갔고 하나님 나라 일에 유용하며,  신실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또한 마가는 AD65-70년 경에 마가복음을 썼다. 마가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행동의 복음을 전하며 위로와 소망을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마가를 통해 주는 메세지는, 성령님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때에도 마가와 바나바의 삶과 사역에 동행하시며 마가를 변화시켜가고 계셨다는 것이다. 마가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인내력도 부족했고 힘든 일이 있으면 먼저 부딪쳐 이겨내려고 하기 보다는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고, 훗날 마가는 놀라운 종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원치 않는 실망스러운 결정과 행동을 하게될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소망이 없어'라며 크게 절망할 때가 있다.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나를 절망 시키는 요소 및 절망의 근본적 원인을 찾아내야만 한다.

현실 도피를 하게 만드는 힘든 어떤 일들은 세상 정욕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대다수의 경우 세상의 죄악된 행위를 하게 만드는 근본적 이유는 현실 도피 자체에 그 원인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이 죄인지 알면서도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현실의 괴로움을 잊기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주님과 함께 해결에 가면 되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문제를 피해 비현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마가도 비록 주님을 따랐지만 처음부터 두려움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현실적인 행동과 선택을 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이 무엇이고 후회할 일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라. 그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라는 뿌리가 있지 않는가? 그럼 우리를 두려움으로 부터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은 어떤 방법들을 사용하시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은 바나바를 통해 마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그를 다시 만드시고 훈련하시고 세우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두려움 때문에 죄 지음과 현실 도피를 계속 반복하는 사람들이 그 곳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열어 주시려는 새로운 길을 잘 보는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동행시키시려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훈련들도 잘 받아들여야 한다. 마가에게 다시 주어진 바나바와의 선교 여정에 힘든 일이 없었겠는가? 이전 선교 여행과 같이 똑같은 어려움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길을 따라갔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길을 따라가면 내면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점점 힘을 잃게 된다. 그 때 새로운 천국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좌절하고 절망할 때 하나님이 새롭게 열어 주시고, 만나게 하시고, 기회를 주시는, 그 길을 잘 따라갈 때 거기서 하나님이 주신 담대함을 얻게 된다.

바울은 바나바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바울은 정확하게 마가의 잘못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가는 바울의 말을 통해 마음이 찔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밤빌리아에서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들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처음 가졌던 각오와 달리 힘이 들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마가는 지금 다시 바나바와 함께 다시 선교 여행을 떠나려 하는 것을 볼 때 새로운 결심하고 도전을 감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2차 선교 여행에서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만 의지했을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을 세우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그의 또 다른 겸손의 모습, 종의 복음인 마가복음을 기록한 동기일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꺾는다.
그러나 그 실패의 두려움은 오직 그가 주만 의지하며 담대하게 나가게 하는 최고의 스승이 되었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꺾고 폭풍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줄 아는 사람으로 세우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마가를 통해 마가복음을 남기셨다. 마가와 바나바는 어떻게 보면 그 당시 행적을 기록했던 누가에 의해 선택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마가는 주목 받지 못했다고해서 주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을 가졌고 베드로로부터 그 모든 일들을 자세하게 전해 들었고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글로 남겨 로마와 열방에 증거가 되게 했다.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은 모두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성경을 썼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저자는 성령이시다. 따라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한 때 사도들을 실망시키고 힘들다고 떠나 버린 마가를 통해 그 놀라운 일을 이루셨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한 시기는AD65-70년 사이다. 그가 처음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고 하나님의 일에 실패한 시기로부터 약 15-20년 이상이 흐른 때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언제 어떻게 어떤 일을 이루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고 쉽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때에 생각치 못한 방법으로 그 분은 그 분의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들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에 드린 도끼

사도행전 15:1-35 (성경봉독 15:1-5)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하니라

<설교요약>
'한 남자가 하루 온종일 열리는 나무 자르는 대회에  도전했다. 그 도전자는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 하고는 열심히 나무를 잘랐다. 그러나 상대방 선수는 하루 동안 여러번 휴식을 취했고 여유있게 점심 식사를 했다.  저물어가는 마지막 시간에 도전자는 상대방 선수가 자신이 자른 나무보다 더 많은 나무를 자른 것을 보고 놀라고 화가났다. 그는 상대방 선수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내가 당신을 볼 때마다 당신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나보다 더 많은 나무를 잘랐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다. 승리한 그 상대 선수는 '당신은 한 가지 나에 대해 주목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휴식을 취할 때마다 나의 도끼날을 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바울의 손수건만 병들고 악귀 들린 사람에게 가져다 얹어도 병이 떠나고 악귀도 떠나는 일들도 일어났다.(행 19장) 그런데 이렇게 더 강력한 성령에 능력에 붙들리기 전에 15장에 마치 도끼날을 갈 수 있도록 해 준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예수님을 믿어도 모세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다가 점점 식어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도끼날을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아이 같은 신뢰다
성경은 예수님을 잘 믿다가 다시 율법적인 삶으로 돌아갈수 있는  증거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처음에 은혜로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서로 경쟁하다가 예수님께 꾸중을 들었다. 그 꾸중을 들은 시점은 제자들이 그 동안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습을 지켜 보다가 서서히 그들 스스로 예수님처럼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복음도 전하는 시기였다. (눅9장/막9장) 따라서 제자들이 사역을 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외적인 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때에 그들은 내가 했다라고 하는 자신들의 율법적인 의가 다시 살아났음이 분명하다. 이 때 예수님이 그들의 율법적인 자기 의를 다시 깨뜨리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시게 하기 위해 사용하신 것은 어린아이였다.(마:18:3) 어린 아이가 한 것이 무엇이라고 그가 천국에 들어갈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마:18:4)  이 아이가 자기를 낮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키를 낮추었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비하의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시키는 데로 했을 뿐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믿음에 뿌리를 두고있다. 부모를 신뢰하는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인정한 아이다. 그래서 겸손하다.

그리스도인의 나눔이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통로 중에 하나가 나눔이다. 그 나눔은 단순히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행하신 일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순수하게 나누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은 자신이  그분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자신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일을 하기 원하시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을 나누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하신 일을 나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이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그 분께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눌 때 '큰 기쁨'을 주신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만나고 나면 적지 않은 시간과 말들을 주고 받았는데 그다지 기쁨을 느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에는 만날 때마다 큰 기쁨이 있다. 나눔이 있는 곳에는 치유가 있고 영혼이 맑아지고 또 만남이 기대가 되고 기쁨이 배가 된다. 이런 나눔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 전에 기도로 그 만남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그 만남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날카롭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해주시며 다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열정으로 전환된다.

지혜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무뎌지게 하고 절망스럽게 하는 요소 중 하나는 '분노' 다. 분노할수록 마음은 슬픔에 사로잡히고, 기쁨은 상실되고, 평안은 깨지며, 두려움은 엄습한다. 분노의 반대말은 온유일 것이다. 그러나 온유하고 싶어도 누군가 마음을 뒤집어 놓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쉽게 무너지곤 할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노를 잡는 무기를 주셨는데 바로 '지혜' 다. 베드로는 성령의 음성과 환상을 직접 듣고 고넬료에게 가고, 죽은 제자 다비다도 살렸던 사람이다. 감옥에서 천사의 음성을 듣고 초대 교회로 갔던 사람이다. 바울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선교지로 주저하지 않고 떠난 사람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런 음성은 없다. 대신 신실한 사람들과 지혜를 모았고 야고보의 구약 성경 인용 말씀을 종합해 최종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는 신중한 생각, 결정, 대화, 성경 의 적용 모두가 들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적용된 그들의 지혜가 담긴 결정을 권위 있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때로 성령의 내적인 음성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을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말씀하시고 결단하게 하신다. 그러나 어떤 때는 우리가 마음의 생각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비추어 어떤 일을 생각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지혜다. 따라서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은 명료하다. 지식은 공부를 통해 어떤 것에 대한 정보를 알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생각을 통한 깨달음으로 바른 선택을 하고 적들의 악한 계획을 파하는 영감과 통찰력을 준다.

당신은 분노를 지혜로 파하는 사람인가? 그럼 도끼날을 가는 사람이다.  성령이 주신 경험과 말씀의 올바른 적용을 위해 생각을 사용하라. 그 때 당신의 영혼은 날카롭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고,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안에 갖힌 영혼을 구해내는 그 분에 손에 들린 도기까 될 것이다. 그 분의 뜻을 정확하게 찍어내는 삶을 살 것이다. 

당신은 지혜를 사용하고 있는가? 당신은 모임을 하고 있는가? 나눔을 하고 있는가? 나눔에는 영적 기쁨이 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같은 신뢰를 위해 영혼을 집중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도끼를 찿고 계신다. 하나님이 찍고 싶은 나무를 정확하게 찍을수 있는 도끼가 되기 위해 자신을 갈고 있는 도끼를 찿고 계신다.

하늘의 장자

창세기 25:27-34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설교요약>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에서는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집에서 거하길 좋아했다. 그 런데 주목할 것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판 것이다. 에서는 망설임 없이 죽 한 그릇으로 자신의 장자권을 동생에게  팔아 넘겼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고 성경은 말씀한다. 당시 고대 근동의 문화는 장자권은 부모로부터 받는 물질적인 유산과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인 접근 이외에도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을 멸시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고 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를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야곱은 어머님인 리브가의 도움으로 에서로 분장해서 눈이 잘 안 보이는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숭수 있게 된다. 아마도 리브가는 에서가 헷족속의 딸들인 유딧과 바스맛으로 인해 에서가 하나님을 버리고 문란하게 우상을 숭배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였다. 결국 에서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길을 선택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장자의 축복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에서의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은혜들을 멸시함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가 그렇게 멸시하던 장자의 명분을 사모했다.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이 유치하고 야비하기까지 했지만 그가 장자의 직분을 사모한 것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축복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멸시하는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외적으로 볼 때 혐오스럽고 초라해 보이는 한 사람까지 존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의 대속은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이루실 대속의 그림자, 즉 예고편이었다. 특별히 처음 것을 드리라고 할 때  둘째, 셋째는 그럼 대속이 필요 없는 것일가? 또한 선택 받지 못하거나 열등한 존재인 것일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대속은 누군가 자신의 죄를 위해 댓가를 지불하고 대신 죽은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다. 첫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난다. 그렇기에 더 이상 첫째가 아니다. 대속 받은 자들은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되 었고 하늘의 장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 계보를 계속 이으려면 동생들은 다시 첫째가 되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입어야만 한다.

리스트로 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 감람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학적으로 물었다.
A.D 3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그 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인용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태형에 의해 극도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빠진다고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평 들보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 비틀거리며 올라가셨다. 그 때 예수님은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있었기에 결국 넘어지셨고, 로마 군인들은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서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이 박히기 전에 이미 위독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져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외치신 것이다. 그리고 심장이 정지 되면 서 운명하셨다고 했다. 요한의 설명은 현대의 의사들이 예상하는 바와 일치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요한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있다고 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적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자신은 죄인이고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이 끔찍한 고통을 짊어지신 것을 믿는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하늘의 장자 명분을 준 것이 믿어 지는가? 그것은 오직 은혜였음이 믿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하늘의 그 이름이 기록된 장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많이 들어 자신이 그 분에 대해서 그냥 알고 있는 것인지, 믿고 있는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따라오는 삶의 증거는 '생존을 위한 권리를 주께 드리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같이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떠나고 그분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눈에 띌만한 죄악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존을 위한 일 때문일 경우가 많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 하늘의 장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생존권까지 하나님께 드리며 산다.  그리고 그 때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당신은 생존권까지도 주님께 맡기고 사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는 사람이다.

성령에 붙들린 사람

사도행전 14:19-28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설교요약>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룬 주제는 성령님의 성품과 특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내 안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지 궁금해 한다. 금주 말씀에는 내면에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 내면이 요동치지 않는다
한 영혼의 내면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함께 하시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 때 두드러지는 성품의 변화는 어떤 상황 속에도 쉽게 요동치 않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잠 4:23) 울었다가 바로 웃고, 화냈다가 바로 온화해지고, 사랑했다가 바로 미워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다 바로 세상 정욕에 사로잡히고, 칭찬했다가 바로 비난하고, 자신을 너무 좋아했다가 바로 자신을 혐오하며, 기뻐했다가 바로 슬퍼하는 삶이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삶인 것이다. 이런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삶의 결과는 '생명의 근원'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기쁨과 평안이 없으니 슬픔과 허무와 공허가 그 내면을 채운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주는, 진리이신 예수와 성령, 그리고 말씀이 내면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요동치는 삶에서 흔들림 없는 삶으로 변화하므로 스스로에 대한 후회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증가한다. 이러한 삶의 근원적 문제는 그 내면의 마음을 지켜줄 진리가 있는가 없는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사람도, 결코 우리 삶의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가치들은 우리의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 바위처럼 내면이 견고해지고 있다면 진리되신 성령이 당신의 내면에 살아 계시다는 증거다.

2) 하나님이 주신 양을 삶의 우선 순위에 둔다
무조건 어려운 사역을 하려는 것이 영적이고 성스러운 일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 속에 자신의 야망과 탐욕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음도 깨달아야 한다. 반면 영혼을 향한 사랑 때문에 어려운 일과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우선 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이 선택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았을까? 바울이 자신을 죽인다 한 의미는 세상의 정욕과 죄와 쾌락을 마음 속에 품게 될 때마다 그 마음들을 죽였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을 죽인다고 한 고백 속에는 자신도 그런 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우리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하고,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희생할 때에도 죽어지지 않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자아가 있을 수 있다. 그 때마다 그런 자아와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죽여야 한다. 그럼 어떻게 죽여야 할까?

3) 죄성의 태도와 행동들을 죽이기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구한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이 가장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고 또한 가장 영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곤 한다. 하나님은 이런 자아를 못박으라 하신다. 성령에 의해 인도되지 못한 자아는 혼자라는 외로움과 무거운 짐으로 인해 그 영혼이 상한다.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 너무 커져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을 때 우리의 근심은 찬송으로, 걱정은 기도로 바뀐다. 바울은 자신을 정욕과 교만과 차별과 무시로 이끄는 몸의 근성이 있었다. 반면 성스러운 삶을 추구하고, 겸손하며, 희생하는 모습을 추구하려는 은혜도 그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정적인 것이 마음에서 제어되지 않아 밖으로 표출되려 할 때, 그런 흉한 죄성의 태도와 행동들을 노예 다루듯 다루었다. 그 때 그가 노예처럼 다룬 몸의 태도와 행동이 다시 마음에 영향을 주어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태도와 행동이 그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는 경험을 하였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의 도움을 구할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우리의 몸이 우리 자신에게 복종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몸의 행동을 노예 삼고 있는가? 그럴 때마다 뜻하지 않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삶의 우선 순위가 무조건 어려운 일, 어려운 곳으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 안에 있는 양들을 사랑함인가? 당신의 내면에 요동치는 파도가 점점 바위처럼 견고해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께 붙들린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