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오실 때

누가복음 7:11-17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노메드 영성

마태복음 8:19-23 | 예레미아 35:14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14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설교요약>

믿음의 절개를 지킨 영성
예레미야3:14에 따르면 노메드 레갑족속의 영성은 30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런 절개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셨다. 레갑의 노메드 영성은 예수님을 닮았다.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마귀로 부터 3번이나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의 친 형제들은 그가 정말 위대한 분이시면 시골에 묻혀있지 말고 세상에 드러내라고 자극했다. 요한복음 7:4-5을 보면 그의 사랑하는 제자로 부터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유혹' 도 받았으나 타협하지 않으시고 꿋꿋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셨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했으나 죄인들의 죄사함을 위해 인내하셨다.마태복음 27:42에 예수님이 받은 유혹은 십자가를 지지 말고 세상 영광과 쾌락을 즐기라는데로 모아진다. 짧은 인생 예수님을 위해 거룩한 고난을 받는것을 중단하고 스스로의 육신의 정욕을 채우라는데로 모아진다. 바울은 로마옥에 갖혀 있을때 이렇게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다. 빌립보서 1:28-30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많은 사람과 상황을 통해 많은 은혜를 부어주신다. 그러나 그 은혜가 고난을 받게하기 위해 주신것임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한것은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이다. 한 영혼이 예수님 처럼 살도록 돕는것이다. 지옥의 고통속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영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이다. 예배자들이 되도록 돕는것이다. 나에게 준 은사와 가진것을 나누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 어려움을 격는 것이 고난이다. 이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고난받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는 동일한 싸움이기에 이 세상 어디든 존재한다. 주님 만날때 까지 피할수 없는 일이다. 우린 고난을 피해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한 세상 어딜가도 동일한 싸움이 있다. 그것은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마귀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공격해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레갑족속의 절개, 예수님의 절개를 가진 그분의 자녀의 삶을 모두 지켜보고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세상 정욕에 빠져 길을 잃은 자들을 깨우는데 사용하고 싶어하신다. 당신은 깨우는 사람인가? 깨워야 할 사람인가? 
무소유의 영성
노메드는 땅을 사지 않는다. 목초지를 따라 계절마다 이동하며 산다. 최소의 생활 용품을 가지고 다니는 거의 무소유의 삶에 가깝다. 이 명령을 300년이 흘러도 레갑자손들은 지켜오고 있었다. 예레미야 35:8-10에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8:20에 따르면 예수님은 바다위를 걸을수 있고 폭풍도 잠잠케 하시는 분이시다. 죽은자도 살릴수 있는 분이시다.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수 있다. 온세상의 주인이시다. 그런분이 없어서 가난하게 된것이 아니라 가진것을 포기함으로 가난하게 되셨다. 체념을 무소유의 삶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체념은 가진것이 없지만 어떤것을 소유할 기회가 주어지면 움켜쥐는 삶이다. 그러나 무소유는 가질수 있지만 포기하는 것이다.다시 가질수 있는 기회가 와도 움켜쥐지 않고 나눔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체념이 아니라 무소유의 삶을 사셨다. 무소유의 삶을 사신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집중하시기 위함이셨다. 이 말씀 다음에 한 제자가 아버지를 장사하고 따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마태복음 8:21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8:22에 이것은 하나님 사역의 긴박성을 보여준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내주실때 한사람 한사람을 더 깊게 더 따뜻하게 사랑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오늘 아니면 내일하지가 아니라 긴박감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 누구든 오늘이 마지막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긴박감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중에 하나가 '소유' 다. 가진 소유가 많아질수록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소유에 더 많은 관심과 관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소유가 없다고 대답하게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마태복음 8:19을 보면 이때 예수님은 여우와 새를 비유하며 머리둘곳이 없다고 하셨다. 이것은 나를 따르려면 소유보다 사람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수있니? 라는 의미다. 그 다음 장사하고 따르게 해달라는 사람에게도 때로 혹독하게 대답하신것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무거운 소유가 될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도 소유가 아니고 사람이지 않는가? 라고 의문을 제기할수 있다. 예수님은 부모를 사랑하고 가족도 사랑했다. 십자가에 죽으면서도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의 사랑이 더 우선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릴 보낼때가 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신다. 그러나 이때 내가 원하는 우선순위를 내세우며 그것을 먼저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사람이 소유로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으면 사랑이 아닌 도피처가 된다. 우상이 된다. 우상은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을 흘러가지 못하게 한다.따라서 무소유의 삶은 우선순위다.영적인 민첩성과 무소유의 삶은 연결되어 있다. 영적으로 민첩할수록 더 무소유의 삶을 살게되고 무소유의 삶을 살게 될수록 영적으로 민감해진다. 하나님이 소유를 계속해서 부어주시면 어떻게 하나? 라고 반문할수 있다. 민첩하게 흘려보내라. 사용하라. 그러면 썩지 않을것이다. 그러면 영적인 지방이 되지 않고 근육이 될것이다. 
당신은 무소유의 영성이 있는가? 
상급 
예레미야 35:18-19을 보면 하나님의 상급도 특별하다. 이세상의 상급과 다르다. 레갑의 자손에서 하나님을 섬길 사랑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실것을 상급으로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탄생부터 죽음 부활까지 한결같이 신선한 향유처럼 순수했다.하나님을 향한 사랑 사람을 향한 사랑이 열정이 불탔다. 이것이 하나님의 상급이다.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계속되고 순수함을 잃지 않고 열정의 불이 계속 타오르는 것은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하는 일이다. 주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야만 계속 탈수있고 태울수 있고 녹일수 있다. 
주님은 오늘도 노메드의 영성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신다. 

응답해 주고 싶은 믿음

누가복음 7:1~10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설교요약>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에 있던 로마의 백부장이 그의 종을 살려달라고 예수님을 초청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고 크게 놀라셨고 그의 소원을 들어 주셨다. 그럼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보자?

사랑의 믿음: 노예는 그의 생명이 주인께 달렸다. 그런 노예가 죽을 병이 들었다.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백부장이  그 종을 사랑했다고 기록했다. (2절) 따라서 사랑과 믿음은 비례함을 알수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가 간구하게 된다. 따라서 믿음이 성장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전과 다르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사랑하는 믿음을 보시고 그 종의 병을 고쳐 주셨다. 그럼 우리의 기도가 사랑의 기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수 있는가? 첫째.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사랑의 기도다. 둘째. 누군가를 위해 불가능한 기도를 하고 있다면 우리안에 사랑이 있다는 증거다. 그럼 이런 인격과 사랑의 음은 어디서 부터 흘러나오는 것인가?

예수님의 가치를 아는 믿음: 백부장은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할 자격도 자신의 집에 모실만한 동등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집에 까지 오시는 수고를 하시지 않게 하기 위해 무리를 예수님께 급히 보냈다. 백부장은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회당도 지어주고 자신의 민족도 아니고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받는 유대인을 섬기고 사랑했다. 사람들이 가치있게 여기지 않는 노예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대해 주었다. 그럼에도 그런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의 가치와 예수님을 감히 비교 할수도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백부장은 어떻게 예수님의 소문만을 듣고 이런 믿음을 보일수 있었을까? 요한복음 6장 37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백부장을 감동해 예수님께 나오도록  이끌어 주셨기 때문임을 알수있다. 백부장의 이런 아름다운 사랑과 인격은 자신을 부인할때 하나님이 부어주신 영적인 축복이었다. 그럼 자신을 부인하며 사는지 시인하며 사는지 어떻게 알수있을까?  

말씀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가? : 7-8절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말씀 하시는 예수님을 믿었다. 그러나 오늘도 그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기다리는 사람은 드물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본것은 자신의 모든 생각대로 예수님을 움직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주인에게 명령을 받으려는 종의 상태로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반응할수 있었던 것은 그는 삶속에서 종들의 헌신과 순종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자신이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매순간 순간 어디있든 어떤일을 하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고 그분과의 친밀감속에서 임재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납득되지 않는 명령에도 순종하는가? : 오늘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납득할수 있는 것 이해가 되는 것만 명령하시길 기대한다. 또한 납득이 되어야만 어떤 일을 시행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가고 있는것 같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가능한 것만 순종하려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경우 분명 납득되지 않는 일을 하게 하셨다. 이런 일을 하려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어야 가능하다. '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그분은 완벽하신 분이시다. 말씀하시면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어떤 불가능도 어려운 것도 없으시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수 있으려면 그분을 믿지 못하면 불가능 하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부인한다.



요구가 무거울수록

누가복음 6:20-49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3단계의 사랑 중 1단계는 하나님에 대해 갈급한 영혼들이다. 20-22절에 보면 예수님은 영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하고 갈망하는 영혼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채워짐과 하늘의 기쁨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2단계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목말라하는 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과 어려움을 격은 단계를 의미한다. 3단계는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세 단계를 정리해보면 1단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2단계는 나와 나와의 관계, 3단계는 나와 원수와의 관계이다. 이 단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럼 당신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

이 불가능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3가지 방법들이 있다. 첫째는 자책감을 주려 함이 아니라 자책과 결별하게 하기 위함이다. 35절에 보면 “기대하지 말라” 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누군가가 내 공로를 인정해 주고 고마워 할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37절에 보면 “용서해라” 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이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된다. 38절에 보면 “헤아려라” 이다. 이것은 상대의 사정을 배려하는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헤아릴 때 우리의 영혼에 채워지는 기쁨과 생명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는 자책의 마음이 끼어들 공간이 없다. 둘째는 땅이 아닌 하늘의 복의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22절에 보면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 복이 있도다 말씀하셨는데 교인들은 이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어려움이 올 때 인간적인 분한 마음과 진실을 분별하기 전에 오는 죄책감, 그리고 성령의 핍박에 대한 기쁨의 감사와 상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단이 우리들에게 주는 속임수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분별하면 상급과 소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믿어야 한다. 셋째는 훈련으로 원상복구 되어지길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사랑으로 행하지 않은 이유 중에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얻고 훈련 받지 않기 때문이다. 40절에 보면 “온전하게 된자”는 “원상으로 복구시키다” 라는 의미이며 배우는 훈련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다. 그래서 기초가 중요하다. 1단계가 중요하다. 주를 향해 가난하고 배고파하고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울고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할 때 그 영혼은 2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과 충돌하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았도 기뻐하고 감사하면 반드시 3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지혜롭게 대처하며 기다리는 사람으로 변해 갈 것이다. 당신은 이런 3단계의 사랑을 하고 있는가?

48-49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 반면에 행하지 않는 사람은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3단계의 사랑을 하면 영혼이 견고해 진다. 내면은 더욱 담대해 지고 거룩해 진다. 결국 예수님 같이 된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눈에 선한 십자가

갈라디아서 3:1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설교 요약>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보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갈:3:1/새번역)   예수님은 A.D 33년 4월 3일 오후 3시 경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바울은 A.D 33-36년 사이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다메섹 회심 후 14년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갈라디아서에 말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을 전한 지가 길어야 2-3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주고 싶어하는 사랑이 가득했다. 그러나 갈라디아 성도들의 마음은 다시 완악해지고 옛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갈라디아 3장 1절을 보자. 갈라디아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 절기도 지키고 구약의 제사도 다시 지내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질된 삶의 열매는 다시 예수님 믿기 전에 드러났던 옛 삶의 태도들이었다. 성령의 열매나 육체의 열매는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한 가지 죄악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면 다른 죄악도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 한 가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다른 열매도 계속 따라서 드러나기 마련임을 말씀해 준다. 열매는 그 뿌리와 나무의 결과다. 갈라디아 성도들의 완악해져 가는, 육신적이 되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의 은혜에 기반을 두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율법으로의 귀향 때문이었다. 외적으로 더 신령하고 거룩하고 타인보다 더 절제하고 금욕적인 삶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분별하기 어렵다. 신실해 보이고 특별해 보이고 경외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세속적이고 정욕적이고 서로 비난하고 경쟁하고 움켜쥐고 정죄하는 모습이 강하게 드러난다. 은혜는 반대다. 그 뿌리가 아직도 십자가다. 십자가가 눈에 선한 것 같은 마음은 얼굴과 행동과 삶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바울은 힘이 빠지고 낙담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다시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그들을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고백한다. 우린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다가 누군가가 다시 옛사람으로 율법으로 돌아가면 크게 낙심한다. 그러나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자처했다. 그럴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뿌리가 율법이 아니고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눈에 선한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바울처럼 세월이 지나도 십자가가 눈에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계속 율법이 아닌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죽음의 권세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자. 이 말씀에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씀이 현재 완료 수동태로 되어 있다. 우리 노력과 힘이 아닌 복음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매 순간 주님이 내 삶의 보좌에 않으시도록 내어드리라. 그럴 때 두가지 은혜가 임한다. 세상의 정욕을 내가 참고 죽이려 하지 않아도 세상의 유혹이 나에게 다가오다가 그냥 힘을 잃고 죽어지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the world had been crucified to me”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세상 쪽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세상 정욕을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서려 하는 욕망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상이 나를 보면서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세상의 권세를 잡는 사단이 우리 뒤에 있는 십자가의 권세, 예수님의 피의 권세를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죽은 자의 권세다. 변화된 삶은 노력한다고 되지 않는다.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복음을 듣고 십자가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할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산다. 그 다음부터는 그 죽음이 계속 권세가 되어 나의 정욕, 세상 자랑, 욕망, 육의 사람을 죽인다. 내 안에 사랑, 용서, 평안, 기쁨, 겸손, 소망, 비젼, 거룩, 절제는 살아나게 해준다. 이것이 죽음의 권세다. 당신 삶에 눈에 선한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십자가의 그 사랑이 눈에 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