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을 열어 샬롬을 보라

에베소서 1:15-19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설교 요약>
신약 성경에는 ‘행복’ 보다는 ‘샬롬’ 이라는 단어가 주로 언급된다. ‘샬롬’의 뜻은 ‘평안’ 또는 ‘평강’으로 번역된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원한다고 한다면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모두가 ‘샬롬’을 추구한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 영주권을 얻고 좋은 직장, 좋은 집, 아이들을 위한 좋은 학교 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이민 온 가정이 있는데, 그 조건이 그 가정의 삶에 만족과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경우를 보았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물론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비참한 상황에 빠진 그리스도인 부부가 있었는데, 그 부부는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평안과 평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여 주시고 소망을 주심을 믿어 알기 때문이라고 간증했다. 이것이 바로 ‘샬롬’이다. 세상적인 행복의 조건이 전무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붙잡고, 자신이 고통을 받는 중에도 타인을 향한 긍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샬롬’이다. 
’샬롬’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부터 울려퍼지는 소리 없는 찬양이다. 여러분 안에 ‘샬롬’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들 위에 집을 지어서 일 것이며, 눈에 보이는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울 왕은 원래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의식하기 시작한 후 제사장인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본인이 직접 제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을 더 의식하며, 자신의 판단에 중점을 두기 시작한 우상 숭배의 형태였다. 이런 관점에서 예배에 참석해도 마음이 올바르지 않고 중심이 그곳에 없다면, 하나님의 눈에는 그 것 또한 우상 숭배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즉,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하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다. 현대의 가장 큰 우상은 ‘돈’이다. 하지만 돈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줄 수 있으나 진정한 행복과 평강을 주지 못한다. 에베소서 1:17-18절을 보면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마음의 눈을 밝혀야 한다. 한마디로 눈을 떠라! 깨어나라! 하신다. 나는 지금 무엇을 믿는가? 라는 질문을 매순간마다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물을 지으신 후 맨마지막에 지으신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우리의 코에 생기를 직접 불어넣으셔서 우리는 생령이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다. 즉, 하나님을 닮은 자녀로 그 분과 사랑의 교감을 하도록 만드신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죄로 인해 세상의 질서가 깨지고 죽음으로 이르는 형벌을 받게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셈과 노아, 이삭, 야곱을 통해 인류 구원의 길을 만들어 가셨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그 구원의 길을 완성하셨다. 이것은 창세 전에 예비하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고,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 전인 이사야서 53:4-5절에 예언하신 바였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렸다. 이 평화가 바로 ‘샬롬’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이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문이 열리고 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28:19절에 보면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우리가 택함을 받은 목적대로, 지어진 목적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다. 교회가 그 택함을 받은 목적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진정한 평강인 샬롬이 시작되는 것이다. 

포로 된 자가 보아야 할 비전

에스겔 1:1-14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2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4 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 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 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8 그 사방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9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갈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 그 얼굴은 그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렸으며
12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3 또 생물들의 모양은 타는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는 번개가 나며
14 그 생물들은 번개 모양 같이 왕래하더라

<설교요약>
에스겔은 유다의 여호야 긴 왕과 함께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 당시 포로로 잡혀간 무명의 사람이 쓴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시는 육체적으로 포로가 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으로 어둠의 세력에 의해 영혼이 묶임을 받을때 드러나는 2 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과거의  은혜받은 때만 그리워 하고 현재는 자원함으로 하나님을 경배 못 함.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자유롭게 기도하던 삶의 그리움 때문에 오는 슬픔을 표현했다.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을 찬양했던 수금으로 기쁘게 하나님을 찬양할수 없었다. 그래서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산 그 땅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땅을 축복하길 원하셨다. 영적으로 어둠에  묶이면 과거의 은혜를 그리워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진 않는다. 적극적으로 자원함으로 그 상황 가운데에서도 기름부워 주실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있는 그곳이 사단이 장악하고 있는 공간과 장소라고 해도 하나님이 그런것에 제한받지 않으시고 당신의 머리위에 성령의 기름을 더욱 강하게 부워주실 것을 믿는가?  

둘째,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지 않고 타인을 향한 탓과 복수심에 불탐.
그발 강가에서 시인은 자신들을 포로로 끌어온 바벨론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요셉의 형들은 그를 시기해서 미디안 노예상에게 팔아 요셉은 애굽의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요셉이 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났을때 그는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울었다. 그리고 모든 그들의 죄를 용서했다. 요셉이 애원하며 살려달라고 부르짖을때 외면한 형제들을 용서하고 복수하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랑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이루신 일을 보았기에 가능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지면 복수와 미움의 마음이 가득해 진다. 복수와 미움은 아무리 해도 만족이 없다. 자괴감의 감정만 남는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속에 있는 에스겔에게 한 환상을 보여주셨다. 우리도 이 환상을 주목해야 한다. 에스겔이 본 사람 형상의 4개의 생물은 한개의 생물에 얼굴이 4개씩 있었다. 4개의 얼굴은 정면이 사람, 오른쪽은 사자, 왼쪽 소,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얼굴은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동서남북을  동시에 보고 있다. 이것은 모든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특히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속에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서만 임재하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1000마일이나 떨어진 바벨론 지금의 이라크 땅에서 이런 하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맨 앞의 얼굴은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외모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의 성품이다. 사람은 동물에게 없는 사랑과 정을 소유했다. 수금을 버드나무에 건 포로된 자들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에스겔과 포로된 자들이 보기를 원하셨다. 오른쪽 얼굴은 사자였다. 숫사자는 하루의 20시간을 그늘에서 쉬며 보낸다고 한다. 사냥을 자제하는 것은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사냥에 직접 나서 힘을 소비하는 것을 자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오른쪽의 사자처럼 그분의 자녀들의 오른손이 되신다. 뒤의 얼굴은 독수리다. 독수리의 눈에는 시각세포가 조밀하게 밀집해 있는데 사람은 한곳에 모여 있는 반면 독수리는 두 곳에 있고 그 안의 원추세포 수도 인간의 5배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독수리의 형상이 뒤에 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내가 보는 것 보다 더 넓게 더 높은데서 더 크게 보신다. 우리의 시야는 한정적이다. 우리는 좁게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각은 크다. 

하나님 능력
생물은 날개가 있고 불같고  광채가 있고 번개같이 움직인다. 하나님은 오늘도 한개의 불타는 석탄을 통해 또 다른 영혼들에게 그 불을 옮겨붙게 하신다. 14절은 번개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재림하실때 번개처럼 빠르게 오심을 말씀하신다. 에스겔이 본 환상도 네 생물들이 번개처럼 빨랐다고 한다. 주님은 내가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에도 지구를 7바퀴 반을 도실수 있다. 우린 이런 주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있다.하나님은 수년동안 해결되지 않는 일도 번개처럼 단 시간에 해결하실수 있다. 짧은 시간에 모든 고통과 아픔을 다 치유하시고 갚아주실수 있다. 이런 놀라운 환상이 바벨론 포로된 자들 가운데 있던 에스겔에게 보여졌다. 한주동안 당신이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자신인가? 4생물에 나타난 하나님 성품인가? 불과 번개같은 하나님의 능력인가? 

영원히 남는 일을 위해

누가복음 9:1-6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설교요약>

* 선택부터 파송까지의 일
예수님은 12제자를 선택하신 후 부터 계속 그들과 함께 하셨다. 예수님이 하신일을 모두 곁에서 지켜보게 하셨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가지 않으시고 처음으로 제자들 끼리만 복음을 전하러 보내셨다. 제자들만 보내시기 전까지 선택부터 파송직전 까지 어떤 일이 있었나 보자. 누가복음6장에 보면 예수님이 산에서 밤새 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침에 12제자를 부르시고 사도로 세우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병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그 다음에 산에서 팔복의 말씀을 전하셨다. 그 다음 백부장 믿음대로 그의 종의 병을 고쳐주셨다. 나인성에서는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셨다. 그리고 세례요한을 칭찬하셨다. 그 다음에 한 죄인인 여자가 자신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주시는 일이 있었다. 그 여인의 죄사함과 많은 사랑을 드러내셨다. 그 다음에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 하심으로 4종류의 밭중에 한개의 좋은 땅에서 백배의 결실을 맺는 것을 말씀 하셨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형제요 자매고 어머니라며 영적가족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항해 하다가 배가 물에 잠기는 상황에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두려워 하는 제자들이 그런 상황속에서도 믿음을 가질것을 교훈하셨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이런 비슷한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부어주시는 말씀과 성령의 은혜가 크고 마치 자신이 천국의 한 중심에 들어와 있는듯한 은혜를 누린적이 있는가?  주님을 따르다가 어려운 삶의 풍랑을 만난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왜 그런 은혜를 주시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다음구절은 그런 은혜를 주신 목적을 말씀하고 있다.

* 영원히 남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예수님은 이 날을 위해 제자들을 훈련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매 제자들 끼리만 보내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 고통과 외로움과 슬픔에 싸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천국의 삶을 누리기 원하신다. 지옥같은 삶에서 나오기 원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 그들을 고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믿음으로 살게해서 또 다른 믿음을 낳게하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세상의 이런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보낼 제자를 찾고 계신다. 훈련시키신다. 때로 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영원하고 가치있는 일을 위해 제자들로 하여금 풍랑도 지나게 하시고 물이 가득해서 삶의 배가 가라앉기 직전까지 가는 일도 경험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가라앉는 배를 건지시는 분이 예수님임도 경험하게 하신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라앉고 있는 삶에서 건져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이심을 전하게 하는 믿음을 예비시키신다. 요한복음 6:27 예수님은에 말씀처럼 썩는 양식이 있고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이 있다. 양식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한다.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을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다. 우리가 성령안에서 성령을 위해 한 일은 영원한 음식이다. 그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양식이 된다. 요한일서 2:16-17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라고 했다.  세상정욕, 육체의 욕망은 언젠가 없어지고 사라진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없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거둔다고 한다. 갈라디아서 6:8의 말씀을 보면 세상의 정욕과 욕망은 계속해서 열매가 나타나 우리의 삶에 고통을 안겨준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은 것은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고 영감을 주고 계속해서 없어지지 않는 천국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성령으로 심은 것은 우리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심지어 이 세상과 결별해도 영원히 남아 생명으로 흘러간다. 

* 영원히 남는 것을 심으려면
첫째.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따라 일하라.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린도 전서 3:10에 따르면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야망이나 누군가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일하지 않고 하나님이 은헤를 따라 기초를 놓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일하려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혜와 은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특별하게 주신 은혜들이 있다. 그 은혜와 은사들을 사용하려면 먼저 주님께 기도하고 묻고 실행에 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함에 있어 우리의 영혼에 기쁨이 있고 타인의 삶에 유익이 되는지를 체크해 보라. 

둘째. 사람이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이다. 
고린도 전서 3:11-15을 보면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불에도 타지 않으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불에 순식간에 타 없어진다. 예수님은 금과 은과 보석과 같다. 내가 아닌 예수님을 주고 내가 아닌 예수님이 드러나는 결정들을 한것은 영원히 존재한다. 이것은 사람이 가릴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이 결정한다. 불은 환란과 연단으로 성경에 종종 묘사된다. 예수님은 환난과 고난의 불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다니엘 3:25에는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해서 그들을 던지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는데 그들은 네번째 사람의 보호에 의해 타지도 않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고 불속에서 다시 나왔다. 다니엘 3:17-18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들은 환난과 고난이 와도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예수님만 따라가고 그분만 드러나는 가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결정한다.

셋째. 자신의 내면이 하나님의 성전인것을 항상 생각하며 산다. 
고린도 전서 3:16-17말씀을 보면 방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없다. 쓰레기가 자신의 방에 쌓여있는것을 보고 마음이 편한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 성령으로 심는 사람들은 내면에 악한 생각과 거룩하지 못한 마음들이 들어오면 불편해 한다. 즉시 하나님께 회개하고 고백하며 예수님의 보혈로 영혼을 씻는다.말씀으로 기도로 씻는다. 하나님은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주님께 드리는 일을 보석처럼 영원한 일로 남게 한다. 
당신은 영원히 남는일을 위해 살고 있는가? 
한주간 동안 영원히 남을 일을 한다면 어떤일이 될것 같은가?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가?

누가복음 8:40-56
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 두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43 이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가버나움의 회당장 야이로는 무리 속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다 배에서 내려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땅바닥에 엎드렸다.그 이유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었고, 예수님은 회당장이 원하는 대로 즉시 그의 집으로 향했다. 당시 회당장은 회당을 관리 감독하고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는 자들을 감독하는 일을 하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딸을 보면서 자신의 신분이나 체면따위는 게의치 않고 예수님께 엎드렸다. 예수님은 이렇게 겸비하게 자신에게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수많은 무리가 있지만자신에게 나와 경배하며 손을 잡아 끄는 그에게 가장 먼저 반응하셨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기다리길 원하신다. 

믿음의 기다림
(1) 문제를 가지고 나와 엎드림
회당장의 간구는 구체적이고 단순하게‘집에 와달라고 했고 딸을 고쳐달라고 했다. 짧은 한마디의 말 속에 다음의 세가지의 요소가 모두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말을 미리 준비했다. 둘째, 예수님이 자신의문제에 해결을 주신다고 믿었다.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와 소유속에서도 예수님 앞 땅에 엎드릴 정도로 자신의 영적필요를 분명하게 보았다. 셋째, 예수님은 회당장의 짧은 한 마디 속에서 그의 영혼의 소리와 믿음을 들으셨다. 

중언부언 하는 기도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을 더 먼저 알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거라사에 있으면서도 회당장 야이로가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다. 이미 오래전 부터 그의 딸이죽어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셨다. 그러나 야이로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라는 것을 넘어 예수님의 손을 잡고 그문제의 현장으로 데려가실 때 까지 기다리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을 더 간절히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하나님을 신뢰와 사랑으로 찾는 사람들이다.  

 (2) 생각의 언어와 행동
야이로는 한시가 급하다. 간절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에워싸며 밀치고 밀치는 청중들은 주님께서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의 문제와 필요를 전혀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관망하고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그러던 중 피가 멈추지 않는혈루증의 여인이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치료될 것 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의 언어를 행동으로 옮겼다. 그러자 12년의 세월동안 많은 의사를 찾았고 재산을 탕진해도 고침받지 못했던 혈루증이 그 즉시 치료되었다. 여인은신비를 추구하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음을 12년의 그녀의 삶이 증명해 보이고 있다. 여인은 부정적인 생각이 체질화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소망적인 생각을 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이라도 만지면낳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성령은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생각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만약 누군가 하나님의 능력을 좋지 않은 목적을 위해 만졌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말씀은 여인의 마음에서 역사하고 있던 분은 성령님 이셨음을 증거한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것은 어떤 일을시행하려 할 때 성령이 주신 생각인지 아닌지 알려면 행동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을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면 그 행동으로 인해 예수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간다. 

야이로도 혈루증 여인도 다윗도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사랑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사랑을 입혀 주신다, 간절히 찾는 자들을 만나주신다. 구체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고 있다면, 성령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을 드리고 있다면, 당신은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 너희, 그리고 외인들

에베소서 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요약>

5세기 무렵부터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곡조를 붙여서 노래로 부릅니다. 그래서 기도가 찬양이 되고 말씀이 노래가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에 단순히 율법을 암송하는 허공의 소리일 뿐이다.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와 찬양으로 서로 화답하라고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찬양할 때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은혜이고 축복이다. 그 은혜를 경험할 때 소망이 생기고 습관적인 죄와 내적인 상처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3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중에 영적인 가족도 있다. 우리는 영적인 가족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을 나누는 축복을 누리며 그로 인해서 육적인 가족도 더 온전하게 사랑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는 영적인 축복과 육적인 축복은 어떤 관계인가? 결론적으로 보면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 이유는 세상적인 부자가 영적인 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인 축복을 많이 받던 사도바울은 육적인 축복들을 거의 소유하지 못했다. 하지만 누가복음 12:33-34절에 보면 육적인 축복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눠주면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된다. 여러분에게 있는 육적인 축복은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그것들을 주님께 드리면 영적인 축복으로 전환된다.

열매는 생명이 있다면 반드시 열려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가진 자들의 성품은 예수님을 닮은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영적인 제자들을 계속 낳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없고 은사만 있다면 주의해야 한다. 마가복음 16:17-18절에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은사적 증거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 은사는 믿는 모든 자들에게 나타난다고 하셨는데 왜 우리에게 이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가? 그 이유는 능력을 일으키는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즉 성령님의 뜻대로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능력이 진정한 성령의 은사이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능력에 순종해서 일으킨 기적이다. 복음서에 보면 스스로의 능력으로 행할 수 있던 예수님도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셨다. 성령에 거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영적인 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성령 그 자체인 것이다. 에베소서 1:13-14절에 보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고 그 성령이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셨다고 한다. 성령은 하나님 자체이다.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 죄인인 우리에게 거룩하신 성령님이 거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피로 인함이다. 죄에 물든 우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었고 다시 부활하신 것이다. 이 생명은 더 이상 아담으로 받은 병든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인 생명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3, 9, 11, 12절에 보면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가 나온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다 구원 받을 백성들이 결정된다고 하신다. ‘우리’에 대해서는 우리가 믿었다라는 표현이 없다. 하지만 13절에 ‘너희”에 대해서는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어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너희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에 속한 사람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다시 그리스도의 밖에 있는 사람, ‘외인’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있음에도 아무런 열매도 능력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원인은 극단적인 거짓말에 속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영적인 복들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교인들과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이단적인 사상이다. 즉 거짓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찬송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구원의 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열어주셨다는 사실이며 한번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그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과 같이 주께 드리라! 주님을 가장 앞에 두어라! 그리고 다시 주님이 하신 일들을 찬송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