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은 사역이다

사도행전 14:11-18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설교요약>
사단이 다양한 공격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첫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 분을 예배하는 것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오늘날의 교회가 복음을 전해 그들로 채워지길 원하신다.
또한 그들에게 성경을 처음부터 잘 가르쳐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길 원하신다. 이런 일을 할 때 사단은 우리를 영적으로 공격한다. 이런 위협에도 담대하고 평안하게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마귀가 싫어하는 일인지를 인지하는데서부터 나온다. 

사단이 다양한 공격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두번째 이유는 관계는 끊지 못해도 교제라도 끊어 놓길 원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그 분과의 교제는 점점 시들해지고 세상의 영광과 쾌락에 취하다 보면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이 어려워 진다. 그렇게 되면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고, 영혼 구원에 무관심해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안에서 분별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분별의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유지할 때 그 분과 계속 교제하고 그 분의 거룩한 성품과 은혜들을 제대로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의 유혹들을 무기력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 위해서 추구해야 할것은 무엇일까?
1) 거룩은 사역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할 분은 오직 유일신이신 하나님이다라고 성경은 적고 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거룩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하는 것에서 거룩은 시작된다. 하나님은 나도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어떤 일을 대단하게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이 사역의 첫 번째 목표가 되야 한다. 거룩한 삶은 마음으로 죄를 짖지 않는 것이다. 우린 마음으로 사람을 미워할 때가 있다. 보이지 않기에 쉽게 범하는 죄다. 미움은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음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해서 그 사람에게 솔직하고 진실하게 대화하는 것이 좋다.

거룩한 삶은 외모에도 세상 사람과 구별됨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마저 세상 사람들의 흉내를 내며 그들의 죄악된 문화를 추앙하며 따라간다. 거룩은 신발을 벗는 것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스스로를 주인이 아닌 종으로 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거룩에서 나온다. 그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주어진다. 거룩한 삶을 살면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나와 이땅에서의 일과의 관계도 나와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관계도 거룩과 연결되어 있다. 마음과 행동으로 죄를 지었을 때는 빠르게 회게해야 한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의 죄들을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며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단발적 죄의 용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 때문이셨다. 우리 스스로가 거룩한 느낌이 들지 않을 때 더럽고 수치스럽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통로인 예수님으로 다시 하나님의 평안과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 그럼 다시 거룩하게 되고 영혼과 뼈 속까지 깨끗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된다. 거룩하면 열정이 불 같이 일어나게 된다. 거룩하면 담대해진다. 거룩하면 기뻐진다. 거룩하면 단순해진다. 거룩하면 어느새 막힌 문이 열린다. 우리 힘만으로는 안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다. 그래서 거룩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 거룩은 관념적 언어가 아니라 사역이 되어야 한다.

2) 옷을 찢고 창조주 하나님을 전하는 열정을 회복하라 .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을 전했다. 구약의 기록된 창조 이야기를 읽어보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며 하나님의 기쁨을 기록했다. 그 세상을 누리고, 즐기고, 성취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그가 창조한 사람들로 그가 만든 세상 속에서 마음껏 표현하고, 세상을 가꾸며 관리하도록 하셨다.

그 분이 자신의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들은 그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신뢰했었는지를 복음서를 통해 보여주셨다. 그 아들의 성품은 거룩하고 온유하고 순결하였으며 사랑 그 자체였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 세상의 온갖 난잡하고 더럽고 추하고 잔인한 자신들을 닮은 신들을 만들어낸 인간들을 용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까지 하셨다. 그리고 다시 부활시켜 이 세상의 어떤 우상의 신들도 흉내낼 수 없는 증거를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거룩이시다. 하나님은 순결이시다. 하나님은 진실이시다.
그래서 그분께 나가는 자는 다 그 분처럼 변화된다. 그래서 그 분을 만나면 그 분의 성품에 감격해서 이렇게 찬양한다. '당신이 옷을 찢 듯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영혼들은 누구인가? 당신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거룩의 성품은 무엇인가!'

의미 있는 고통

사도행전 14:1-10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본 적이없는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설교요약>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의미가 있는 고통과 의미가 없는 고통이다. 의미 있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미리 예비하신 고통이며 그 안에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 크게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그 일을 회피하거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따르길 주저하곤 한다. 그 때 우리가 겪는 고통이 과연 의미 있는 고통인지 아닌지는 다음 네가지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길로 인도를 받는다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로 옮겨 온 바울에 의해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가 받은 축복처럼, 하나님이 주신 고통은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금 받는 고통이 하나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의미 있는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이 주실 축복의 열매에 집중하게 된다
고통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과 축복의 열매에 집중한다. 고통과 가시는 반복된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처럼 고통의 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들과 일들에 더욱 자신의 시간과 삶을 드릴 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열매 맺음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가시로 열매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열매 속에 가시를 박아두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열매의 즙들이 가시를 녹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서 고통 받음을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와 선물들에 집중해야 한다. 

3) 자신의 일을 스스로 컨펌하지 않고 하나님께 컨펌 받으려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을 따르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그 일을 해결해주셔서 우리가 다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 그러므로 어떤 불가능한 상황 앞에 있을 때가 우리가 주님께 컨펌 받을 때임을 기억하고 간절하게 그 분을 향해 구해야 한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셔서 하는 일인데 하나님이 기적과 표적으로 컨펌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4) 누군가 나를 통해 치유되고 은혜를 받는다
바울이 전한 말씀으로 믿음이 생긴 평생 앉은뱅이였던 루스드라는, 바울이 그를 향해 소리친 후 즉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성경에서 보듯 하나님은 병자를 치유하시는데 바울을 사용하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고, 그 말씀은 루스드라에게 자신이 낳을 수 있다라고 하는 소망을 주었다. 

이 증거들을 통하여 우리는 과연 의미 있는 고난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고통이기에 그 고통을 통한 축복의 인도도 하나님이 해주실 것을 믿으며 고통 그 자체보다는 우리에게 주실 열매를 기대하여야 한다. 또한 고통 안에서 나아갈 때 스스로가 아닌 하나님께 컨펌을 받아야 하며 다른 누군가가 내 고통을 통해 은혜를 받는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고통임을 알기에 우리는 더 깊숙히 고통 속으로 들어가 견딜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길 것이다. 

인정과 믿음의 차이 2

사도행전 13:13-52 (13:42-52) 
42 저희가 나갈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설교요약>
애굽왕 바로는 10대 재앙을 당하고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자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렇게 고백했다.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출 12:31) 또한 애굽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 12:36) 결국 이런 보석들은 훗날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짖는데 헌신하는 재료로 드려진다. 결국 애굽 왕은 다시 마음이 변해 이스라엘 백성을 추적하다 갈라진 홍해에 모두 수장되었다. 요점은 바로와 애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고 그들에게 보석까지 주었으나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이다. 인정하지만 믿지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을 42-52절에 바울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믿게된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알 수 있다.

인정이 아닌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
1) 예배와 말씀을 사모한다. 거듭난 사람들은 정규적인 교회 모임에 사회 활동을 위해 나오지 않고 예배의 말씀을 기대하며 나온다. 당신은 예배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사모하는가? 그렇다면 거듭나 믿는 사람이다.

2)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한다. 전에는 세상의 쾌락과 정욕을 쫓는데 관심을 갖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가지려 애쓴다.

3)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것은 그 전주에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나가서 사람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당신 삶 속에 은혜가 있으면 그것은 누군가에게 당신이 받고 있는 것에 대해 흘러 보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믿음이다.

4) 시기와 방해를 받는다. 유대인들이 시기한 내용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외모나 가진 소유나 자녀나 풍부한 누림들이 아니었다. 세상의 시기와 질투는 외적인 것들이지만 영적인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혼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곳에 갖힌 영혼들을 구해 내는데 있다. 이것이 사단의 시기이고 방해이다. 그 모든 영적 열매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죽어 있고 고통받는 한 생명을 사망에서 끌어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천국을 살게되는 통로로 드려지면서 받는 시기다.  이것은 당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누군가를 구해내고 있는 데서 오는 사단의 시기고 질투인 것이다.

5)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시기를 받아도 담대하다. 우리는 담대히 살고 싶어한다. 두려움이 없는 마음이 담대한 마음이다. 담대하면 평안하다. 마음이 평안하면 더욱 사랑하게 되고 더욱 진실한 사람이 된다. 이런 담대함은 사람의 비위를 맞춘다고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할 때 하늘로부터 주어진다. 당신은 담대한가? 믿음으로 사는 삶의 증거다.

6)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어려움이 오면 무조건 더 낳은 길을 찿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 낳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사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7) 믿어지는 은혜를 받은 것을 안다. 믿음의 사람,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고 믿어지는 은혜를 받았음을 찬양하고 기뻐한다. 이 말씀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소망을 준다. 믿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줄 때 항상 경험하는 것은 전혀 기대치 않은 사람들이 간절하게 신중한 태도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때마다 전하는 사람의 자아가 더 많이 깨지고 성령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믿을 때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된다. 한 사람의 변화는 내 감정이나 생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8) 기쁨과 성령이 하나님의 의해 주어지는 것을 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쁨과 성령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선물임을 안다.

인정과 믿음의 차이 1

사도행전 13:13-52 (13:13-41)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 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 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포기하지 않으면

사도행전 13:1-12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설교요약>
사도행전은 바울이 처음 전도 여행을 떠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전교 여행을 가게 된 동기는 바나바를 통해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하면서였다. 안디옥 교회에는 바나바와 요한을 비롯하여 니게르라하는 시므온인 아프리카 사람, 루기오라는 구브로 사람, 세례 요한을 참수시킨 헤롯왕의 동생이자 귀족 출신인 마나엔 등이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민족과 인종, 다른 언어 및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하나가 되고, 어떻게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이상적인 교회로 부흥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이 2절에 나와 있다. 안디옥 교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듣고, 주님의 음성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결정하고, 성령으로 함께 움직이는 생명력이 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핵심 리더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성령의 음성만으로, 흔들림 없이 담대하게 구브로와 살라미 지역으로 파송을 결정했던, 건강한 교회였다. 이 모습은 10년 전 MMC가 하나님의 음성에 의지하여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사우스 다코다 땅으로 선교를 떠났던 모습과 닮아 있다. 그 당시 하나님은 선교팀이 30~40명의 온순하고 착한 아이들을 만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맛보게 하셨다. 

다시 본문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의 구브로 사역은 평화롭고 순탄했었지만, 6절을 보면 그들은 수도 바보에서 바예수라는 주술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총독의 자문 역할을 담당했던 로마에서 온 사람이었다. 총독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길 원했으나, 바예수는 총독이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두 번째 선교지에서 대적하는 자가 생기게 된 것이다. MMC가 10년 동안 사우스 다코타로 단기 선교팀을 보내고 있는데, 첫해의 순탄했던 사역과 달리 이후 매선교마다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아이들이 나타나 선교팀의 사역들을 방해했다. 그런 상황들은 선교팀 마음 속에 이 땅에 소망이 있는지, 이 아이들은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낳게 했다. 게다가 선생님께 반항하며 폭력적 성향을 보인 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팀들의 사역은 더욱 힘든 상황으로 내몰려졌다. 이런 과정들로 10년이 채워졌다. 선교팀에게 보인 그 아이들의 폭력성과 협박은 사우스 다코타 선교를 방해하는 바예수와 같았다.

그러나 10년을 포기하지 않고 갔던 이번 사우스 다코타 선교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순해진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10~11절에 보면 바울은 바예수를 시각 장애인으로 만들고 총독은 마침내 복음을 믿게 된다. 이번 선교에서 믿음이 크게 성장한 한 아이는 “ I am a lost sheep” 라는 고백을 했다. 그 아이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폭력성을 보였던 고등학교 졸업반의 한 아이는 선교팀의 어린 멤버와 친구가 되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인디언 전통 파티에 선교팀을 초대하는 일도 일어났다. 사단은 우리를 무섭고 두렵게 만들어 주님의 사역을 멈추게 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멈추지 않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풀어지고 그가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우스다코다가 우리 인생의 축소판 같지 않은가? 하나님의 인도로 일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순탄하다가 바예수와 같은 난관에 부딪히기 시작하는 그 때에 두 마음이 싸운다. 이걸 계속 해야하나? 말아야 되나? 그 때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풀어지며 일하시기 시작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때 사단의 힘이 사라지는 것이다. 총독이 회심할 때가 사우스 다코다 아이들이 회심한 때인 것이다. MMC와 우리들의 삶을 붙들고 있는 것은 사단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선교팀을 두렵게 했던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MMC선교팀과 하나님의 제자들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단을 끝까지 벌하는 분이시다. Don’t give up!!!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역사하시기에 우리는 포기하지 않으며 늘 하나님을 기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