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

사도행전 19:1-20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헬, 또는 침례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1)세례를 받으니 헬, 또는 침례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새롭게 하는 사랑 2

사도행전 18:12-28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설교요약>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크게 세 유형의 사람들로 분류할 수 있다.

육신의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첫번째 무리는 육신의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한 아이의 음식이였던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의 무리를 먹이고도 남는 음식들을 제자들에게 열 두 광주리에 담게 하셨다. 이 기적을 보고 오천명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했다. 이것을 미리 아신 예수님은 홀로 조용히 산으로 가 몸을 숨기셨다. 이튿날 이 수 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찿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찿기 위해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가는 열정을 보였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이 내려주셔서 먹었던 만나라는 떡이 바로 자신을 예표하는 그림자였음을 말씀해 주셨다. 자신이 생명의 떡이기에 자신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될 것이라 하셨다. 썪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을 위한 양식을 위해 일하라 하셨다.

예수님 모시고 자신의 힘으로 사는 이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택하여 사역을 시작하던 초창기였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는데, 풍랑이 일어나 배가  바닷물에 덮이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자기들이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불평하며 예수님을 깨웠다. 이때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고 잠잠케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무서워하고 믿음이 없느냐?'라며 책망하셨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예수님은 모시고 살지만 여전히 자신이 삶의 주인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인생의 배에 모시고 있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나 삶의 어떤 힘든 문제가 찿아오면, 예수님을 자주 원망하고 그 모든 원인을 주님께 돌린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만 자신들의 주님으로 예수님을 인식하지 않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 은혜를 주시고 계셨다. 첫째, 삶에 적용할 생명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고 둘째, 많은 표적들을 통해 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간섭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보여주셨다.하지만,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생명의 말씀을 들었느냐가 맏음의 성장과 태도의 변화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때문에 예수님은 받은 말씀과, 삶 속의 공급하시는 기적을 토대로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럼 어떻게하면 우리의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할 수 있을까?그 모델을 세번째 유형의 사람을 대표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찿을 수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처음에 로마에서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을 추방하는 일로 고린도에 생업을 따라 이민 왔다. 그러다 바울을 만났고 하나님이 어떻게 고린도에서 역사하시는 지를 모두 지켜 보았다. 회당장 그리스도와 그의 온 가족의 회심과 그 후임자 회당장 소스데네의 회심과 제자가 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 하시며 그를 강권적으로 사용하시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을 보고 체험하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이 두 사람을 자신들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은 사람들로 소개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5) 이 두 사람이 마음을 새롭게 한 방법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뜨거운 사랑'이었다. 이 두 사람은 바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감사를 받을만큼 사랑과 열정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가장 안정된 순간에도 주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든 순종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 사랑이 아볼로에게 흘러갔고, 아볼로는 그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의 가르침과 함께 흘려 보냈다. 이렇듯 세번째 유형의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다. 사랑하며 사는 제자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다. 이러한 사랑하는 마음에 더해지는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의 폭포로 우리의 막혀 있는 영혼의 답답함이 뚫어질 것이다. 그 동안 없다고 불평하고, 비교하고, 원망하던 마음이 떠나고, 하나님이 지금 당신의 삶에 부어주고 계신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소망의 일들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또한 당신의 마음을 긍휼함으로 채워 우리가 도와주고 싶은, 아볼로와 같은 사람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적극적으로 헌신하라. 

우리는 이 세 유형 중에 어디에 있는가?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있는가? 좋은 말씀과 체험은 많이 하나, 마음이 냉랭하진 않는가? 그렇다면 세번째 유형으로 변모하라. 세번째 유형은 받은 말씀과 체험들을 사랑으로 매일 새롭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 때 당신의 영혼은 소망과 긍휼과 담대함으로 매일 새롭게 채워질 것이다.

새롭게 하는 사랑 1

사도행전 18:12-28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공급하심

사도행전 18:1-11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설교요약>
무역도시이자 남 그리스와 북 그리스 사이의 연결 도시로 이용되었던 그리스는 그 당시 가장 부유하고 사람이 많은 도시였다. 그러나 이런 재물로 인해 교만과 부도덕, 동성연애 등의 사악한 죄악이 이곳에 만연하게 되었다.이 곳에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장막을 지으며 복음을 전하게 된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시는 공동체 내에서의 사람과의 은혜와 수동적인 은혜들을 살펴보자.

사람 은혜
바울이 홀로 아덴을 거쳐 낯선 고린도에 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침 믿는 유대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해주셨다. 그들은 당시 로마에 살고 있었는데 황제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바람에 고린도로 이민을 와야만 했다. 당시 수공업의 기술을 가지고 있던 바울과 이 부부의 직업도 동일했다. 그래서 함께 일을했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을 도우며 헌신했다. 당시 지중해 근방에는 많은 나라들과 도시들이 있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 많은 로마의 식민지와 도시들로 갈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고린도에 왔을 때는 놀랍게도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한 시점 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까지도 아까워 하지 않고 바울을 도왔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누군가 당신을 위해 목숨도 아까워 하지 않고 돕는다면 어떨것 같은가? 꺼져가던 영혼도 다시 뜨겁게 타오르지 않겠는가?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경험들을 자주한다. 함께 주를 위해 일하고 먹고 웃고 울었던 사람들이 곁을 떠나간다. 그때 마음이 슬퍼질수 있고 열정이 약해지며 힘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다시 하나님을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또 다른 도울자를 예비시키시고 보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아굴라 부부처럼 함께 일하고 주를 섬기며 헌신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일들을 주도적으로 세워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사람들의 존엄성을 세워주고 사랑받고 사랑을 주는 관계로 세워가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새롭게 주시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라. 만약 지금 아무도 없는것 같다면 떠나간 사람으로 인해 슬퍼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도하라. 하나님은우리에게 사람을 주시는 분이시다.

수동 은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도 자신이 주도적으로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고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와 베뢰아로 들어갔다. 거기서도 자원해서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했고 믿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한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다시 몰래 그곳을 떠나 아테네에 도착했다. 아테네 에서도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매일 장터에서 철학자들과 변론하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체포되다 시피해 법정에 서야 했다. 그 전에는 빌립보에서 자원해서 귀신들린 여종을 귀신을 쫓아내어 자유케 해주었다가 빌립보 감옥에 수모를 격어야 했다. 그러나 그 감옥에서도 자신을 때리고 고통을 준 간수에게 복음을 전해 구원받게 해주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바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한 일이다. 그런데 당시 바울 곁에서 카메라맨 역할을 했던 저자 누가는 고린도에서 두드러지는 한 인상적인 장면을 적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영에 강하게 붙잡힌 모습이었다. 지금까지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열정적으로 사역하며 헌신했다. 그런데 고린도에서는 하나님이 그를 등에 엎고 뛰시는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몸은 추운데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할때가 있다. 몸은 휴식을 원하는데 생각은 전혀 힘들지 않고 괞찮다고 느낄때가 있다. 그 상태를 방치하면 몸에 문제가 생긴다. 바울은 어쩌면 자신이 느끼는 어떤 영적인 육적인 기갈이 있는데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는 고린도에서 노동을 하면서 안식일 마다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했다. 4절 '안식일 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he reasoned in the synagogue, and persuaded the Jews and the Greeks' (4절-NIV) 여기서 두개의 동사는 분명 능동태로 쓰여졌다. 우리는 주를 따르면서 자신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할때가 있다. 자신의 느낌과 실제가 다를때가 있다. 실제는 마음이 두려운데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외로운데 외롭지 않다고 느끼며, 몸이 힘든데 크게 힘들지 않다고 느낀다. 반면 그 반대일때도 있다. 두렵지 않은데 두렵다고 느끼고, 외롭지 않은데 외롭다고 느끼고, 힘들지 않는데 힘들다고 느낀다. 이때 우리의 상태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 이시다.이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수동태의 은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으시는 은혜다. 그 우리 자신과그 짐의 무게도 모두 그분이 짊어지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수동의 은혜다.

우리는 그분의 푸근한 가슴에서 다시 새힘을 얻는다. 그분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큰 평안과 생명을 공급받는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 바울을 보면서도 그를 핍박하고 공격하는 유대인들의 증오는 계속되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 증거를 남기며 유스도라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고 회당장 그리스보와 온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밤에 다시 환상중에 바울에게 나타나 두려워 하지 말고 계속 전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와 함께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그를 아무도 해할수 없게 지켜 줄것이라고 하시며 그 도시에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들이 많다고 다시 수동의 은혜를 주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수동적인 은혜를 보면서 그것을 의지가 약하고 의존적이고 요행을 바라는 삶이라고 유대인의 율법적인 관점으로 볼수있다. 매순간 하나님 앞에 굴복하라. 그분 앞에 무릎꿇고 십자가 앞에 나오라. 그리고 은혜 아니면 살수가 없다고 고백하라. 그때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고 우리의 사랑은 더욱 진실해져 가고 우리의 선행은 더욱 생명을 주는 축복이 될것이다.

하나님을 보려면

사도행전 17:15-34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나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고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들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붇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나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여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슴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고 있었더라 
 

<설교요약>
사도바울은 2차 전도여행때 베레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해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도록 방해를 받았다. 바울은 핍박하는 무리들에게 쫒기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아테네에 머물면서 베레아에 남아있던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바울이 전했던 말씀중에 두개의 구절을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한다.

정해주신 시간과 경계
26절에 보면 두 개의 단어가 눈에 띈다. '연대와 경계' 다. 연대는 “정한 때” 라는 어떤 시기와 기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계는 “정해진 한계”라는 장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간과 장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간과 장 소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라
27절을 보면 성령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더듬어' 라는 단어는 “만져보다” 라는 의미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주의 깊게 묵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을 찾는 방법
1) 축복하는 사역이다.
야곱의 생애를 한가지로 압축하면 “축복하는 일”이었다. 창세기 47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 애굽의 왕인 바로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다. 그 다음에 야곱의 죽음이 가까워 올 때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하는데 이때 장자인 므낫세에게 야곱이 오른손을 얹지 않고 둘째인 에브라임에게 얹은 것을 보고 잘못 얹은 줄 알고 요셉은 아버지의 손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창: 48:19) 하며 그 손을 옮기지 않고 에브라임을 므낫세 보다 앞세웠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 축복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12명의 아들들을 축복하며 생애를 마쳤다. 그리고 훗날 그 예언들이 모두 성취되었음을 그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또한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한 축복임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선택하시고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겠다고 감동시키신 일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야곱이 가졌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다.당신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2)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시편 143장 7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그분의 얼굴을 숨기실 때 자신의 영혼이 피곤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얼굴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그분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취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는 기쁨과 평안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침을 뱉었다.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수치와 폭력으로 인해 일그러진 이 땅의 영혼들의 얼굴을 그분의 손으로 감싸주고 상처를 싸매주며 흐르는 눈물과 피를 닦아주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가로막는 고질적인 방해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수치와 폭력에 상한 마음이다. 우리는 마음이 완벽하게 죄 사함 받고 치유 되기 전 까지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삶 속에서 겪는 슬프고 마음상하는 일들이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의 고통 받는 마음에 치유와 기쁨을 줄 수 있는 능력임을 말씀하고 있다.하나님이 당신의 그 해결되지 않은 슬픔과 고통들로 누군가를 치유하고 있을 수 있음을 믿으라.

3) 하나님을 찾으려면 한번에 한 사람씩 사랑하라.
야곱이 요셉이 보낸 수레를 타고 애굽으로 내려갈 때 그의 전 가족은 70명 이었다. 하지만 야곱이 147세에 그의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창: 48:4). 야곱이 이 비전을 40세에 받았다고 하면 거의 100년이 지난 시간이지만 야곱은 죽음 직전에 하나님의 비전을 분명히 기억한다. 외적인 상황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계속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이 일에 중심에는 요셉이 있었다. 야곱에게 있어 요셉은 두 가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다. 첫째. 사랑은 다시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둘째. 완벽하지 않은 사랑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야곱의 불완전한 사랑으로도 요셉같이 훌룡한 용서와 사랑과 생명을 사랑하는 열매를 거두게 하셨다. 또한 죽은 줄 알았던 그 사랑을 다시 부활시키셨다.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처럼 완벽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은 물거품처럼 되버릴때가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것 보다 계속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 우리가 한번에 한 사람을 사랑하려 할 때 완벽하지 않아도 때로 물거품처럼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신다.

당신은 누군가를 축복하고 기도해 주고 있는가? 당신의 슬픔과 고통으로 누군가의 얼굴의 수치와 상처를 닦아주고 있는가? 한 번에 한 사람씩 사랑하고 있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살도록 인도해 주신 땅과 그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보게 될 것이다.

준비된 마음

 

사도행전 17:10-14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설교요약>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그분의 말씀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신중히 기쁨으로 듣기 원하신다.

준비된 마음과 믿음
듣는 것이 신중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도 상대방이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신중하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그도 다른 사람이 말할 때 신중한태도를 취하지 않는 현상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가 말씀을 듣는 중에 읽고 묵상하는 중에 소망의 생각과 마음들을 주셨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눈으로 보는 것을 누릴 수 있는 준비된 마음
성경에는 눈으로 보았지만 누리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다. 12명의 정탐꾼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눈으로 보았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실것이라는 약속을 약 1년 4개월 전 이미 홍해를 건너기 전에 모세를 통해 들었다.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실것 뿐만 아니라 그 땅에 할일도 미리 말씀해 주셨다. 따라서 그들이 보았지만 누리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다. 1년 4개월 전에 주신 말씀을 마음에 넣어 놓지 않고 신중하게 듣지않고 건성으로 들었기 때문에 막상 현실에 부딪칠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현실의 상황 앞에 절망하게 된것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해준 사랑의 말들을 쉽게 잊지 않는다. 그것은 건성으로 듣지 않고 진심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듣는 것은 사랑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을 어려서부터 암송하고 외웠다. 그러나 그 말씀안에 예언 되어 있는 메시야 예수님에 대해서는 왜 보지 못하는가? 이것은 지식으로는 받아 드렸는지는 모르지만 준비된 마음, 신중한 마음으로는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받아 드리지 않는 말씀은 결국 사단이 그의 눈을 가려 속임 가운데로 인도하기 마련이다. 말씀은 우리 삶의 '사용설명서' 다. 우리는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알려면 말씀을 준비된 마음으로 잘 들어야 한다. 그러면 그분을 더욱 잘 보게 되고 그분이주시는 것을 보는것 뿐만 아니라 모두 누리게 된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
주님이 우리와 24시간 동행 하시는데 왜 만남을 준비해야 하는가? 공식 예배와 또는 개인 경건의 시간은 늘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과 밖에서 만나는 시간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런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고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간을 통해 기대와 기쁨으로 채워지는 천국을 경험한다.

1) 할 말들을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을 미련한 사람 보다도 더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말들 속에는 소원도 고백도 아픔도 갈등도 감사도 기쁨도 모두 들어 있게 된다.

2) 기도로 준비한다.
기도하며 준비할 때 이미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축복들이 부어 지기 시작한다. 응답들이 주어진다.

3) 빈 그릇을 준비한다
미리 시간 전에 와서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메마른 땅이 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은혜를 사모하면 하나님은 그 준비한 마음의 그릇에 그분의 은혜를 부어 주신다. 특히 당신의 모든 생각, 계획, 염려를 비워 빈 그릇이 되게 하라. 온갖 세상 것들로 가득 찼다면 먼저 주님 앞에서 고백하며 비우면 주님이 채우실 것이다.

4) 선물을 준비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무엇인가 주고 싶어진다. 주면서도 받아주면 너무도 고마워 한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생각하며 나오라. 그때 눈으로 보는 것을 누리게 될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사도행전 16:35 - 17:9
35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한대 
38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니라

<설교요약>
두 종류의 사람
우린 삶에서 위로 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상황은 위로 받기 보다 위로 해주고 돌봐주어야 하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그때 내면에는 갈등이 일어날수 있다. '나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지? '라는 불만이 계속 솟아오른다. 그러나 또 다르게 반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계속 위로하고 누군가를 돌보면서 자신의 길을 간다. 그리고 계속 누군가에게 공급을 받는 것처럼 힘이 있고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그들은 '다음엔 누굴 위로하고 도울까?' 라고 말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당신의 삶은 이 둘 중에 어느 쪽에 속했는가? '위로 해 주는 자를 계속 찾는가?' 아니면 '위로 해 줄 사람을 찾는가?'

기대치 않은 위로
바울 일행은 야손의 희생 덕분에 안전하게 형제들에 의해 베뢰아에 도착했다. 사도행전 17장 10절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리라' 야손과 그의 가족은 바울과 그 일행을 향한 하나님의 큰 위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소유까지 걸고 바울을 도왔다. 더 큰 위로는 이 짧은 시간에 데살로니가에 많은 영혼들이 예수를 만났고 그들의 삶과 믿음은 '아가야' 즉 마게도냐 남쪽 그리스 영토 전역에 본이 되고 향기가 된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계속 위로하고 돌보야 하는 상황에도 계속 기쁨으로 그 일들을 해 나갈 때 하나님은 전혀 기대치 않은 위로와 선물로 우리를 만나주심을 믿는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음
잠언서 29장 25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 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잠: 29:25) 'It is dangerous to be concerned with what others think of you, but of you trust the Lord, you are safe' (GNT)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각인 되고 싶다.
2) 사람의 도움과 사랑을 받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3) 그 관심과 도움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사람의 거절과 배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마음을 쏟을 때 일어나는 변화들은 무엇인가
1)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상황속에서 인도해 가신다.
2) 기도하게 된다.
3) 진정한 사랑으로 사람을 대한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유익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피곤해지고 유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유치하게 생각되면서 점점 사무적이고 이익중심적이고 실용적인 가치만을 추구하게 된다. 이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는 삶의 전형이다. 바울은 빌립보에 한 영혼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그는 루디아 한 사람, 귀신들린 한사람, 감옥의 한 간수, 데살로니가의 한 사람 야손을 세상의 가치기준과 직업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으로 진심으로 대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전혀 기대치 않은 위로를 주셨다. 그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을 일으키셨다. 그런 삶을 살수 있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주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많은 시간과 삶을 드리는 하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신뢰할 때 나의 내면과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확인하고 글로 적어 보자.

잃어버린 슬픔

사도행전 16:16-34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설교요약>
영혼에 대한 슬픔
바울과 그 일행들은 이방인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점치는 귀신이 들린 노예 소녀를 만나게 된다. 이 소녀는 귀신의 영에 사로잡힌 고통은 물론, 점을 쳐주고 번 돈 모두를 자신의 주인에게 바쳐야 하는 이중고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소녀 안에 귀신은 바울과 그 일행이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음을 알고도 소녀 안에서 머물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들이라” 라고 하며 계속해서 크게 외쳐댔다. 바울이 몹시 괴로워하며 귀신을 쫓아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괴로움이란 슬픔으로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번역된다. 따라서 바울이 이 귀신 들린 소녀를 보면서 가졌던 내면의 괴로움은 한 영혼이 받는 고통에 대한 큰 슬픔 또한 동반된 것임을 분명하다. 그래서 소녀를 통해 유익을 얻고 있는 주인으로 해를 입을 수 있음을 알았알 것임에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그 아이에게 떠나도록 명령했고, 아이는 결국 자유케 되었다. 결국 그의 슬픔이 한 영혼을 풀어주는 생명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실 때 그 분을 위해 우는 자들을 향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볼 때마다 자신이 지은 죄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 것을 슬퍼하며 울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즉 가족과 타인의 영혼 구원을 위해 울라고 하셨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애통함으로 울고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사람이다.

슬픔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근본적인 원인
귀신 들린 소녀의 주인들은 여종이 당하는 고통은 안중에 없이, 그로 인해 얻는 재물이 더 소중했다. 이렇듯 탐욕에 빠진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슬픔은 없고, 오직 악한 슬픔만이 가득하다. 이 귀신 들린 아이를 노예로 부려 수익을 얻은 여러 주인들 중 단 한 명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회개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애통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타인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약속 하셨다. 그렇기에 이 소녀를 악용한 주인들의 내면에는 진정한 '위로'가 없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칭찬과 위로가 필요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 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을 하셨다. 이것은 모든 창조물에 하나님의 칭찬을 갈망하는 본능을 심어 놓으셨음 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칭찬과 위로 탱크를 자신의 위로와 칭찬으로 채우신다. 특히 채우는 과정 중 중요한건 '보시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 분이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의 내면에 위로와 칭찬이 채워진다. 그 위로와 칭찬은 우리의 내면에 탐욕과 정욕이 근접하지 못하게 우리를 더욱 거룩한 열정들로 내면을 뜨겁게 한다. 그런데 내면에 하나님,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사람들을 보려 하지 않고, 사람들을 낮은 곳에서 자신을 하나님처럼 우러러 보라고 압박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을 대신해서 사람들을 봐 줄 사람들, 칭찬하고 격려할 사람들을 찾으신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위로를 부어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정반대의 상황으로 보내실 때 크게 세 종류의 반응을 보인다.
1)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한다.
2) 몸은 가까이 있지만, 마음이 멀어진다.
3) 그래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과 몸을 다하여 주를 계속 따라가는 사람이다.
바울과 실라는 세 번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한밤 중에 아프고 힘들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기도하고 찬송했다. 그 때 지진이 나고 손발로 묶인 쇠사슬이 모두 풀어졌다. 하지만 간수의 처지를 알고 옥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 받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를 위해 살다 당한 어려운 상황들로 모든 것을 쉽게 속단해선 안된다.  바울이 감옥에 갖힘으로 인해 하나님은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에는, 그냥 찬송하고 기도하라. 그럼 다음은 하나님이 길을 알려주신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그 어떤 짐보다 우리 존재 자체를 가장 무겁게 느낄 때가 많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자기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짐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짊어지신다고 하셨다. 그럼 그 분이 나를 짊어지시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첫째. 하루 종일 모든 일과 만남 속에서 그분이 나를 어떻게 짊어지시는지 기대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 그분이 나를 짊어지신 일들을 감사하며, 구체적으로 하루를 기록으로 마감한 다음, 종종 그것들을 다시 보는 것이다.

헛되지 않은 일

사도행전 16:1-15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설교요약>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헌신하면서 지칠 때가 있다. 주의 일을 평생 사는 동안 얼마 동안은 할 수 있지만 '항상'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바울은 항상 주의 일에 힘쓰라고 했다. 항상 주의 일에 힘써야 하는 이유는 '그 수고가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하나님이 심기 원하시는 일
바울은 예수를 믿으면,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나 새로운 삶을 살다가, 육체의 생명이 다하면 그 영혼이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혈과육이 아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고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날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님께서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죽어 흙으로 돌아간 육체도 다시 부활의 몸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주의 일' '헛되지 않는다'고 말한 그 일은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롭게 성령으로 거듭난 일을 말한다. 그들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이 땅에서 영적인 부활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 천국을 가져오는 통로가 된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여 제자가 되어, 예수님처럼 삶을 살면서 또 다른 영혼들을 거듭나게 한다. 그리고 그들로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살게 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헌신의 삶을 살도록 돕는다.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할지, 어떻게 입을지, 무엇을 마실지 준비하며 살까 걱정하고 혼동스러워한다. 당신은 어떤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슨 일을 해야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인도 받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으로 심고 있는 사람이다. 주의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헛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헛되지 않은 주의 일을 하며 성령으로 심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증거들
1) 갈 길과 해야할 일을 인도 받는다
우리가 헛되지 않은 주의 일에 우리의 삶을 고정하고 삶을 드릴 때, 하나님은 그 때 그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을 내리도록 쉽게 인도하고 계심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해야할 지 분별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가 주의 나라와 그분의 일을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셔서 그 분이 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신다.

2)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성령의 갈망을 감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1차 선교 여행처럼 아시아 즉, 그가 전에 활동했던 곳으로 떠나려 했는데, 그 길을 성령이 막으시는 걸 감지 했다. 바울 일행은 분명한 계획을 세웠었다. 그들은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성령이 막으셔서 다시 비두니아(터키 북부지역)로 가려고 무시아에 도착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 분을 전심으로 따르고 구하고 순종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갈망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타내신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세운 계획이 있다 할지라도 성령이 그 세운 계획들을 막으시는 것 같을 때 그 계획을 내려 놓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3)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임하는 축복은; 기도로 도울 자를 만난다
바울은 기도처를 찾다가 강가에서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곳에서 옷감 장사를 하던 루디아의 마음을 하나님이 여셔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여인은 강권하여 자신에 집에 바울 일행을 머물게 했다. 바울 일행이 처음에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도하는 곳을 찿으러 가다가 루디아를 만난 일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은 단 번에 루디아를 통해 그들의 의, 식, 주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주의 일에 힘쓰는 삶을 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환상을 보고 막상 순종하여 행동해도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하려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만남의 축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순종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쉽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바로 기도해야 할 때이다. 기도할 장소를 찾아야 할 때인 것이다.

당신은 주의 일에 힘쓰고 있는가? 성령으로 심고 있는가? 이것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에게 임하는 축복들이다. 헛되지 않은 일에 당신의 생애를 드리고 싶지 않은가?

다시 세우시는 성령님

사도행전 15:36-41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설교요약>
1차 선교 여행 이후 바울이 바나바와 마가와 헤어진 약 13년 경에, 마가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도 갔고 하나님 나라 일에 유용하며,  신실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또한 마가는 AD65-70년 경에 마가복음을 썼다. 마가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행동의 복음을 전하며 위로와 소망을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마가를 통해 주는 메세지는, 성령님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때에도 마가와 바나바의 삶과 사역에 동행하시며 마가를 변화시켜가고 계셨다는 것이다. 마가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인내력도 부족했고 힘든 일이 있으면 먼저 부딪쳐 이겨내려고 하기 보다는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고, 훗날 마가는 놀라운 종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원치 않는 실망스러운 결정과 행동을 하게될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소망이 없어'라며 크게 절망할 때가 있다.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나를 절망 시키는 요소 및 절망의 근본적 원인을 찾아내야만 한다.

현실 도피를 하게 만드는 힘든 어떤 일들은 세상 정욕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대다수의 경우 세상의 죄악된 행위를 하게 만드는 근본적 이유는 현실 도피 자체에 그 원인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이 죄인지 알면서도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현실의 괴로움을 잊기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주님과 함께 해결에 가면 되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문제를 피해 비현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마가도 비록 주님을 따랐지만 처음부터 두려움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현실적인 행동과 선택을 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이 무엇이고 후회할 일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라. 그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라는 뿌리가 있지 않는가? 그럼 우리를 두려움으로 부터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은 어떤 방법들을 사용하시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은 바나바를 통해 마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그를 다시 만드시고 훈련하시고 세우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두려움 때문에 죄 지음과 현실 도피를 계속 반복하는 사람들이 그 곳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열어 주시려는 새로운 길을 잘 보는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동행시키시려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훈련들도 잘 받아들여야 한다. 마가에게 다시 주어진 바나바와의 선교 여정에 힘든 일이 없었겠는가? 이전 선교 여행과 같이 똑같은 어려움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길을 따라갔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길을 따라가면 내면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점점 힘을 잃게 된다. 그 때 새로운 천국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좌절하고 절망할 때 하나님이 새롭게 열어 주시고, 만나게 하시고, 기회를 주시는, 그 길을 잘 따라갈 때 거기서 하나님이 주신 담대함을 얻게 된다.

바울은 바나바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바울은 정확하게 마가의 잘못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가는 바울의 말을 통해 마음이 찔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밤빌리아에서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들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처음 가졌던 각오와 달리 힘이 들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마가는 지금 다시 바나바와 함께 다시 선교 여행을 떠나려 하는 것을 볼 때 새로운 결심하고 도전을 감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2차 선교 여행에서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만 의지했을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을 세우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그의 또 다른 겸손의 모습, 종의 복음인 마가복음을 기록한 동기일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꺾는다.
그러나 그 실패의 두려움은 오직 그가 주만 의지하며 담대하게 나가게 하는 최고의 스승이 되었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꺾고 폭풍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줄 아는 사람으로 세우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마가를 통해 마가복음을 남기셨다. 마가와 바나바는 어떻게 보면 그 당시 행적을 기록했던 누가에 의해 선택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마가는 주목 받지 못했다고해서 주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을 가졌고 베드로로부터 그 모든 일들을 자세하게 전해 들었고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글로 남겨 로마와 열방에 증거가 되게 했다.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은 모두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성경을 썼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저자는 성령이시다. 따라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한 때 사도들을 실망시키고 힘들다고 떠나 버린 마가를 통해 그 놀라운 일을 이루셨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한 시기는AD65-70년 사이다. 그가 처음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고 하나님의 일에 실패한 시기로부터 약 15-20년 이상이 흐른 때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언제 어떻게 어떤 일을 이루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고 쉽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때에 생각치 못한 방법으로 그 분은 그 분의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들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에 드린 도끼

사도행전 15:1-35 (성경봉독 15:1-5)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하니라

<설교요약>
'한 남자가 하루 온종일 열리는 나무 자르는 대회에  도전했다. 그 도전자는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 하고는 열심히 나무를 잘랐다. 그러나 상대방 선수는 하루 동안 여러번 휴식을 취했고 여유있게 점심 식사를 했다.  저물어가는 마지막 시간에 도전자는 상대방 선수가 자신이 자른 나무보다 더 많은 나무를 자른 것을 보고 놀라고 화가났다. 그는 상대방 선수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내가 당신을 볼 때마다 당신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나보다 더 많은 나무를 잘랐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다. 승리한 그 상대 선수는 '당신은 한 가지 나에 대해 주목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휴식을 취할 때마다 나의 도끼날을 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바울의 손수건만 병들고 악귀 들린 사람에게 가져다 얹어도 병이 떠나고 악귀도 떠나는 일들도 일어났다.(행 19장) 그런데 이렇게 더 강력한 성령에 능력에 붙들리기 전에 15장에 마치 도끼날을 갈 수 있도록 해 준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예수님을 믿어도 모세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다가 점점 식어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도끼날을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아이 같은 신뢰다
성경은 예수님을 잘 믿다가 다시 율법적인 삶으로 돌아갈수 있는  증거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처음에 은혜로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서로 경쟁하다가 예수님께 꾸중을 들었다. 그 꾸중을 들은 시점은 제자들이 그 동안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습을 지켜 보다가 서서히 그들 스스로 예수님처럼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복음도 전하는 시기였다. (눅9장/막9장) 따라서 제자들이 사역을 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외적인 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때에 그들은 내가 했다라고 하는 자신들의 율법적인 의가 다시 살아났음이 분명하다. 이 때 예수님이 그들의 율법적인 자기 의를 다시 깨뜨리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시게 하기 위해 사용하신 것은 어린아이였다.(마:18:3) 어린 아이가 한 것이 무엇이라고 그가 천국에 들어갈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마:18:4)  이 아이가 자기를 낮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키를 낮추었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비하의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시키는 데로 했을 뿐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믿음에 뿌리를 두고있다. 부모를 신뢰하는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인정한 아이다. 그래서 겸손하다.

그리스도인의 나눔이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통로 중에 하나가 나눔이다. 그 나눔은 단순히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행하신 일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순수하게 나누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은 자신이  그분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자신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일을 하기 원하시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을 나누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하신 일을 나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이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그 분께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눌 때 '큰 기쁨'을 주신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만나고 나면 적지 않은 시간과 말들을 주고 받았는데 그다지 기쁨을 느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에는 만날 때마다 큰 기쁨이 있다. 나눔이 있는 곳에는 치유가 있고 영혼이 맑아지고 또 만남이 기대가 되고 기쁨이 배가 된다. 이런 나눔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 전에 기도로 그 만남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그 만남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날카롭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해주시며 다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열정으로 전환된다.

지혜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무뎌지게 하고 절망스럽게 하는 요소 중 하나는 '분노' 다. 분노할수록 마음은 슬픔에 사로잡히고, 기쁨은 상실되고, 평안은 깨지며, 두려움은 엄습한다. 분노의 반대말은 온유일 것이다. 그러나 온유하고 싶어도 누군가 마음을 뒤집어 놓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쉽게 무너지곤 할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노를 잡는 무기를 주셨는데 바로 '지혜' 다. 베드로는 성령의 음성과 환상을 직접 듣고 고넬료에게 가고, 죽은 제자 다비다도 살렸던 사람이다. 감옥에서 천사의 음성을 듣고 초대 교회로 갔던 사람이다. 바울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선교지로 주저하지 않고 떠난 사람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런 음성은 없다. 대신 신실한 사람들과 지혜를 모았고 야고보의 구약 성경 인용 말씀을 종합해 최종 결정을 내렸다. 여기에는 신중한 생각, 결정, 대화, 성경 의 적용 모두가 들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적용된 그들의 지혜가 담긴 결정을 권위 있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때로 성령의 내적인 음성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을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말씀하시고 결단하게 하신다. 그러나 어떤 때는 우리가 마음의 생각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비추어 어떤 일을 생각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지혜다. 따라서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은 명료하다. 지식은 공부를 통해 어떤 것에 대한 정보를 알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생각을 통한 깨달음으로 바른 선택을 하고 적들의 악한 계획을 파하는 영감과 통찰력을 준다.

당신은 분노를 지혜로 파하는 사람인가? 그럼 도끼날을 가는 사람이다.  성령이 주신 경험과 말씀의 올바른 적용을 위해 생각을 사용하라. 그 때 당신의 영혼은 날카롭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고,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안에 갖힌 영혼을 구해내는 그 분에 손에 들린 도기까 될 것이다. 그 분의 뜻을 정확하게 찍어내는 삶을 살 것이다. 

당신은 지혜를 사용하고 있는가? 당신은 모임을 하고 있는가? 나눔을 하고 있는가? 나눔에는 영적 기쁨이 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같은 신뢰를 위해 영혼을 집중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도끼를 찿고 계신다. 하나님이 찍고 싶은 나무를 정확하게 찍을수 있는 도끼가 되기 위해 자신을 갈고 있는 도끼를 찿고 계신다.

하늘의 장자

창세기 25:27-34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설교요약>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에서는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집에서 거하길 좋아했다. 그 런데 주목할 것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판 것이다. 에서는 망설임 없이 죽 한 그릇으로 자신의 장자권을 동생에게  팔아 넘겼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고 성경은 말씀한다. 당시 고대 근동의 문화는 장자권은 부모로부터 받는 물질적인 유산과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인 접근 이외에도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을 멸시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고 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를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야곱은 어머님인 리브가의 도움으로 에서로 분장해서 눈이 잘 안 보이는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숭수 있게 된다. 아마도 리브가는 에서가 헷족속의 딸들인 유딧과 바스맛으로 인해 에서가 하나님을 버리고 문란하게 우상을 숭배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였다. 결국 에서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길을 선택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장자의 축복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에서의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은혜들을 멸시함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가 그렇게 멸시하던 장자의 명분을 사모했다.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이 유치하고 야비하기까지 했지만 그가 장자의 직분을 사모한 것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축복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멸시하는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외적으로 볼 때 혐오스럽고 초라해 보이는 한 사람까지 존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의 대속은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이루실 대속의 그림자, 즉 예고편이었다. 특별히 처음 것을 드리라고 할 때  둘째, 셋째는 그럼 대속이 필요 없는 것일가? 또한 선택 받지 못하거나 열등한 존재인 것일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대속은 누군가 자신의 죄를 위해 댓가를 지불하고 대신 죽은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다. 첫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난다. 그렇기에 더 이상 첫째가 아니다. 대속 받은 자들은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되 었고 하늘의 장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 계보를 계속 이으려면 동생들은 다시 첫째가 되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입어야만 한다.

리스트로 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 감람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학적으로 물었다.
A.D 3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그 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인용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태형에 의해 극도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빠진다고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평 들보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 비틀거리며 올라가셨다. 그 때 예수님은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있었기에 결국 넘어지셨고, 로마 군인들은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서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이 박히기 전에 이미 위독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져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외치신 것이다. 그리고 심장이 정지 되면 서 운명하셨다고 했다. 요한의 설명은 현대의 의사들이 예상하는 바와 일치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요한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있다고 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적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자신은 죄인이고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이 끔찍한 고통을 짊어지신 것을 믿는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하늘의 장자 명분을 준 것이 믿어 지는가? 그것은 오직 은혜였음이 믿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하늘의 그 이름이 기록된 장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많이 들어 자신이 그 분에 대해서 그냥 알고 있는 것인지, 믿고 있는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따라오는 삶의 증거는 '생존을 위한 권리를 주께 드리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같이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떠나고 그분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눈에 띌만한 죄악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존을 위한 일 때문일 경우가 많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 하늘의 장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생존권까지 하나님께 드리며 산다.  그리고 그 때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당신은 생존권까지도 주님께 맡기고 사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는 사람이다.

성령에 붙들린 사람

사도행전 14:19-28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설교요약>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룬 주제는 성령님의 성품과 특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내 안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지 궁금해 한다. 금주 말씀에는 내면에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 내면이 요동치지 않는다
한 영혼의 내면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함께 하시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 때 두드러지는 성품의 변화는 어떤 상황 속에도 쉽게 요동치 않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잠 4:23) 울었다가 바로 웃고, 화냈다가 바로 온화해지고, 사랑했다가 바로 미워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다 바로 세상 정욕에 사로잡히고, 칭찬했다가 바로 비난하고, 자신을 너무 좋아했다가 바로 자신을 혐오하며, 기뻐했다가 바로 슬퍼하는 삶이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삶인 것이다. 이런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삶의 결과는 '생명의 근원'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기쁨과 평안이 없으니 슬픔과 허무와 공허가 그 내면을 채운다. 그러나 마음을 지켜주는, 진리이신 예수와 성령, 그리고 말씀이 내면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요동치는 삶에서 흔들림 없는 삶으로 변화하므로 스스로에 대한 후회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증가한다. 이러한 삶의 근원적 문제는 그 내면의 마음을 지켜줄 진리가 있는가 없는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사람도, 결코 우리 삶의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가치들은 우리의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 바위처럼 내면이 견고해지고 있다면 진리되신 성령이 당신의 내면에 살아 계시다는 증거다.

2) 하나님이 주신 양을 삶의 우선 순위에 둔다
무조건 어려운 사역을 하려는 것이 영적이고 성스러운 일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 속에 자신의 야망과 탐욕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음도 깨달아야 한다. 반면 영혼을 향한 사랑 때문에 어려운 일과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우선 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이 선택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았을까? 바울이 자신을 죽인다 한 의미는 세상의 정욕과 죄와 쾌락을 마음 속에 품게 될 때마다 그 마음들을 죽였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을 죽인다고 한 고백 속에는 자신도 그런 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우리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하고,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희생할 때에도 죽어지지 않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자아가 있을 수 있다. 그 때마다 그런 자아와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죽여야 한다. 그럼 어떻게 죽여야 할까?

3) 죄성의 태도와 행동들을 죽이기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구한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이 가장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고 또한 가장 영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곤 한다. 하나님은 이런 자아를 못박으라 하신다. 성령에 의해 인도되지 못한 자아는 혼자라는 외로움과 무거운 짐으로 인해 그 영혼이 상한다.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 너무 커져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을 때 우리의 근심은 찬송으로, 걱정은 기도로 바뀐다. 바울은 자신을 정욕과 교만과 차별과 무시로 이끄는 몸의 근성이 있었다. 반면 성스러운 삶을 추구하고, 겸손하며, 희생하는 모습을 추구하려는 은혜도 그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정적인 것이 마음에서 제어되지 않아 밖으로 표출되려 할 때, 그런 흉한 죄성의 태도와 행동들을 노예 다루듯 다루었다. 그 때 그가 노예처럼 다룬 몸의 태도와 행동이 다시 마음에 영향을 주어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태도와 행동이 그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는 경험을 하였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의 도움을 구할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우리의 몸이 우리 자신에게 복종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몸의 행동을 노예 삼고 있는가? 그럴 때마다 뜻하지 않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삶의 우선 순위가 무조건 어려운 일, 어려운 곳으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 안에 있는 양들을 사랑함인가? 당신의 내면에 요동치는 파도가 점점 바위처럼 견고해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께 붙들린 삶을 살고 있다.

거룩은 사역이다

사도행전 14:11-18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설교요약>
사단이 다양한 공격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첫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 분을 예배하는 것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오늘날의 교회가 복음을 전해 그들로 채워지길 원하신다.
또한 그들에게 성경을 처음부터 잘 가르쳐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길 원하신다. 이런 일을 할 때 사단은 우리를 영적으로 공격한다. 이런 위협에도 담대하고 평안하게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마귀가 싫어하는 일인지를 인지하는데서부터 나온다. 

사단이 다양한 공격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두번째 이유는 관계는 끊지 못해도 교제라도 끊어 놓길 원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그 분과의 교제는 점점 시들해지고 세상의 영광과 쾌락에 취하다 보면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이 어려워 진다. 그렇게 되면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고, 영혼 구원에 무관심해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안에서 분별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분별의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유지할 때 그 분과 계속 교제하고 그 분의 거룩한 성품과 은혜들을 제대로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의 유혹들을 무기력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 위해서 추구해야 할것은 무엇일까?
1) 거룩은 사역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할 분은 오직 유일신이신 하나님이다라고 성경은 적고 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거룩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하는 것에서 거룩은 시작된다. 하나님은 나도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어떤 일을 대단하게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이 사역의 첫 번째 목표가 되야 한다. 거룩한 삶은 마음으로 죄를 짖지 않는 것이다. 우린 마음으로 사람을 미워할 때가 있다. 보이지 않기에 쉽게 범하는 죄다. 미움은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음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해서 그 사람에게 솔직하고 진실하게 대화하는 것이 좋다.

거룩한 삶은 외모에도 세상 사람과 구별됨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마저 세상 사람들의 흉내를 내며 그들의 죄악된 문화를 추앙하며 따라간다. 거룩은 신발을 벗는 것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스스로를 주인이 아닌 종으로 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거룩에서 나온다. 그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주어진다. 거룩한 삶을 살면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나와 이땅에서의 일과의 관계도 나와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관계도 거룩과 연결되어 있다. 마음과 행동으로 죄를 지었을 때는 빠르게 회게해야 한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의 죄들을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며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단발적 죄의 용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 때문이셨다. 우리 스스로가 거룩한 느낌이 들지 않을 때 더럽고 수치스럽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통로인 예수님으로 다시 하나님의 평안과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 그럼 다시 거룩하게 되고 영혼과 뼈 속까지 깨끗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된다. 거룩하면 열정이 불 같이 일어나게 된다. 거룩하면 담대해진다. 거룩하면 기뻐진다. 거룩하면 단순해진다. 거룩하면 어느새 막힌 문이 열린다. 우리 힘만으로는 안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다. 그래서 거룩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 거룩은 관념적 언어가 아니라 사역이 되어야 한다.

2) 옷을 찢고 창조주 하나님을 전하는 열정을 회복하라 .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을 전했다. 구약의 기록된 창조 이야기를 읽어보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며 하나님의 기쁨을 기록했다. 그 세상을 누리고, 즐기고, 성취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그가 창조한 사람들로 그가 만든 세상 속에서 마음껏 표현하고, 세상을 가꾸며 관리하도록 하셨다.

그 분이 자신의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들은 그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신뢰했었는지를 복음서를 통해 보여주셨다. 그 아들의 성품은 거룩하고 온유하고 순결하였으며 사랑 그 자체였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 세상의 온갖 난잡하고 더럽고 추하고 잔인한 자신들을 닮은 신들을 만들어낸 인간들을 용서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까지 하셨다. 그리고 다시 부활시켜 이 세상의 어떤 우상의 신들도 흉내낼 수 없는 증거를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거룩이시다. 하나님은 순결이시다. 하나님은 진실이시다.
그래서 그분께 나가는 자는 다 그 분처럼 변화된다. 그래서 그 분을 만나면 그 분의 성품에 감격해서 이렇게 찬양한다. '당신이 옷을 찢 듯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영혼들은 누구인가? 당신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거룩의 성품은 무엇인가!'

의미 있는 고통

사도행전 14:1-10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본 적이없는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설교요약>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의미가 있는 고통과 의미가 없는 고통이다. 의미 있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미리 예비하신 고통이며 그 안에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 크게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그 일을 회피하거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따르길 주저하곤 한다. 그 때 우리가 겪는 고통이 과연 의미 있는 고통인지 아닌지는 다음 네가지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길로 인도를 받는다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로 옮겨 온 바울에 의해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가 받은 축복처럼, 하나님이 주신 고통은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금 받는 고통이 하나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의미 있는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이 주실 축복의 열매에 집중하게 된다
고통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과 축복의 열매에 집중한다. 고통과 가시는 반복된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처럼 고통의 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들과 일들에 더욱 자신의 시간과 삶을 드릴 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열매 맺음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가시로 열매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열매 속에 가시를 박아두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열매의 즙들이 가시를 녹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서 고통 받음을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와 선물들에 집중해야 한다. 

3) 자신의 일을 스스로 컨펌하지 않고 하나님께 컨펌 받으려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을 따르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그 일을 해결해주셔서 우리가 다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 그러므로 어떤 불가능한 상황 앞에 있을 때가 우리가 주님께 컨펌 받을 때임을 기억하고 간절하게 그 분을 향해 구해야 한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셔서 하는 일인데 하나님이 기적과 표적으로 컨펌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4) 누군가 나를 통해 치유되고 은혜를 받는다
바울이 전한 말씀으로 믿음이 생긴 평생 앉은뱅이였던 루스드라는, 바울이 그를 향해 소리친 후 즉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성경에서 보듯 하나님은 병자를 치유하시는데 바울을 사용하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고, 그 말씀은 루스드라에게 자신이 낳을 수 있다라고 하는 소망을 주었다. 

이 증거들을 통하여 우리는 과연 의미 있는 고난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고통이기에 그 고통을 통한 축복의 인도도 하나님이 해주실 것을 믿으며 고통 그 자체보다는 우리에게 주실 열매를 기대하여야 한다. 또한 고통 안에서 나아갈 때 스스로가 아닌 하나님께 컨펌을 받아야 하며 다른 누군가가 내 고통을 통해 은혜를 받는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고통임을 알기에 우리는 더 깊숙히 고통 속으로 들어가 견딜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길 것이다. 

인정과 믿음의 차이 2

사도행전 13:13-52 (13:42-52) 
42 저희가 나갈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설교요약>
애굽왕 바로는 10대 재앙을 당하고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자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렇게 고백했다.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출 12:31) 또한 애굽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 12:36) 결국 이런 보석들은 훗날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짖는데 헌신하는 재료로 드려진다. 결국 애굽 왕은 다시 마음이 변해 이스라엘 백성을 추적하다 갈라진 홍해에 모두 수장되었다. 요점은 바로와 애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고 그들에게 보석까지 주었으나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이다. 인정하지만 믿지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을 42-52절에 바울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믿게된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알 수 있다.

인정이 아닌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
1) 예배와 말씀을 사모한다. 거듭난 사람들은 정규적인 교회 모임에 사회 활동을 위해 나오지 않고 예배의 말씀을 기대하며 나온다. 당신은 예배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사모하는가? 그렇다면 거듭나 믿는 사람이다.

2)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한다. 전에는 세상의 쾌락과 정욕을 쫓는데 관심을 갖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가지려 애쓴다.

3)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것은 그 전주에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나가서 사람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당신 삶 속에 은혜가 있으면 그것은 누군가에게 당신이 받고 있는 것에 대해 흘러 보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믿음이다.

4) 시기와 방해를 받는다. 유대인들이 시기한 내용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외모나 가진 소유나 자녀나 풍부한 누림들이 아니었다. 세상의 시기와 질투는 외적인 것들이지만 영적인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혼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곳에 갖힌 영혼들을 구해 내는데 있다. 이것이 사단의 시기이고 방해이다. 그 모든 영적 열매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죽어 있고 고통받는 한 생명을 사망에서 끌어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천국을 살게되는 통로로 드려지면서 받는 시기다.  이것은 당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누군가를 구해내고 있는 데서 오는 사단의 시기고 질투인 것이다.

5)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시기를 받아도 담대하다. 우리는 담대히 살고 싶어한다. 두려움이 없는 마음이 담대한 마음이다. 담대하면 평안하다. 마음이 평안하면 더욱 사랑하게 되고 더욱 진실한 사람이 된다. 이런 담대함은 사람의 비위를 맞춘다고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할 때 하늘로부터 주어진다. 당신은 담대한가? 믿음으로 사는 삶의 증거다.

6)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어려움이 오면 무조건 더 낳은 길을 찿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 낳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사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7) 믿어지는 은혜를 받은 것을 안다. 믿음의 사람,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고 믿어지는 은혜를 받았음을 찬양하고 기뻐한다. 이 말씀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소망을 준다. 믿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줄 때 항상 경험하는 것은 전혀 기대치 않은 사람들이 간절하게 신중한 태도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때마다 전하는 사람의 자아가 더 많이 깨지고 성령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믿을 때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된다. 한 사람의 변화는 내 감정이나 생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8) 기쁨과 성령이 하나님의 의해 주어지는 것을 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쁨과 성령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선물임을 안다.

인정과 믿음의 차이 1

사도행전 13:13-52 (13:13-41)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 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 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포기하지 않으면

사도행전 13:1-12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설교요약>
사도행전은 바울이 처음 전도 여행을 떠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전교 여행을 가게 된 동기는 바나바를 통해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하면서였다. 안디옥 교회에는 바나바와 요한을 비롯하여 니게르라하는 시므온인 아프리카 사람, 루기오라는 구브로 사람, 세례 요한을 참수시킨 헤롯왕의 동생이자 귀족 출신인 마나엔 등이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민족과 인종, 다른 언어 및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하나가 되고, 어떻게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이상적인 교회로 부흥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이 2절에 나와 있다. 안디옥 교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듣고, 주님의 음성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결정하고, 성령으로 함께 움직이는 생명력이 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핵심 리더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성령의 음성만으로, 흔들림 없이 담대하게 구브로와 살라미 지역으로 파송을 결정했던, 건강한 교회였다. 이 모습은 10년 전 MMC가 하나님의 음성에 의지하여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사우스 다코다 땅으로 선교를 떠났던 모습과 닮아 있다. 그 당시 하나님은 선교팀이 30~40명의 온순하고 착한 아이들을 만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맛보게 하셨다. 

다시 본문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의 구브로 사역은 평화롭고 순탄했었지만, 6절을 보면 그들은 수도 바보에서 바예수라는 주술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총독의 자문 역할을 담당했던 로마에서 온 사람이었다. 총독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길 원했으나, 바예수는 총독이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두 번째 선교지에서 대적하는 자가 생기게 된 것이다. MMC가 10년 동안 사우스 다코타로 단기 선교팀을 보내고 있는데, 첫해의 순탄했던 사역과 달리 이후 매선교마다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아이들이 나타나 선교팀의 사역들을 방해했다. 그런 상황들은 선교팀 마음 속에 이 땅에 소망이 있는지, 이 아이들은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낳게 했다. 게다가 선생님께 반항하며 폭력적 성향을 보인 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팀들의 사역은 더욱 힘든 상황으로 내몰려졌다. 이런 과정들로 10년이 채워졌다. 선교팀에게 보인 그 아이들의 폭력성과 협박은 사우스 다코타 선교를 방해하는 바예수와 같았다.

그러나 10년을 포기하지 않고 갔던 이번 사우스 다코타 선교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순해진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10~11절에 보면 바울은 바예수를 시각 장애인으로 만들고 총독은 마침내 복음을 믿게 된다. 이번 선교에서 믿음이 크게 성장한 한 아이는 “ I am a lost sheep” 라는 고백을 했다. 그 아이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폭력성을 보였던 고등학교 졸업반의 한 아이는 선교팀의 어린 멤버와 친구가 되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인디언 전통 파티에 선교팀을 초대하는 일도 일어났다. 사단은 우리를 무섭고 두렵게 만들어 주님의 사역을 멈추게 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멈추지 않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풀어지고 그가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우스다코다가 우리 인생의 축소판 같지 않은가? 하나님의 인도로 일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순탄하다가 바예수와 같은 난관에 부딪히기 시작하는 그 때에 두 마음이 싸운다. 이걸 계속 해야하나? 말아야 되나? 그 때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풀어지며 일하시기 시작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때 사단의 힘이 사라지는 것이다. 총독이 회심할 때가 사우스 다코다 아이들이 회심한 때인 것이다. MMC와 우리들의 삶을 붙들고 있는 것은 사단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선교팀을 두렵게 했던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MMC선교팀과 하나님의 제자들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단을 끝까지 벌하는 분이시다. Don’t give up!!!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역사하시기에 우리는 포기하지 않으며 늘 하나님을 기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더 깊이 알아야 할 하나님의 속성

사도행전 12:11-24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줄 알겠노라 하여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8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설교요약>
1)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하여’(행12:1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예측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는 주변의 부정적 시각과 예측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분임을 신뢰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유익성과 쓸모로만 평가하는 ‘물리적 가치’의 묶인 시각에서, 존재 그 자체로 사랑 받는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풀어주셨음을 인지해야
한다. 하나님에 의해 풀어진 삶은 '내가 나 된 삶' 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2) 확신이 없어도 사랑으로 기도하라
확신은 없지만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그 때에,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보시고 우리의 약한 믿음과 확신 없는 기도에도 역사하신다.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던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성도들은 하나님이 베드로를 풀어주시리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베드로를 사랑했기에 그를 위해 기도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고 믿음이 생기지 않아도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 때에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사랑을 보시고 역사하신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 장 6 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3) 막을 수 없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는 위험을 감수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자신의 아들을 죽게 하심으로 우리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 그 사랑을 선택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왕의 성품, 하나님의 성품의 다가 아니다. 무력이나 강제적인 두려움으로 대하지 않고 선택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계속해서 악을 선택하며 행할 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그리스도인들을 계속해서 핍박해도 헤롯를 쉽게 심판하지 않으셨다. 계속해서 그에게 기회를 주셨다. 그럼에도 헤롯은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세하며 사람들로부터 신처럼 추앙받는 것을 기뻐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실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분을 대적하는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의 성품을 더 알아가라. 그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변화

사도행전 11:28-12:10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설교요약>
분노의 사람 야고보의 순교
야고보는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기는 했어도 혈기와 야망이 많고 자존심이 강해 자기 희생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초대교회 사도들 중 첫 순교자가 되었다. 그가 헤롯의 표적이 된 것은 베드로와 함께 그의 초대 교회에 대한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증명한다. 야고보는 순한 양처럼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을 위해 드렸다. 그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유일하게 예수님의 두려움과 슬픔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강하시고 담대하시던 예수님이 연약한 모습으로 당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 부탁할만큼 예수님께 신뢰 받고 예수님 가까이에서 따랐던 제자였다. 예수님은 야망과 분노의 사람 야고보를 꾸중은 하셨지만 포기하진 않으셨다. 그를 이렇게 순한 양처럼 바꾸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그의 야망과 분노와 경쟁심을 내려놓게 하신 분도 예수님이셨다. 넓은 가슴으로 초대 교회 사도들과 제자들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던 분도 예수님이셨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야고보는 예수님께 꾸중 받았을 때에도 그 분을 떠나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들이 구하던 보좌를 줄 수 없다고 할 때도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도 예수님을 떠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따랐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 할 때에도 그 야망이 변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스러운 순교를 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 지고 돌아가실 수 있게 해 준 능력의 원천은 성령의 세례였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나쁜 습관들을 버리고자 하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 모습에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울 때가 있곤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야고보처럼 주님을 계속해서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야고보를 바꾸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성령의 세례'를 부어주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잔'을 주실 때 반드시 그 잔에 채우시는 '물', '성령의 세례'도 함께 주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야고보에게 잔만 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도 주셨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변화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고 하셨을 때 사단에게 속아 그 앞을 가로막았다가 예수님께 크게 책망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어떻게 해야 사단이 아닌 성령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지를 듣게 되었다.
하나는 자기 부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기 부인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적극적인 삶의 실천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내면의 치욕을 본 베드로는 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만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를 팔아 하나님께 드렸고, 그 일로 자신들의 이름이 드러나길 원했다. 이 때 베드로는 그들의 탐욕과 사단의 역사를 지적하며 꾸짖었다. 베드로도 전에 탐욕에 넘어가 사단에게 속고 치욕을 당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성령과 사단의 역사를 분별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헤롯은 야고보를 죽이고 초대교회 가장 핵심 지도자인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다. 이 투옥은 벌써 세번째였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겼지만 그 중 가장 어려운 것 중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동일한 어려움일 것이다. 어떤 고난이든 해결되면 기쁨이 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이 때 우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섭섭해지고, 심하면 그분과 거리를 두며, 더욱 심해지면 깊은 영적 침체에 빠져 기도와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관계가 깨지며 내면의 기쁨도 사라지게 된다. 동일하게 반복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충성하는 베드로의 삶은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고 변함이 없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보인 특징적 모습
헤롯은 야고보를 죽였다. 베드로도 다음 날 헤롯에게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상황 속에서도 깊은 잠에 들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삶임을 보여준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허리띠, 신, 겉옷을 모두 벗은 채 감옥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베드로는 최대한 자신에게 주신 것을 누리고 즐길 줄 알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전에 예수님이 그에 대해 앞으로 많이 사람들이 그를 띠 띄우고 데리고 다니게 될 것임을 말씀했을 때 평소에 예수님이 사랑하던 제자 요한을 보고 그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며 예민하게 굴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지금 당장 코 앞에 어려움이 있어도, 열등감이나 경쟁심 없이 내게 주신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에 감사하며 현재를 누릴 줄 알게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 천사를 보내시어 감옥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과 아슬아슬하게 파수꾼들을 뚫고 나가가는 걸 보여 주셨다. 불가능하게 보여 도저히 주님을 따를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는 담대하고 묵묵하게 천사를 따라갔다. 베드로는 전에 예수님을 따르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 도망가고 부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불가능한 상황이라도 주님께 맡기고 가면 열릴 수 없는 길도 저절로 열리는 것을 신뢰하며 따라갔다. 당신의 삶에 똑같이 반복되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런 문제가 있을 때 닫힘이 있으면 열림도 같이 있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