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가 두려워하는 것

누가복음 4:1-4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75인 중에 빛나는 보석처럼

누가복음 3:23-38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24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25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26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27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28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29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30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31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32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33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34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35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36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37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설교요약>
누가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를 추적해서 그 근원까지 적고 있다. 아담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탄생하고 번성했지만 하나님이 한 족속을 선택했고, 그 족속 중 한 사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셨다. 여기에 기록된 75인 중,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며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사람들의 특징을 추적해 보자.

하나님의 씨를 일으키는 것에 마음을 쏟았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보다는 나의 유익을 우선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어 갔다. 분명 아담과 하와와 그의 후손들은 가인의 후손과 멀지 않은 곳에 살았고, 가인 후손의 악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따르는 새로운 씨가 일어나길 갈망했을 것이다. 창세기 4장 2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벨을 대신할 셋이라는 다른 씨를 주셨다. 하나님은 셋을 통해서 혼돈과 타락 속에 있는 가인의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 놓길 원했다. 하지만 창세기 4장 26절에 보면 셋의 아들인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셋이 105년 동안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삶을 드린 결과였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회의적일 때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바라보시고 그 분의 불을 보내주시기 때문이다.

셈과 아르박삭의 후손이라도 하나님께 믿음의 반응해야 한다
노아의 아들인 셈은 1년 10일 동안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체험했고, 아버지인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실수했을 때, 동생 야벳과 함께 부친의 나신을 옷으로 덮어드렸다. 그 후로 셈은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복을 받았다. 셈과 그의 아들인 아르박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생존해 있었다. 서로 교류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의 직계 조상인 노아와 셈이 경험했던 방주와 하나님에 대해 분명히 전해들었을 것이다. 그 때까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직접 만나주시고, 그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번성케 할 것이라 약속해 주셨다. 아직 상속자가 없던 85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도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을 믿는 고백을 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셨으며,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은 어린 다윗이 하나님을 비웃는 골리앗에 대항해 믿음으로 싸우게 하셨고,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에게 천사를 보내 잉태될 아들이 예수님임을 계시하여 그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삶 속에서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려다 되지 않아 모든 걸 내려놓고 성령을 의지하여 신실함으로 기도하는 영적 방법을 통해  때 닫혔던 문이 쉽게 열린 경험은 없는가? 누가의 족보에 있는 75인 중에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주실 때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점이다.

잠언서 11장 30절에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신약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 지혜로운 자는 영혼을 얻는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의인을 축복하면 의인의 마음은 항상 따르는 사람에게 자신을 우상 삼게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섬기게 한다. 그 생명나무는 생명 되신 예수님이시다. 요한 계시록 2장 7절에 보면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가지려면 댓가 지불이 필요할 수도 있음을 전제한다. 사랑은 희생이다. 처음 사랑은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처음 행위도 이렇게 순수하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하려면 마음을 다칠 수 있고 아픔을 경험할 수 있고 상처가 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하신다. 또한 치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평안과 기쁨과 보화들을 안겨준다.

흥정과 믿음

누가복음 3:18-23
18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설교요약>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자기 앞으로 나서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때 그 군중 사이에 섞여 있던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러 세례 요한 앞으로 나오셨다. 줄 서 있던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식하거나, 알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물에서 올라오실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째, 비둘기 같은 형체의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했다.  둘째,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 답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어느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수의 무리 속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질 때 
예수님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줄을 서 세례 요한에게로 나아가고 계셨다. 아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사랑 받는 분임을 알지 못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미미함을 느낄 때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자체의 가치를 상실하면 슬퍼지고, 우울해지고, 심하면 여러 유혹들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잘 나고 경쟁적인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나의 말을 들어 줄 누군가가 그리워 질 때가 있다. 하나님은 이 때, 우리에게 주목하시며 하늘을 여시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시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대단한 일을 이루지 못했어도, 우리가 어떤 것으로 인해 기뻐할 때, 우리의 기쁨을 더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당신은 오늘도 당신을 향해 이유 없이, 조건 없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다, 너는 내 기쁨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있는가?

공적 사역으로 여러가지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 
예수님은 30년 동안 목수의 아들로 이름 없이 살았다.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신 후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일을 그르치지 말아라, 멋지게 일을 해야 한다, 일주일에 금식은 몇 번 해야 한다'류의 음성이 아니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자다' 라는 음성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이러한 음성과 마음이 항상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옆에 있는 사람의 사역을 보니 그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아.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지? 나는 왜 이렇게 능력이 없지?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해' 라는 음성도 들릴 때가 있다. 식물의 생명이 뿌리에 있음 같이, 사역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뿌리가 뽑히거나 상하면 줄기나 가지나 열매나 모두 금방 시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열매가 더디 맺혀도, 외적인 식물의 형태가 초라해 보여도, 뿌리만 튼튼하면, 언젠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일을 했을때, 그것에 대해 인정 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넣어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 이유는 우리를 보고 있고, 인정해 주는 어떤 존재가 반드시 있음을 의식하며 우리가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때로 희생을 해야 하고, 헌신을 하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기쁨으로 그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건강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어려운 상황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날 때 
헤롯 안디바는 선을 알면서도 악을 선택한다(19-20절). 이런 인격을 형성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 헤롯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헤롯은 자기 두 딸과 아내를 죽이고, 충직한 신하들을 감옥에 보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 지역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모두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성장한 자녀들은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부모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내면은 사랑이 아닌 공포와 불안으로, 그리고 곧 헤로디아가 아버지 헤롯의 사랑으로 채워졌어야 할 안디바의 내면을 대체 하였다. 헤로디아는 그를 악하게 조종하였다. 하나님은 안디바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세례 요한을 통해 다시 주셨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을 죽였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죽인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헤롯 안디바 혹은 헤로디아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성장 과정부터 꼬이고 묶인 사람들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자라나며 잘못 형성된 인격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때로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 넣는다. 심하면 판단력도 흐려진다. 더 심하면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의해 깊은 우울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비둘기 같은 형상의 성령으로 오실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채워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고전 2:11-12) 분별력과 은혜로 우리는 이미 주신 선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확인의 방법 : 흥정인가? 신뢰인가? 
예수님 물에서 올라오신 것은 세례 요한의 인도 덕이였다. 예수님이 인간의 손을 의지한 것은 인정과 사랑 때문이다. 이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들려왔다. 구약에 나병 환자였던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몸을 여섯번이 아니라 일곱번째 몸을 담글 때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처럼 회복되었다.
물은 말씀이다. 물은 예배 속에 흐르는 성령이다. 찬양과 기도 속에 흐르는 성령이다. 일곱번은 반복을 의미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 속으로 계속 반복해서 들어갈 때 우리 삶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닫혀있던 것들이 열리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해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만두는 것은 흥정이고 조건적인 믿음이다. 몸이 물로 들어갈 때 마음도 영혼도 들어간다. 그래서 예수님도 친히 자신의 몸을 세례 요한에 맡기시며 물 속에 잠기셨다.

당신은 계속해서 그 성령의 강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말씀의 강물 안으로 반복적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흥정이 아닌 믿음으로 주를 따르는 사람이다. 

 

쭉정이와 알곡

누가복음 3:7-17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설교 요약> 
자연에는 좋은 열매도 있고 나쁜 열매도 있다. 좋은 열매는 먹을 수 있으나 나쁜 열매는 먹을 수 없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외쳤다. 누가복음 3:9 절 말씀에서 믿는 사람들은 두 가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조건 
누가복음 3장 9절 말씀에 기초할 때 '믿는 사람들이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다. 누가복음 3 장 7 절에서 8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자신 앞으로 나오는 이들의 내면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아브라함 혈통의 사람들에게, 요한은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다. 독사는 사단을 상징하는 명사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육적 자부심에만 빠져 있었고, 외형적으로만 믿음의 후손으로 보일 뿐이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1. 좋은 열매를 맺는다
첫번째, 좋은 열매는 회개의 열매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먼저 예수님께로 나아가 우리 죄를 회개하게 한다(요한복음 14 장 6 절).
그런데, 말로만 회개하고 행동에 변화가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씨앗은 가장 먼저 회개의 열매로 나타난다. 세례 요한은 단순히 회개라고 하지 않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했다. 고백을 '회개의 씨앗'이라고 보고 행동의 변화를 '회개의 열매'라 보았다. 참된 회개는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난다. 결국 나로부터 시작된 회개는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게 되고 지속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진정한 회개에 대해 누가복음 3 장 10 절에서 14 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행동이 수반된 회개다. 좋은 열매는 예수님 안에 거할 때 맺어진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 장 5절을 통해,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다는 것은 말씀 안에 있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회개는 나의 노력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과 나무이신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드려지는 회개는 구원 받기 위한 '거듭남의 회개'다. 그 이후에는 '성화를 위한 회개'를 계속해야 한다. 요한복음 15장 2절을 보면, 지속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 치기를 해 주어야 한다 말한다. 주님을 따르면서 계속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2. 성령의 불에 태워진다
두번째,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 분께 붙어 있는 가지임을 확신시켜 줄 증거는 성령의 불에 태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회개할 때, 예수님이 부어주실 성령의 불에 대한 약속이다. 성령과 불로 나누어 말했지만 성령을 불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불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어 주시기 원하신다. 시내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의 영혼에 불을 붙인 것도 가시떨기 나무에 붙은 하나님의 불이었다. 이 하나님의 불을 체험하고 모세는 애굽에서 고통받는 200만명의 영혼들을 구해냈다. 그 이후로도 이 불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속해서 나타나 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특히 구약의 불은 번제와 연결되어 있다. 번제는 두 가지 목적으로 드렸다. 첫째.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한 속죄의 제사였다. 둘째,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제사였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독자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받았다. 하나님은 이미 번제물로 이삭을 정했다. 그 이삭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런데 이삭처럼 자신을 받고 싶어하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번제할 어린 양을 찾는다. 하나님은 오늘도 스스로를 번제물로 드리기 위해 우리가 광야 길을 걸어갈 때, 불로 우리를 감싸신다. 

당신은 준비된 불과 나무를 보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좋은 열매는 삶의 변화가 있는 회개다. 좋은 열매는 나를 위해 준비된 불과 나무를 보면서 기꺼히 자신을 번제로 드리는 자원함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라. 말씀 안에 거하라. 회개의 열매와 불의 열매는 말씀 안에 있다. 이것이 쭉정이가 아닌 '알곡'이다.

회개의 세례

누가복음 3:1-6
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설교요약>
하나님은 오늘도 삐뚫어지고 뒤틀린 영혼이 반듯하게 변화되는 것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럼 하나님이 어떤 것들을 바로잡기 원하시는지 그 유형들의 문제점과 바로잡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자.

첫번째 골짜기 형이 있다.
사람의 내면도 골짜기형이있다. 내면이 너무 많이 패여서 관계를 가질수록 자신의 살도 패여져가는 아픔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골짜기형 사람들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사람을 회피하는 것과 사람에게 공격적인 성향 둘다이다. 다섯 명의 남편과 헤어지고 여섯번 째 남자와 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을 보자. 그녀는 중동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정오에 물을 길러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녀에게 물 좀 달라고 하자 유대인이 왜 사마리아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냐고공격적으로 반응했다. 내면에 골이 깊이 패인 사람은 늘 사람들을 회피하거나 공격적인 성향을 쉽게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복음 7장에 나타난 여인의 내면에 파인 골짜기는 이미 예수님의 사랑으로 메꾸어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증거는 이 여인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럴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바라보고 집중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의식할수록 사람들이 두려워지고 적대감이 커진다. 그러나 예수님을 집중하면 사람들이 두려워지지 않고 적대감이 줄어든다. 그 때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생명을 줄 수 있다. 이 여인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정죄와 평가에 집중하지 않고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직장, 가정, 교회, 학교에서 순간순간 사람이 두려워질 때가 있다. 그 때마다 그 덫에서 나와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고 고약한 냄새들로 가득찬 장소들을 향기로운 향기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열쇠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 내면의 골짜기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분의 새살로 채우고 싶어하심을 아는가? 사람이 아닌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을바라보는가? 사람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을 주목할 때 당신의 내면에 깊게 파인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게 될 것이다. 그 골짜기가 메워지면 당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두번째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통해 보여 주신 유형은 높은 산과 작은 산이다.
하나님은 이런 산을 낮아지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누가복음 3:5 말씀에 동사 '낮아지고'는 '겸손하게 하다' '낮아지게 하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들이 낮아져서 겸손한 삶을 사는 것에 관심이 많으시다. 사랑받는 것과 추앙받으려는 것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사랑받으려 하는 것은 겸손이고 추앙받으려 하는 것은 교만이다. 하와를 유혹한 사단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그 것을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인간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될 것을 경계한 것이라고 했다. 사단의 말을 듣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 행위의 동기 속에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능가하고 조종하려는 심리를 보게 된다. 교만의 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섭다. 교만은 인간이 신이되려 하는 것이다. 높은 지위나 지식이나 세상의 부를 가졌을 때 교만은 수면 위로 정체를 드러내는 빙산과 같다. 사람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행복해 한다. 그러나 사람을 신처럼 추앙하라고 강요받거나 아부를 하게 되면 큰 수치감을 느끼고 자존감을 훼손 당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에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추앙하는 본능을 넣어주셨기 때문이 다. 세상에 부와 권력을 잡은 자들 중에 높은 산이 될수록 더욱 낮아지는사람들이 있다. 세상은그리스도인이 완벽해서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것이 아니다. 솔직하고 진실할 때 그 겸손한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린다. 그럼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가? 살지 않는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믿음의 기준 3가지
첫째. 영혼의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
하박국 2:2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그 분의 심판을 알고 그 분의 은혜를 알고 영광을 인정하면 할수록 그런 사람들의 영혼은 이 땅에 부흥이 임하길 소원한다. 사람들의 영혼이 '부흥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한 영혼이 다시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되길 소원한다. 무릎 꿇고 열방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열정을 갖게 된다.
둘째. 결핍과 풍요 속에서도 주를 기뻐한다.
하박국 3:17-18 말씀에 따르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증거는 아니다. 없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계기가 되었다. 없는 것이 오히려 영적으로 거룩하고 겸비하여 깨어있게 했다. 없는 것이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감사로 기쁨으로 인도했다. 당신의 부족함은 무엇인가? 결핍 속에서 오는 불안과 걱정은 무엇인가? 당신이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기쁨을 주실 것이다. 기쁨과 함께 응답도 주실 것이다.
셋째. 사슴의 발 같은 힘을 주실것을 기대한다.
하박국 3-19 말씀에 따르면 하박국은 처음에는 불만과 원망을 하나님께 토로했다. 그러나 하박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발을 사슴의 발 같이 해주실 거라 확신했다.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사슴 발 같은 힘을 주신다. 회개는 골짜기를 채우는 것이다. 회개는 높아진 산과 같은 마음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에게 이런 축복을 약속하셨다. 요엘 2:12-14 말씀에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모든 것을 돌이키신다. 저주가 축복이 되게하신다. 재앙을 중단 시키실 수 있다. 하나님은 마음을 찢으며 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회개는 하늘문을 여는 열쇠다. 회개는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준비된 사과

누가복음 2:40-52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설교요약>                                                                                                                                                  열두살이 된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잃어버렸음을 알아차리고, 하룻밤길을 되돌아가 삼 일이 지난 후에야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게 된다. 
본문에서는 열 살 미만인 아이의 외적 성장과 열 두 살 이후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내적 성장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부모들은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자녀들을 교육하고 보살핀다. 그 결과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겉모습만 강한 모습으로 성장했을 뿐, 내면은 두려움으로 가득찬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즉,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 행동을 하면서도 전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로 자란 것이다. 지식과 외형은 자랐지만 성품과 인성은 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성인 아이  
기독교 상담학자 Dr. Archibald D. Hart는 자신의 저서에서 어린 시절 심각한 애정 결핍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정서 장애를 보이는 사람들의 세 가지 증상을 적고 있다.
첫째. 사랑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과도하게 노력하며, 끊임 없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비현실적으로 높인다. 
둘째. 인격에 깊이 새겨져 있는 심각한 특정 성격의 발달이 나타난다. 
과도한 질투와 함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동시에 나타낸다. 깊은 불안감으로 인해 사랑을 늘 재확인 받으려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높다. 
셋째. 애정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나 질병이 발생한다.
'내가 아프기 때문에,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이젠 나를 사랑해야만 해'라며 주로 동정을 통해 사랑을 획득한다. 어린 시절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잘 받고 자라는 것만으로도, 이후 사회적 실패나 신체적, 지적 결함까지도 이겨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외적으로는 성인인데 내면은 여전히 어린 아이들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진실로 오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왠지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두려워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만, 늘 하나님이 두렵고 부담스럽다. 늘 사랑에 목말라 사람들 주변을 맴돌며 전전긍긍하고, 과도한 질투와 주목 받거자 하거나, 집착적 성향을 보임으로 인해 타인과의 지속적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집을 사모하라  
예수님의 부모는 매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만큼 신실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날이다. 요셉과 마리아는12년 전에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했고, 여러 기적을 통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심 없이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을 그저 자신들의 자녀 중에 하나이자, 인간의 아들로 점점 인식해 갔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에 머물면서 '내가 내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머무는 것에 대한 당연한 말을 했을 때, 그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할 만큼 영혼이 둔감해지고 세상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의무는 다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사랑과 영적인 영향력은 희미해져 갔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잃어 버리면 교회는 사회적인 활동 무대로 전락한다. 자녀들을 세상적인 것들로만 키우려 한다. 오늘날의 자녀들이 점점 세상의 쾌락과 정욕에 빠져드는 것은 그들이 영혼의 '아버지 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녀들의 영혼이 갈망하는 아버지 집으로 데려와, 그 곳에 머물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사춘기 시절의 아이는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은 것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그래서 타인들과더 거리를 두고, 상태가 심해지면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은 오직 하나님만이 치유하고 채울 수 있는 영역이다. 아버지 집을 잃고 예수님을 잃으면 아무리 종교적인 의무를 다해도 내면은 채워지지 않는다. 자녀의 영혼에 생명의 양식을 주는 아버지의 집으로 교회를 보로,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영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깨어 있는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아버지 집을 사모하는 영혼들이 일어나길 간절히 찾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하는 사랑
52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했고 그 분의 사랑을 갈구했다. 그래서 그 결과 사람들에게도 사랑스러운 분이 되어 가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을 주고 받았다. 그 사랑 받음의 확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확장 되어가고 세상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매순간 확인하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 사랑이 사람들에게 흘러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는데도 계속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교만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성숙한 사랑, 건강한 사랑은 먼저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돌려받는 사랑은 1) 우리 자신을 더욱 겸손하게 해준다.  2)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먼저 사랑하셔서 그분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된다. 3) 먼저 주는 사랑의 기쁨과 성숙을 맛보았기에 더욱 누군가를 먼저 사랑하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준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은 먼저 하는 사랑으로 드러난다. 

결국 성인 아이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의 깊이에 비례한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지옥 형벌을 받도록 내주신 것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최고의 사랑이다. 때로 이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해 자연을 통해 다시 우리의 영혼을 상기시키기도 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을 의무적으로 형식적으로 사랑하지 마라. 마음으로, 영으로, 아버지 집 교회를 사랑하라. 그 사랑으로 헌신하라. 먼저 사랑하라.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라.

성령의 시간 속으로

누가복음 2:21-39
21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설교요약>
예수 생후 8일에,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행하기 위해 헤롯 성전에 들어갔을 때 전혀 기대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그곳에는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과 안나라는 노인들이 있었다. 특히 그 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 이 당시 성전의 크기는 지금의 미식 축구장의 세 배 정도였으며, 제사장 7,200명, 레위인 9,600명이 성전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가늠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의 방대한 성전 안,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알아봤다는 점이다. 그 일은 '성령의 감동'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분이 선택한 사람들을 아신다. 그리고 그들을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하신다.

* 성령의 시간 속으로
성령은 그 분을 의지하며 살 때, 그 분이 원하는 시간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시간 속에 천국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쫓아 살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쫓아 살아야 한다. 그 시간을 알려면 계속해서 성령님을 사모하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영으로 우리가 채워지길 소망해야 한다. 시므온과 안나의 공통점은 육신의 정욕대로 살던 사람들이 아닌 신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제사장 지파 출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임에도 이들은 성전을 사랑했고, 성령의 인도를 사모하며 절제된 삶을 살았다. 시간을 아끼는 것은 내 뜻과 계획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 뜻을 알려면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정욕적인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그것이 방탕한 삶인 것을 금방 인지하고 돌이키게 된다.

* 성령의 시간 안에 있는 증거들
1) 예수가 보인다 
시므온과 안나가 성령의 감동으로 그 분이 이끄시는 시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처음 만난 것은 예수님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색을 하고 있었음에도,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살았던 시므온과 안나는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있던 예수님을 놓치지 않았다. 사우스 다코타에서 만난 모든 아이들이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살고 있는데도, 천사같은 아이를 그 가운데서 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싸인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임재하신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신다. 상황이 어렵고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예수님을 보고 있는가?

2) 나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손이 보인다
복음서의 시므온과 안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짧게 언급되어 있다. 그럼에도 평생 이 한 순간을 위해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의 삶을 강한 성령으로 붙드셨고, 매순간순간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게 하셨다. 누가 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 힘없고 화려하지 않는 사람들이였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성령에 붙들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종종 이 땅에 살면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상실한다. 상대적인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또한 상대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이 있어 하나님이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신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을 부어주신다. 이 땅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존재감의 상실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가? 그것이 풀어지고 자유하게 되는 방법은 하나다. 성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성령안으로 이끌리는 길
1) 매순간 선택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셨다. 선택을 위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 만남, 생각, 그리고 장소에 있기를 매순간 선택할 때, 우리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2)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라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려운 사람들과의 관계로 연결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사랑은 삶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안식에 우리의 마음이 다다를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한다. 당신은 성령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길 사모하는가? 매순간 성령을 따라 선택하라. 선행이나 사역이 아닌 사랑을 하라.

하나님을 보려면

요한1서 4:12-13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설교요약>
MMC 교회에서 11년째 사우스 다코타 선교를 갔는데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사랑과 선교팀 안에 있는 사랑을 깊이 알게 하시고 더 완벽해져야 하는지를 보게 하시는 선교였다. 오늘은 우리들 안에 있는 사랑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온전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확장하시는지를 선교 팀원들의 나눔을 통해서 보겠다. 

선교지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자, 선생님은 아이에게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상으로 줬던 스티커를 다시 떼어가겠다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에 그 아이의 마음은 완전히 닫혀 버렸다. 선생님의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달래지지 않던 그 아이는, 제비어라는 그 아이의 형이 그 아이의 옆구리를 친근하게 손가락으로 살포시 찌르자 이내 마음을 풀었다.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권위적인 선생님이 아니라 가족 같은 친근한 관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아이 안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그 곳에는 또 평소에는 천진난만한 다섯 살짜리 가브리엘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의 눈빛이 바뀌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이 오면 윽박지르고 무력으로 저지해도, 성난 스무살 청년처럼 집기와 캐비닛을 부수고, 난폭하게 변화되며 본인의 머리를 주먹으로 치는 자해까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사해도 아무 반응도 없던 친구였다. 근데 갑자기 Deli Queen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해서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더니 원래의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듣고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더 큰 능력임을 알게 하셨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얼마나 재능 있고 능력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어느 한 아이가 선생남한테 마약를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 아이는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마약 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사실 이 아이는 착하고 긴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아이였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예쁘게 따주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겨울왕국의 엘사와 같이 예뻤다. 이 순간은 선생님이 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윈터, 스톰 그리고 썬더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들이 있었는데, 오래 전부터 성경 학교에 참가했던 아이들이였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근데 16세 정도된 원터가 차 안에서 욕을 섞어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하였지만 다들 주문은 안하고 뒤에서 서성거리기만 했고, 데빈에게 케찹통을 찾아달라 부탁했는데 케첩통을 찾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런 아이스크림 가게에 온 적이 거의 없던 아이들이여서 이 곳이 낯설었던 것이다. 하지만 피도 안섞인 동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주기 위해 자신들은 조금만 먹고,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 때 원터가 그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온 스무 살 정도의 청년과 길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원터 삼촌인 저스틴이였다. 그런 저스틴을Taco Night과 Korea Night에 초대했는데 응했다. 저스틴은 Taco Night에 방문해서 스킷에 나오는 주인공이 죄와 싸우는 모습이 마치 자기와 같다면서,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Divine Appointment 이라 고백했다. 나는 원터가 욕하는 것과 본인을 자해하는 것이 싫다고 삼촌인 저스틴에게 이야기했고, 네가 아이들의 삼촌과 형이 되어달라 부탁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온전한 사랑의 발자국을 보여주신다. 우리가 걸어간 발자국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선생님들이 이 아이들을 위해 울고, 사랑을 표현할 때 이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오엔 목사님의 손자인 마셀은 이전에는 건방지고 종종 비웃는 표정을 자주 보였던 아이였지만, 이번엔 아이들이 우상 숭배에 사용한 바비인형을 버리고, 우리 선교팀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길에 분명한 발자국을 남겨주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도 보여주시는데 10년 동안 터키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자매를 통해 부족했던 선교 헌금을 채워주시고, 사우스 타코다에서 1시간 거리 안에 있는 목사님과 선교 장로님을 연결해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발자국을 확인하고 위로 받는 사건이었다. 

사우스 다코타 아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이기적이고 부족한 사랑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보게 하셨다. 이런 모순투성이 사랑을 성령 하나님이 온전하게 하시고 서로를 사랑하게 하신다.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때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온전케 한다. MMC 선교팀의 모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우는 모습 속에서 감동하게 하셨다. 우리는 사역을 잘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단지 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께서 이 아이들이 온전한 사랑을 보게 하시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을 온전하게 하는 방법이다.

땅에서 누리는 평안

누가복음 2:1-20
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설교 요약>
누가복음 2:1-20은 성탄절 설교에서 주로 많이 인용되는 성경 구절이다. 예수님의 탄생이 역사적 사실임을 명확히 증거하기 때문이다. 로마는 당시 식민 통치하던 속국의 인구 조사를 통한 세금 및 병역 징집의 이익을 챙겼다.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으로 유다 지파였다. 때문에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를 데리고 나사렛으로부터 다윗의 출생지 베들레헴으로 호적 신고를 하러 올라갔다.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의 해산일이 임박하여 예수님을 낳았고, 여관에 남는 방이 없어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말 구유에 뉘였다. 이 지점에서 ‘왜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아구스도)는 예수님 탄생 시점에 호적 신고를 명했을까?’  ‘예수님은 꼭 베들레헴 에서 탄생하셨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
구약에 미가 선지자는 주전 약 735-700년 경에 예수님 탄생에 대해 예언했다(미가:5:2) 동방박사들은 큰 별을 따라 다다른 곳에서, 그 곳의 왕 헤롯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신지 물었다. 헤롯은 구약 율법의 선생들이자 전문가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는지 물었다. 그들은 정확하게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하며 베들레헴이라 답했다(마 2:5-6) 서기관과 대제사장은 지식적으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나,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위신 예수님을 찾지도, 예배하지도 않았다. 이것을 안 헤롯은 군사를 보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헤롯의 이런 광기 어린 살육은 아기 예수님이 자신의 권좌에 위협이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오시면 진심이 드러난다(마 10:26) 감추어진 명예욕과 탐욕이 드러난다. 실천 없는, 말뿐인 믿음과 헌신이 드러난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은데 정작 하나님은 모른다. 반면 이런 전문가들처럼 구약 성경을 모르던 한밤의 양치는 목자들은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고 전해주었다.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알려주었다. 학식도, 부도, 명예도 없없지만, 목자들은 단순하고 순수했다. 그들은 천사를 통해 기쁜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를 찾으러 가자 서로 말했다(눅 2:15-16)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헤롯과 종교 지도자들에게로 먼저 보낸 점이다. 헤롯은 자기의 두 딸과 아내를 죽였으며, 자신의 삶의 마지막 즈음엔, 자신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을 여리고 감옥으로 보낸 잔인한 사람이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 했지만 사실 위선적 삶을 살았고,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에게 동방박사들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다. 하나님은 먼저 동방박사들을 통해 그들의 완악하고 위선적인 마음을 두드리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거절했다.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도 천사를 만났지만, 천사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도 죄인이었다. 그날 저녁 목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께 무릎 꿇고 경배드렸다(눅 2:20)

죄인들에게 주시는 은혜
오늘도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사람도 보내시고, 천사도 보내신다.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천사들이, 가장 초라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광야에서 밤을 지새우는 목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의 금가루를 뿌려주거나, 대단한 보석을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다. 그 분을 어떻게 만나는지 알려주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알려주고 어떻게 그 분을 만날수 있는지 알려주는 이가 바로 천사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만족과 평안을 찾아 헤메이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 안에 있다.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면서 하늘의 영광과 평화를 말했다.(눅 2:14) 평화는 'Peace'는 평안, '땅에서 평안' 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땅에서의 평안을 얻기를 갈망하며 크게 세 가지를 추구한다. 편리한 삶, 인간 관계, 욕구 충족이다. 넓고 안락하고 깨끗한 공간은 더럽고 불편한 공간보다 마음을 한층 평안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외적 좋은 환경들이 지속적 평안을 보장하진 못한다. 내면에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한 평안을 위해 좋은 인간 관계를 추구한다. 인간이라면 관계를 통해 오는 관심과 배려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누군가를 돌보면서도 내면에는 더 많은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또한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도 우울하고 권태를 느끼며, 만족 없이 다른 새로운 것에 탐닉하는 사람들도 많다. 식욕처럼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면 어느 정도의 기쁨과 만족이 있다. 새로운 것을 아는 것, 성취에 대한 즐거움도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시시하고 허무해진다. 따라서 편리한 삶, 완벽한 인간관계, 본능적 욕구 충족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줄 순 있어도, 내면에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평안과 만족은 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영혼에 근본적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건 오직 예수뿐이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 했다. '기뻐하신 사람들' 은 헬라어로 '은총을 입다' 란 의미다. 당신은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만약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 분을 위해 살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그 은혜를 받아 드리면 평안이 임한다.

전쟁 중에도 누리게 되는 평안
누군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 대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많은 영적 싸움에 직면하게 괴고 마귀의 공격 표적이 된다 했는데 어떻게 전쟁 중에 평안을 누릴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실때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 체포직전이었다. 사단이 예수님을 죽이려 총공격을 퍼부을 때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안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인이 용서함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다 환난을 만나기도 하고, 사단의 맹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영적 전쟁 속에서도 땅에서 누리는 평안이 있다. 당신의 삶이 영적 전쟁 안에 있는가? 환란이 있는가? 그러면 반드시 하늘의 평안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 중에도 평안을 누릴수 있다. 그래서 영적 싸움이나  주님 주시는 환란을 포기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또한 평안을 누리기 위해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목자들처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한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그 분의 임재 안에 있는 안식을 더 누릴수 있다.

풀어짐

요한복음 11:37-44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설교요약>
나사로는 죽은 지 사흘이 지나 다시 살아났다. 예수님이 무덤 밖에서 나사로를 살아나오라 불러내셨을 때, 그를 장사 시 수족에 동였던 베와 수건이 얼굴에 싸여진 채로 무덤으로부터 걸어나왔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일러 수건과 베로 싸인 그의 몸을 풀어놓아 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살아났지만, 어떤 것에 묶여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사람은 내면에도 양면성이 있다. 선하고 평안해 보이지만, 한편  활화산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내면의 볼케이노는 풀어짐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풀어주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풀어줄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는 기도로 풀어주라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죄악으로 하나님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약 5:17). 그러나 3년 6개월이 지나 엘리야에게 비를 약속하셨다. 약속을 받았음에도 엘리야는 비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비 올 기미는 0%도 없었다. 왜 하나님은 비를 약속하시고도 엘리야가 7번 기도하게 하시고, 7번째 마저도 비 대신 손바닥만한 구름만 보여 주셨을까? 이 일로 크게 세 가지가 풀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엘리야의 겸손이 풀어졌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우상 숭배하는 제사장 850명을 모았다. 그리고 바알의 제단을 쌓게 하고 그들의 신에게 구하게 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엘리야도 자신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간구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린 불이 제단 나무, 제물 및 도랑물까지 모두 태웠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외쳤다. 그는 한 순간에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그 후 기도하는 것이 쉽게 응답받지 못하자, 그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고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기도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 내면에 겸손이 풀어지길 원하신다.

둘째. 사환의 긍정적 눈이 풀어졌다. 
엘리야가 사환에게 바다를 바라보라 할 때, 사환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고했다. 엘리야가 이른 대로 일곱번을 확인하러 가면서 사환은 포기하지 않는 엘리야의 믿음을 보았다. 그리고 일곱번째도 빗방울이 아니라 손바닥만한 구름 조각 하나만 보았다. 측량 불가능하고 무한한 하늘에서 손바닥만한 구름을 본 사환의 눈은 믿음의 눈이었다. 엘리야는 그 작은 구름을 보고 아합에게 비에 막하지 않게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라 선포했다. 상황이 좋을 때는 누구나 긍정적이고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안좋으면  부정의 심리도 드러난다. 사환은 부정적 상황에서 엘리야의 큰 소망과 포기하지 않는 긍정적 믿음과 기도를 보았다. 믿음의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낳는다. 이 때 이 것을 본 두려움에 쌓인 부정적인 주변 사람들의 소망이 내면에서 풀어지기 시작한다. 소망은 소망을 낳는다.

셋째. 선포가 풀어졌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 아합 왕에게 큰 비가 올 것처럼 미리 선포했다. 하나님은 손바닥만한 구름을 통해 엘리야로 담대히 선포하도록 풀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선포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주시는 단어를 붙들고 기도하라. 성령의 감동을 붙들고 선포하며 기도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선포한대로 행하신다.
예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믿음으로 준비하고 행동하길 원하신다. 부족함과 불가능과 부정적 상황 속에서 겸손이 풀어지고, 부정적인 사람들 내면에 소망과 긍정이 풀어지고 선포가 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바다 같은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출하는 용암과 같은 분노도 있고 아픔도 있다. 어떤 용암은 조용히 바다로 흘러들어 육지를 만들 듯 그 삶의 지경을 넓힌다. 반면 어떤 용암은 땅을 뒤덮고 파괴하듯, 분노로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스스로의 삶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어떻게 풀어지는가의 차이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분노가 풀어질 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족함과 위기의 부정적 상황을 통해 많은 것을 풀으신다. 당신이 처한 부정적 상황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받고자  하시는 당신의 태도와 믿음과 행동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번 사우스 다코타 선교를 통해 풀어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푸시고 계신가?

차고 넘치는 행복

요한일서 4:7-12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설교 요약>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하버드대 로버트 왈딩거 박사팀의 75년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결코 부와 명예 또는 노력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건 “좋은 관계’라는 사실이 그들이 발견한 가장 분명한 메세지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일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결과가 사실 조금도 놀랍지 않다. 하지만 왜 우리는 부와 명예를 위해 열심히 살면 행복해질거라는 허망한 거짓에 반복적으로 속으며 계속해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을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들을 아깝게 여기고,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자리로 오르는 것을 위해 우리들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걸까? 이유는 ‘죄’ 때문이라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죄가 우리에게 들어와 저지른 일이 사람간의 관계를 깨트리는 일이었다. 사람들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죄로 인해 깨어졌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깨졌고, 그 영향으로 인간 사이의 관계도 깨진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와 해결방법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바로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행복과 건강은 로버트 왈딩거 박사팀의 연구 결과처럼 우리가 맺는 '관계'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과 화목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두둔하거나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행위를 극히 혐오하신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법을 바꾸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일을 행하셨다. 악인을 의롭다 하시고, 의인을 악인으로 재판에 넘기시어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셨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한 인간이 모든 인류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식처럼 지으셔서 함께 그 분의 피조물들을 관리하게 한 아담의 가치를 대신할 피조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다 합친 가치를 가진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밖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두 가지 자격을 가진 유일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것이다. 단지 갈등이 없는 평화와 평안의 상태가 아니라 행복을 동시에 의미하는 화목제물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신 방법이라 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헷세드_상대방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
헷세드는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화목제물을 통해 죄를 짓기 전 아담의 신분과 권세를 회복했다. 이제 법적으로 신분이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화목을 이루었는가? 한 집에서 최소 몇 시간을 함께 보내는 가족이 일주일에 단 몇 분 정도만 대화를 한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화목하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서운한 점이 있는가? 하나님이 두려운가? 어떤 계기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을까? 기대하지 않는 마음, 마음을 터놓지 않은 태도가 그 분과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 삶에 어렵고 힘든 문제를 허락하실 때가 있다. 그런 때에 하나님께 서운하고, 원망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혹시 그 계기로 인해 하나님께 등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삶에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어려움을 허락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는데 그런 때에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 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여러분 중에 혹시 어떤 시련의 기억 때문에, 응답되지 않은 기도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이제는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길 바란다. 예수님을 만나고 풀어진 관계는 셀 수 없이 많다. 진정한 화목은 하나님과 먼저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함축적이고 분명한 계명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해야 이웃과도 화목할 수 있다.

꺼지지 않는 은혜

나훔 1:1-8
1 이것은 엘고스 사람 나훔이, 니느웨가 형벌을 받을 것을 내다보고 쓴 묵시록이다.
2 주님은 질투하시며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원수를 갚으시고 진노하시되, 당신을 거스르는 자에게 원수를 갚으시며, 당신을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하신다.
3 주님은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고 권능도 한없이 많으시지만, 주님은 절대로, 죄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회오리바람과 폭풍은 당신이 다니시는 길이요, 구름은 발 밑에서 이는 먼지이다. 
4 주님께서는 바다를 꾸짖어 말리시고,모든 강을 말리신다. 바산과 갈멜의 숲이 시들며, 레바논의 꽃이 이운다. 
5 주님 앞에서 산들은 진동하고, 언덕들은 녹아 내린다.그의 앞에서 땅은 뒤집히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곤두박질한다.
6 주님께서 진노하실 때에 누가 감히 버틸 수 있으며, 주님께서 분노를 터뜨리실 때에 누가 감히 견딜 수 있으랴? 주님의 진노가 불같이 쏟아지면, 바위가 주님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
7 주님은 선하시므로, 환난을 당할 때에 피할 피난처가 되신다. 주님께 피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지만,
8 니느웨는 범람하는 홍수로 쓸어 버리시고, 원수들을 흑암 속으로 던지신다.

<설교 요약>
유대인들은 원래 성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포로생활 이후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해서 회당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는 5개 정도의 (에세네파, 열심당, 헤롯파, 사두개파, 바리새파) 당파들이 존재했으며 그들은 율법을 정치적, 종교적 유익에 따라 판단하고 해석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성취를 이루는 데 일조하게 된다. 특히 바리새파들은 유다가 멸망한 이유가 바로 율법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교리화하고 체계화했지만 성경을 잘못 이해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고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다. 

오늘의 본문은 엘고스 사람 나훔이 앗수르에게 주는 멸망의 메시지이다. 그의 예언은 니느웨 백성이 요나를 통해서 회개했지만 다시 옛 행위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진노한 메시지이다. 마태복음 12: 38-45에 보면 주님께서 니느웨 백성이 회개한 모습을 회개치 않는 바리새인들과 비교하신다. 요나서와 나훔서는 니느웨의 멸망과 회개를 촉구하는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요나서는 회개로 그 성이 심판에서 구원받았고 나훔서는 다시 타락한 그 성이 회개를 촉구하지만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두 책은 시간적으로 한 세대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성의 운명도 구원과 심판이 별개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도 요나의 시대와 나훔의 시대가 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고 회개를 통해서 구원의 기쁨을 누렸지만 나훔의 시대와 바리새인과 같이 형식적인 기도와 봉사, 열심으로 살 때도 있다. 하나님은 선하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지 않으면 심판 하신다. 만약에 우리가 죄를 지어도 심판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고아인 것이다. 심판은 두렵지만 심판을 보류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회개할 수 있다. 

나훔 1장에서 2-7절에 하나님의 다섯 가지 성품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어떤 은혜와 열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던 사람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예수님께 죄를 회개하며 구원의 길을 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한 모든 진노가 십자가 위로 쏟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다. 셋째는 하나님은 권능이 크신 분이다. 도저히 무너질 수 없던 견고한 니느웨성도 홍수로 인해서 쉽게 무너진다. 우리의 성공과 열심으로 쌓아온 견고한 것도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다. 넷째는 하나님은 진노하실 때는 무섭게 진노하시는 분이다. 노아시대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처럼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죄악을 싫어한다.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섬겨도 바리새인과 같이 외식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죄를 범할 수 있다. 다섯째는 하나님은 선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제 2의 요나와 같이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의인의 삶으로 살아갈 때 선하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그럼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나훔서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죄가 나온다. 그것은 바로 교만의 죄이다. 이 교만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전혀 생각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교만의 결과는 패망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신다. 바울과 스데반 집사 같이 바리새인으로 태어나 자라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꺼지지 않은 은혜이다.

진리와 사랑을 입으라

에베소서 6:10-14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설교요약>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때 에베소에 교회를 세우고, 3차 선교 여행 때는 에베소의 두란노에서 2년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면서 에베소 교회를 영적으로 활기찬 교회로 세우게 된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이 바로 에베소서인데, 그 서신은 성도들에게 영적 싸움에 대해 알려준다. 특히 1장에서 에베소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믿음으로 산 것에 대해, 바울은 늘 감사했지만 편지에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령 충만한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더욱 더 그 분의 힘으로 강해져야 한다는 권면의 말씀을 하게 된다. 그럼 왜 주 안에서 더 강해져야 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11절에 나오는 마귀의 간계(길, 방법)이다. 따라서 성도가 믿음과 사랑이 있고 스스로 선 것 같더라도 더욱 더 주님 안에서 강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마귀는 계속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공격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시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세가지로 유혹한다. 바로 “돌을 떡으로 되게 하라” 그리고 “성전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하라”,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 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유혹들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부 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 4:7)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이때 싸움에서 패배한 마귀는 떠나갔다. 그 영적 싸움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마태복음 4장 24절에 보면 마귀(루시퍼)의 졸개들인 귀신들도 패배하게 된다. 즉 마귀의 유혹인 세상의 영광, 과시욕 그리고 정욕들을 물리치면 그의 졸개 귀신들도 힘을 잃는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면 두 가지 유익이 있는데 그 하나는 그 전쟁을 통해서 더욱 더 성령의 사람으로 강해지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원수 사단이 패배하면서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수 많은 영혼들이 어둠에서 풀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의 중요한 이유이다. 

마귀는 아직도 이 시대의 사람들의 세계관을 통해서 당신이 눈으로 볼 때 위대한 일을 해야만 당신이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하라고 명령한다. 그 첫 번째 무기는 진리의 허리띠다. 진리를 취하지 않으면 영이 힘을 쓰지 못한다. 진리의 반대말이 거짓말인데 이것을 분별해 내는 것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4절과 디모데전서 2장 9-10절에 보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차별하지 말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내면이 외적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한다면 스스로를 먼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음성, 즉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도록 성령님을 곁에 있게 하셨다. 성령님이 없이는 누릴 수도 필요를 얻을 수도 없다. 그런 의미로 성령님은 상속의 담보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받기에 충분한 담보가 없다. 그러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담보로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성령님을 담보로 주셨다. 그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신다. 

두 번째 무기는 의의 호심경이다. 사단은 사랑의 능력을 잘 알기에 집중적으로 심장을 향해서 공격한다. 생명의 근원이고 사랑의 시작인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흉패로 보호해야 한다. 이 흉패는 바로 예수님의 심장이다. 조건 없이 계산 없이 무조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을 줄 때 조심하라고 한다. 누가복음 14장 12-14절에 보면 예수님은 다시 받기 위해서 조건적이고 계산적으로 상대방에게 베푸는 것의 위험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런 초대와 대접은 마지막에 하나님으로부터 상이 없다. 그러나 다시 되돌림 받지 못했거나 혹시 다시 되돌림 받는 베풂을 주었어도 계산 없이 순수하게 했다면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따라서 계산하지 않고 준 것에도 보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이 땅에서 보상 받아도 천국에서 다시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계산적인 사랑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렇게 할 때 의의 흉패를 우리의 심장에 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소망이 없어 보이는 겨울나무처럼 도저히 살수 없을 것 같고 변화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곤 한다. 그러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시 부활시키고 바꾸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무리 소망 없고 불가능한 상황이라도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부자 청년

마태복음 19:16-23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설교요약>
몽골에 마더스데이 카드를 보냈는데, 그 카드의 배경 이미지는 바로 몽골이었습니다. 하지만 몽골에서 카드를 받으신 분은 이 카드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미국인 줄 알았습니다. 맨하튼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맨하탄에 거주하는 분들이 맨하탄 이미지에 감동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즉 본인들이 사는 지역과 환경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10년 전 미전도 지역이었던 몽골로 파송될 때 런던과 스페인과 같은 유럽이 선교사 필요 지역이 되버렸습니다. 100년 전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던 유럽이 지금은 미전도 지역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이 바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하는 지상 명령이며, 그 말씀 위에 예수님의 교회들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축복입니다. 선교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후진국에서 선교할 때 직면하는 문제가 바로 가난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세례를 받았어도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신앙을 버리고 떠나는 현지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았지만 1~2년이 지나도 삶의 변화가 없고 오히려 지속되는 삶의 고통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는 구호 단체를 통해 천문학적인 돈이 아프리카나 아시아로 보내지고 있는데도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구호 물자는 현지인들에게 일시적 해결책은 되지만,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물질적인 구호는 현지인들이 가난을 극복하게 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가난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의지가 부족해서 가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난의 원인은 바로 관계의 단절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 단절로부터 기인합니다.

그럼 왜 이런 관계의 단절이 생기는걸까? 이것은 바로 정직하지도 근면 하지도 않고, 믿음도 없는 성품이 원인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스스로 신뢰할 수 있는 성품으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면 문화 및 사회적 구조와 나아가 나라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관계로부터 오는 우리의 나눔은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눔과 희생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와 공동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미국의 가장 큰 적은 바로 개인주의 입니다. 개인주의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 이유는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부자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9장 16-23절에 보면 영생을 얻기 위해 계명을 지킨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라'하신 말씀을 거부합니다. 부자는 재물이 많다는 뜻인데 부자 청년은 아직도 스스로가 가난하다 생각해서 누군가에게 나누어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눔을 거부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사실 예수님의 눈에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 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전 재산의 사분의 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삭개오와 예수님의 무덤을 제공한 아리마대 요셉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부자는 나누는 자입니다. 이것은 희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교는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후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이 따르는 행위입니다. 지금도 미국은 전세계에서 제일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입니다. 이것이 미국을 지키는 힘이며 하나님이 이 미국을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맨하튼은 가장 복음화가 안된 지역입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분들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광야의 영성

누가복음 1:80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설교요약>
심령이 강해져야 할 이유
최초의 아담과 하와의 영은 하나님의 음성을 쉽게 듣고 이끄시는 대로 순종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이 무엇인지 쉽게 분별했으며 마음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 그들의 영과 마음은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벗은 자신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당시 에덴 동산에 계시던 하나 님은 그들을 수치스럽게 보시지 않았다. 또한 아직 사람들은 그들 둘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건 강했던 마음이 퇴색되었다.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준것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 있었 다. 한가지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할것은 아담과 하와는 심령이 강해지기 위해 무엇을 한것이 없다.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했을때 범죄하기 이전에 그들의 심령은 강해 있었다. 심령이 강한것은 수치심, 두려움 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어린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과 자유와 기쁨의 영혼의 생동력으로 드 러났다. 또한 그들 스스로 심령을 약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 했을때 그들의 영 혼은 두려움과 수치감으로 약해졌다. 강해지는 것도 약해지는 것도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이다.

광야의 영성
요한의 심령이 강해진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강함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되 었다. 그가 그렇게 계속 강해질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동적인 반응에 있었다. 그는 '광야'에서 성장 했다. 광야는 조용하다. 조용하면 생각이 맑아진다. 생각이 맑아지면 어떤것이 하나님의 생각인지 사단의 생각인지 자신의 생각인지 분별하게 되고 하나님의 생각을 붙잡게 된다. 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이다. 광야는 볼것이 별로없다. 볼것이 많으면 시선이 분산된다. 시선이 분산되면 마음이 불안 해 진다. 광야는 인위적으로 만든것 보다는 자연 그 자체를 보게 해준다. 상점도 사람도 집도 없다. 오직 자연뿐이다. 하나님이 만든 자연을 바라볼수록 시선이 하나님께로 집중된다. 영이 새로워 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한다. 광야는 소유가 없다. 광야는 집이 아니라 텐트를 사용한다. 광야는 적은 가방일 수록 좋다. 옷도 먹는것도 소박하다. 소유가 많아질수록 근심도 많이진다. 소유가 적어질 수 록 탐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넓어진다. 광야는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에 집중할수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광야가 내면에 평안과 담대함을 주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우신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 무리 광야에 있어도 무언가로 빈내면을 채우기 위해 불안해 한다.

예수님은 광장의 삶을 즐기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셨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셨 고 어떤결정을 해야 할지 아셨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아셨다. 그런 명료하고 단순한 삶은 예수님의 광야의 삶에 있었다. 영혼의 광야가 뿌리라면 광장의 삶은 열매다. 광야 없는 광장의 삶은 쉽게 깨 지고 상하고 동화되고 절망케 한다.

광야의 열매들
1)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가치를 보는 영혼의 눈을 주셨다.
사람은 자기가 가치를 둔것에 의해 그 행동이 결정된다. 만약 요한이 외적인 옷이나 장식품과 물질 의 양에 가치를 두며 살았다면 그는 이런 엘리트의 사람들의 외모와 가진것 앞에서 눌리거나 움추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전혀 이런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음을 그의 내면을 꿰뚫어 보며 선포 하는 말속에서 알수있다. 이런 진정한 가치를 볼수 있는 눈은 세상의 쾌락과 정욕을 멀리하며 거룩 한 삶과 고독한 삶을 추구한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보낸 그의 축척된 삶에 있었다.

2)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평가하게 한다.
요한이 자신을 대중에게 대단한 선지자로 어필하기 위한 영웅심리도 아니었다. 가진 자들에 대한 반 감과 열등감도 아니었다. 요한은 종교지도자들과 가롯유다가 안정감을 두었던 돈과 사람에게 안정 감을 두지 않았다. 요한은 사람이나 명예나 돈이 아닌 하나님께 자신의 평가를 맡겼고 안정감을 두 었다. 이것에 대한 증거는 그의 고백속에 있다. 요한은 이사야를 통해 700년전에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임을 알았다.

- 요한은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랑했다.
그가 독설을 퍼붓는것 같지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 더 이상 이용과 위선과 두려움으로 살지 않고 자유와 기쁨과 사랑으로 살기를 원하는 진실이 있다.

- 요한은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정직했다.
자신에게 나오는 엘리트를 이용해 권력과 호사와 인기를 누리려는 욕심이나 이용의 마음이 전혀없 다. 이 모든것과는 비교할수 없는 하나님의 크심을 알았고 그분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광 야에서 알았기 때문이다.

- 요한은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원했다.
그래서 진통제가 아니라 예수님께 근본적인 수술을 받게했다. 광야의 시간을 회복하자.

천국의 열쇠

누가복음 1:57-79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63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심이러라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74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설교요약>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사가랴는 성령 충만함을 얻었고 아무나 볼 수 없던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통찰할 수 있었다. 과연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일까?

원수로부터 구하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통찰
누가복음 1장 71절에 보면 성령의 감동으로 사가랴는  그의 피로서 우리를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구원하실 예수님을 예언했다. 우리는 죄인이고 그 죄값을 치루기 전에는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모든 빚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신이 모두 지불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빛 가운데서 두려움 없는 사랑과 기쁨으로 주를 섬기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2-4) 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의미한다. 즉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속한 시민들이기 때문에 천국의 영향력과 축복들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나라가 요구하는 규칙과 원칙들을 순종해야 한다.

사랑 안에서 진실을 행하여 항상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라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바울이 이미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말이다. 천국의 축복은 사랑과 진리 안에 있으며 진리는 예수님을 나타낸다. 즉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성경 말씀을 전하면 우리 내면에 진리가 가득 찬다. 또한, 'The Truth'는 '진실'로 번역될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진실된 말과 행동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천국이 열리고 그 안에 있는 자유, 기쁨, 평안,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를 채우게 된다. 또한 이런 진실은 사랑에 기초를 둔다. 구약의 요셉과 그 형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천국을 누려야 하는지 보여준다.

순수함과 배려심
야곱은 라헬의 몸에서 난 요셉을 다른 자녀들 보다 더 사랑했다. 이로 인해 요셉은 17세 나이 다운 순수함도 있었지만, 다른 이의 감정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모습도 갖게 되었다. 그의 이기적 언행으로 인해 형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지만, 그는 정말로 형들을 좋아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주신 꿈을 두번씩이나 형들하게 전하게 된다. 그로 인해 분노한 형들이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린다. 그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다.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려 온 형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요셉 안에 있던 사랑을 더욱 더 성장시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분량까지 만들어 주신다. 이런 인격의 변화 과정에서 천국의 축복이 흘러온다.

형들의 문제
아무리 미워도 형들을 만나기 위해 3일 동안 10시간을 걸어온 요셉을 노예상에게 팔아버린 형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다. 첫째, 멀리서 요셉을 먼저 보고 죽이기를 꾀한 것이다. 둘째, 요셉의 말을 마음에 쌓아놓고 증오했다. 셋째, 요셉의 꿈을 축복하지 않고 저주했다. 넷째, 아버지의 고통을 즐겼다. 요셉과 아버지를 향한 섭섭함과 미움이 형들에게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복수는 잔인했고, 악했다. 요셉의 형들이 이런 악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형들의 세계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닮았다. 우리가 살면서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으로 반응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아야 한다. 요셉의 이야기는 형들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노예로 애굽에 끌려간 것이 다가 아니다. 임금의 신하 보디발의 집에서 누명을 쓰고 옥에 간 것이 끝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두번째로 높은 직위까지 올랐다. 그리고 주변국들이 흉년이 들 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그로 인해 온 가족들의 살 길이 열렸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 우상의 땅에 드러냈다.

당신의 삶이 막힐 때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시지 않았다고 쉽게 단정짓지 마라.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가랴가 성령으로 통찰한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한다. 

더 깊은 은혜를 위하여

누가복음 1:24-56
24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25 주께서 나를 돌아 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42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설교요약>
엘리사벳은 세례 요한을 잉태하고 5개월 동안 그 사실을 숨기며 은밀하게 살았다(눅1: 24) 그녀 평생의 치욕을 없애 주시기 위해, 늙은 나이임에도 주님께서 아이를 잉태하게 해주셨다 그녀는 고백했다(25) 엘리사벳은 누구 보다 경건한 여인이었고 평생을 하나님을 섬기고 따랐음에도 그녀 내면은 수치심으로 가득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치욕이 아니라, 엘리사벳이 결핍 속에서 자신의 생각으로 그린, 잘못된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온 수치심이었다.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고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이런 잘못된 수치심으로 마음이 슬프고, 심하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닫게 하는 감정들이 있을 수 있다. 이 것이 주님을 따른지 오래 되어도 치유는 계속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삶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주어질 때 사단의 속임을 주의해야 한다. 사단은 크고 작은, 많은 고통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수치심을 갖게 해 우릴 묶어두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상처를 없애주시고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 이 확신이 중요한 것은 당신이 대단한 일을 했거나, 대단한 것을 소유했을 때에도 계속 그 분의 은혜를 붙들며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사벳 임신 6개월째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28) 라고 하고 다시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30) 라며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했다. 그녀에 대해 특출난 그 어떤 것도 기술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평범한 시골 아가씨였음을 보여준다. 마리아가 선택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엘리사벳도 마리아도 공통점은 은혜로 선택을 받은 것이다.

그럼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아들 예수를 잉태하여 낳는 것이다. 마리아는 약혼을 마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생을 살고 싶어 결혼을 기다리는 지극히 평범한 젊은 처녀였다. 그분의 이런 계획은 마리아의 삶을 힘들게 할 것이 뻔했다. 사람들에게 오해, 멸시, 거절, 미움 받을 것을 각오해야 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주시면서 은혜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은혜와 다를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들을 우리를 통해 하실 때 어떻게 그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가? 다음 네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계시 (Revelation)-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을 미리 보내셔서,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것과 다니엘의 환상의 의미를 계시로 알려주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경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우릴 향한 그분의 비전을 알려주신다. 비전이 없는가? 성경과 성령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 영혼에 향기처럼 스며들 것이다.

2) 동의(Consent)- 예수님은 자신이 베풀어 주신 초자연적인 기적 자체가 사람들의 믿음의 대상이 되길 원치 않으셨다. 그 능력을 베푸신 하나님 자신을 주목하고 믿기를 원하셨다. 어떤 일에 동의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다. 그 일에 대해 적극 행동 하겠다는 의지의 결단이다. 그것이 없으면 그분과 교제도 없다. 교제가 없으면 기쁨도 없고 사랑과 행복도 없다. 믿음은 일이 아닌 하나님 자체 그분의 인격을 그리워하고 주목하는 것이다. 우린 일 때문에 힘든 것 보다 사랑하고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 삶이 힘들어 질 때가 많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 마음에 넣어 주신 본능이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3)확인 (Confirmation)- 세번째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방법은 확인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성령의 감동으로 가브리엘과 마리아가 대화한 것을 옆에서 들은 사람처럼 모두 알고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말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을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을 성령의 사람을 통해 확인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어떤 비전이나 사명을 이미 동의했다고 할지라도 다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다시 컨펌해 주신다.

4) 확신 (Assurance)- 아무리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하나님께 받은 것을 알려주어도 내게 확신이 없다면 중도에 포기하거나 자주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에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비전이 흐려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권 적인 기름부음으로만 확신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받은 순간부터 이루어 지기까지 계속해서 우리의 묶여 있는 영혼을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풀어놓는 권세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 때 가장 먼저 우리의 영혼이 더욱 자유케 되고 담대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자유케 되는 것,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을 세상에서 죄에 매여 살던 영혼들에게만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미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아직도 내면에 더 터져 나와야 할 생수들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분의 비전을 사모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그들에게 더 깊이 있는 은혜를 주시기 원하신다. 당신은 그분의 비전을 사모하는가? 

더 큰 믿음을 위하여

누가복음 1:1-23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쌔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20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22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설교요약>
바울에 동역자였던 누가는 데오빌로다라는 로마의 고위직으로 추정되는 수신자에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헌정한다. 하지만 누가는 데오빌로와 유사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전 세계의 이방인들에게 이 책들을 기록했을 것으로 본다. 누가는 8번째 반열에 속한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으로 누가복음을 시작한다.

결핍 속에서도 주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을 향한 보상
6절에 보면 사가랴만 의로운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인 엘리사벳도 의로운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런 삶의 결핍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묵묵히 주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갔다. 사가랴가 성전에서 분향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나이가 많아 잉태할 수 없는 엘리사벳에게 잉태할 것 라는 메시지를 준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시절이 다 지나간 다음에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어떤 일들이 진행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늘 하나님이 앞에 계심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의인인 것이다.

번거로운 과정을 선택하신 이유

13절에 보면 ‘네 간구를 주님께서 듣고 계신다’ 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가랴가 아이를 갖게 해 달라는 기도를 어느 시점부터 계속해서 듣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마 사가랴는 현실적인 상황으로 가브리엘의 말을 믿지 못하며 그 이유로 10달동안 말을 못하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가랴가 성전에서 분향하고 사람들이 중보기도를 할 때 이 같은 일을 하셨을까? 그 이유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더 큰 믿음으로 살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더 큰 믿음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계속 듣고 계심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시간 때에 아무리 나의 처지가 불가능한 상태라도 이루실수 있는 분이시다. 따라서 어떤 것을 구할 때 그것이 오지 않았다고 중단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다른 것으로 변형해서 주실 때에는 그것을 중단하고 다른 것을 구해야 한다.

둘째, 큰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어떤 것들이 주어지기 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만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매사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그분의 음성을 먼저 들으려 한다. 이것이 큰 믿음이다. 그래서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광야의 학교를 통과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이다.

셋째,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장애를 가능케 하시는 말씀을 믿으라. 20절에 보면 사가랴는 세가지 숙제를 천사로부터 받았다. 첫째는 지금부터 말을 못하게 된다. 둘째는 10개월 후에 다시 말을 하게 된다. 셋째는 아이가 10개월 후에 탄생한다. 사가랴는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기도해 왔던 것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이 일이 이루어 지면 그는 자신의 이성적인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신뢰하는 사람으로 바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숙제를 주신다. 숙제는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이 해야 한다. 숙제를 통해 지식을 알아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숙제는 현실이 한계에 부딪칠 때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듣는 것이다. 그리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을 맛볼 때 우리는 현실의 벽에 부딪칠 때도 평안히 담대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더 큰 믿음으로 변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숙제 현실의 벽은 무엇인가?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사람들

사도행전 28:11-31
11 석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4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15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바 되었으니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 
21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29(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설교요약

첫째, 만남을 통해 일으키는 성령의 불꽃
바울은 처음 와 본 로마에서 풍랑을 만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그를 로마에 도착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원하는 땅에 바울이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여러가지의 방법으로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에는 하나님이 일으키는 위로와 도움의 사람들이 있다. 최종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그곳에 있는 형제들이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나왔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바울을 만나기 위해 각기 다른 지역으로 부터 먼길을 달려온 것을 의미한다. 이 사람들은 약 30년 전에 (AD33년경/60-62년) 예루살렘에 왔다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제자들이 각국의 언어로 방언을 하는 것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자들일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은지 25년이 흘렀는데도 그 사랑은 뜨거웠고 순수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인간적으로 볼때 바울은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로마에 온 것이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도착했음에도 그들은 그가 복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했고 큰 위로를 받았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에 대해 냉소적이던 사람들이 따뜻한 사람들로 변한다. 인종과 언어와 피부색과 빈부귀천으로 사람을 나누던 사람들이 그런 모든 것을 중단하고 모두를 존귀하게 대한다. 그 사람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감동으로 정과 사랑을 주기 때문에 그 만남들을 통해 서로가 재충전되고 채워지고 회복되는 성령의 불꽃(Spark)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너희는 성령의 약속하신 성령으로 표, 도장이 찍힌 사람' 이라고 말씀 하신다. 한번 찍힌 표는
지워지지 않는다. 누구도 그 소유권을 바꿀수 없고 빼앗아 갈수 없다. 표는 소유권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며 누구의 소유인가를 분명하게 가늠하게 해준다. 성령은 우리가 많은 것을 해줄순 없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작고 소박한 일들을 기쁨으로 하게 하신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게 하신다. 죄를 회개케 하시고 마음이 완악해 지려고 할때 은혜로 녹이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분의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낼수 없다. 사단은 아무리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으려 해도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축복하신다.


둘째, 하나님이 인도 하시는 땅에는 제한적인 상황을 통해 이루시는 무제한의 일들이 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정부를 통해 바울이 셋집을 얻어 민간인과 섞여 살수 있도록 그 삶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바울은 여기에서 유대인들을 초청해 복음을 전했고 이방인들도 초청해 복음을 전했다. 더욱이 바울은 이 2년의 투옥생활을 하면서 지4권의 서신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들을 써서 교회로 보냈다. 이 서신서들은 지금 이순간도 어둠에 묵인 영혼들을 영혼들을 자유케 해주며 천국을 누리며 살게 해주고 있다. 2000천년 동안 셀수없는 사람들을 살리고 자유케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는 이 최고의 성경이 바울이 가장 제한적이고 육체적인 출입이 제한되어 있을 때 탄생했다. 우리는 주변의 화려하고 큰 일을 이루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가 작아지고 아무것도 아닌것 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심하면 하나님에게도 거절감을 느끼게 되고 상대적인 열등감에 젖어들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함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작기 때문에 제한적이기 때문에 타인이 할수없는 일들을 이루어 가는 것들이 많이 있다. 바울은 자신의 묶임을 본것이 아니라 자신의 묶임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무제한의 능력을 보았다. 하나님은 약하고 힘없는 자들 이라도 그분을 의지할 때 아무도 해하지 않도록 자유롭게 왕궁을 드나들듯 많은 곳들을 왕래하게 하시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 분을 의지할때 부지런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개미처럼 준비하고 예비하고 포기하지 않는 인내를 주시는 분임을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이 사도행전 29장을 써 나가길 원하신다. 그러려면 내 안에 사는 분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고, 성령이심을 날마다 의지하고 인정해야 한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만이 하실수 있는 일들을 주목하며 귀하게 여기며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부활의 증거들과 목적

누가복음 24:1-12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 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설교요약>
예수님 부활의 네 가지 증거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였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안에 장사를 지냈으며 주로 여자들이 시신에 향유 바르는 일을 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금요일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지 못하고 안치했고, 다음날은 안식일이어서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에 여인들은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 예수님 부활 사건에 대한 이런 성경의 구체적 기록은 그 당시 유대 문화 및 장례 풍습들과 일치하며,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한다.

두 번째 증거는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 문이 굴려져 나간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냥 ‘무덤 문을 열었다’ 가 아니라 ‘굴려져 열려 있었다’라는 증언 또한 그 당시 무덤 형태와 일치하며 역사성을 지닌다. 예수님 현존 당시 유대인들의 무덤은 바위를 파서 입구를 무거운 돌로 막고 시멘트로 바르는 풍습이 있었고, 성경은 이 장례 풍습과 일치하는 구체적 기록을 남겨 놓았다. 마가는 이 여인들이 인봉되어 있는 무거운 무덤 문을 누가 열어줄까 걱정하며 무덤을 찾아왔다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무덤문은 굴려져 열려 있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할 때 때로 무덤 문처럼 막혀 있을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 막힌 문들을 열어주시는 분이다.
부활이 실제였다는 세번째 증거는 무덤을 찾은 여인들 앞에 나타난 천사의 모습과 성품에 있다. 흰옷 입은 두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너무 눈부셔서 여인들은 얼굴을 숙였다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 나타난 천사의 모습들과 일치한다. 눈부신 광채를 내는 천사들은 자신들의 모습에 집중하지 않게 하고 갈릴리 에서 부활을 예언하셨던 생전의 예수님의 말씀을 여인들에게 생각나게 했다.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목시킨 천사들의 겸손한 성품은 성경 곳곳에 기록된 천사들의 성품과도 일치한다. 이 시대의 천사는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주목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누구를 주목시키며 살고 있는가?
네번째 증거는 예수님 부활 사건에 대한 가감 없는 구체적 기록에 있다. 여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인 사람들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를 뺀 남은 제자들의 수, 실존 인물임을 나타내는 여인들의 이름 에 대한 구체적 언급, 그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까지 찾게 된 이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과 베드로의 반응 등 꾸미거나 가공한 흔적 없이 기록된 점들이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일어난 사건임을 입증한다. 여기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현존 했던 동시대 가장 저명한 유대 정치가이자 역사가였으며, 예루살렘 태생의 비기독교인인 흘라비우스 죠세프스의 책 유대 고대사(Antiquities)에도 선하고 지혜롭고 뛰어난 학식을 지녔다고 소개된 예수님의 현존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및 그리스도인들의 부흥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한가? 부활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실제했던 분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네 가지 변화
첫째, 영혼을 뜨겁게 한다. 여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사도 외에 두명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30리 떨어진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던 두 제자에게 성경 전체가 자신에 대해 증언함을 풀어 해석해 주셨다. 예수님이 사라지고 났을 때 그들은 예수님 생전에 말씀을 들을 때처럼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음을 서로 나누면서 그 분이 예수님이신걸 알아챘다. 둘째, 엠마오 제자들은 그 길로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열 한 제자와 모인 무리에게 그 일을 알렸다. 부활을 믿으면 그 소식을 나누며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한다. 세째,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빵을 떼어주실 때 자신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증거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슬픈 일이나 답답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잘 보지 못할 때가 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과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신다. 마지막 변화는 꿈같은 현실을 종종 선물로 받는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 기뻐 놀라워하고 있었다. 당신은 너무 기뻐 믿을 수 없는 꿈같은 현실을 계속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사람이다. 부활은 꿈같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부활을 보여 주신 목적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라 하였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너희는 이 일에 증인이다’(눅 24:47-48) 복음서에 나약한 제자들과 달리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며 순교했다. 예수님 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기에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의 뿌리인 죽음이 두렵지 않고 내게 주신 오늘의 하루 하루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실존하셨고, 부활로 우리의 생애를 천국으로 주셨고, 부활의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길 원하신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을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부활을 믿는 사람이다.